강의실 : 영화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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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뉴 웨이브

venezia70
2005년 01월 13일 13시 29분 08초 765010
대만 뉴 웨이브






1. 대만 뉴 웨이브의 배경

1970년대에 대만도 급속한 경제 성장을 보이는데,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후 대만 정부는 다른 여타 예술 장르와 더불어 영화에도 다양한 투자를 실시한다. 1978년 경부터 시네마떼끄와 유사한 영화 도서관의 설립, 금마장 영화제를 통한 영화인들간의 경쟁의식 조성 및 관객에 대한 다양한 영화 소개, 정부에서 합작 투자한 영화사를 통한 제작비 지원, 좋은 영화 장려 제도 등이 정부에서 실시한 주요한 사업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인 투자보다도 가장 중요한 개혁 의지는 영화 검열법의 실질적인 폐지와 다름없는 검열의 대폭적인 완화에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관광부에 해당하는 신문국에 장송츄가 국장으로 취임하면서 검열제도를 상당히 완화하며 구 영화검열법의 폐지에 가까운 조치를 취하였다. 이전의 검열법 하에서는 공무원들만이 검열에 참석했으나 두 사람의 민간인이 참석하여 과거의 권위적인 검열에서 상당히 자유롭고 느슨한 명목상의 검열만이 실시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영화진흥공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중앙전영공사가 이 무렵에 창설되었는데, 여기서 기획실을 맡고 있던 우니엔쩐 같은 이는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 작업을 겸하면서 신인감독들이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계속해서 제공했다. 에드워드 양이나 코이첸 같은 해외 유학파는 물론 국내에서 계속 영화 작업을 하고 있던 후 샤오시엔이나 천 쿤호우 등의 재능을 인정하고 다양한 영화 창작의 여건을 만듦으로서 다양한 관객층의 요구를 수용하고 대만 뉴 웨이브가 자리매김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국내의 문제들은 산재해 있었는데, 전통적인 가치관의 몰락이라든가 산업화 과정 속에서 발생한 인간의 소외 의식 등이 전반적인 문제점으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영화 감독들은 국내의 문제점들과 현실적인 부분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경제 발전 과정 속에서 발생한 과도기적 상태의 문제에 접근하는 현실 인식의 작품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만 특유의 사회적 현실들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젊은 감독들에 의한,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인간성 회복을 지향하는 작품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2. 대만 뉴 웨이브의 경향

대만의 첫 뉴웨이브 영화는 1982년에 제작된 옴니버스 영화 <광음적고사>이다. 에드워드 양, 타도우첸, 추안잉, 코이첸 4명의 신인 감독이 각 에피소드별로 연출한 이 작품은 신문이나 방송매체들이 새로운 영화라는 평가를 내렸고, 평론가들도 동시에 찬사를 던졌으며 관객들의 호응도 좋아 흥행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다른 나라의 영화 산업이 분업화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대만에서의 영화 상황은 특이할 정도로 초보적이고 단순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직업적인 배우조차도 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으며 국내에서의 영화 제작 자체가 산업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절대적인 영화인력의 부족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제작자, 기획자, 시나리오 작가, 감독, 평론가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 공존체계와 단결, 상호 공존의 사고가 발생했는데, 서로 동료 감독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하고 실제 소설가나 신문기자를 영화 속에 같은 직업으로 등장시키는 경우도 허다해했다.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의 상호 공존의 사고는 상호간에 자극을 주며 역동적인 현상을 일으켜 대만 영화가 현재에 안위하지 않고 발전적인 힘을 지닐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예와 같이 대만 뉴 웨이브의 작가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처하고 자신들의 미학적 선택에 따라서 인공적인 세트 촬영보다는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했다. 대만 뉴 웨이브의 미학 자체가 사실적인 것을 선호하는 리얼리즘적 경향이 강했으므로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얻어진 화면들은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함과 동시에 환경과 인물, 자연의 조화에 있어서도 장점을 제공했다.

또 과거에는 후시 녹음을 통해 표준어인 북경어 하나만을 사용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실제의 언어생활과는 다른 방향의 녹음 작업이 실시되어 왔지만,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은 알아듣는 데 혼란이 온다고 할지라도 상황이나 직업, 나이, 배경 등 역할에 따라 그에 맞는 언어를 사용케 했다. 후 샤오시엔의 <비정성시>의 경우를 보더라도 북경어와 대만 고유의 사투리를 비롯해 대륙에서 넘어온 인물들이 그 배경에 맞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다른 대만 뉴 웨이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스타 시스템의 배제이다. 1980년대 이전의 대만 영화는 몇 명의 스타를 이용한 상업적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다. 스타는 곧 흥행이라는 상업적 사고의 틀을 깨고 신인과 아마츄어 배우들을 골고루 기용하여 역할에 맞는 배역을 설정한 것은 작품의 질적 향상과 더불어 영화의 사실감을 높이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80년대 대만 뉴 웨이브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영화 산업 체계 속에서 뉴 웨이브의 지속적인 발전이 결코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뉴 웨이브를 꽃피운 전세대 감독들의 뒤를 이을 만한 감독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현재의 대만 영화가 안고 있는 큰 어려움을 반증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미국 영화의 홍수 속에서 대만 영화는 개봉 극장조차 잡기 힘든 상황에 빠져 있으며 이러한 어려움들은 젊은 영화인력들이 영화를 떠나 다른 영상 산업으로 옮겨가게끔 하는 결과를 나았다.

근래들어 대만 영화계는 그 틀을 깨는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독립 제작의 형태를 지니고 나타나면서 기존의 대만 영화가 갖고 있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후 샤오시엔

후 샤오시엔의 초기 영화들은 대만 뉴 웨이브 영화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인 성장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펭쿠이 섬에서 온 소년(1983)>으로부터 <동동의 여름방학(1984)><동년왕사(1985)><연연풍진(1986)> 까지의 네 편의 영화는 그의 성장기 4부작으로 불리운다. 이 영화들은 사춘기 주인공이 그 자신이나 사악함, 혹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의미있는 지식을 얻는 경험을 통해 매우 고통스러운 실존의 위기를 경험하는 교양소설의 영화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인간의 보편적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이 문제를 추상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세하게 사회적 맥락과 연결함으로서 농업 사회에서 새롭게 산업사회로 변모해가는 대만에서의 성장이라는 집단적 체험으로 재구성해 냈다.

쓰라린 청소년기의 기억에 대한 후 샤오시엔의 일관된 관심은 <비정성시(1989)>에서 대만 근현대사와 만나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된다. 이 영화는 1945년 일본 식민 통치로부터의 해방에서부터 1949년 본토를 마오 쩌뚱 군에게 내준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건너와 눌러앉기 까지의 대만 현대사를 토착민 4형제의 가족사를 통해 그리고 있다. 이후 그는 전통 인형극의 장인이 가족과 일과 식민 통치에 시달리면서도 장인 정신을 견지해 나가는 삶의 궤적을 세심하게 그려나간 <희몽인생(1993)>, 영화를 촬영하는 대본과 영화 장면을 통해 하나의 현재와 두개의 과거가 맞물리면서 대만 현대사의 새로운 모습을 담은 <호남호녀(1995)>를 통해 근현대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다.

2) 에드워드 양(양 덕창)

에드워드 양은 현대화된 대만의 일상에 드러난 모더니티라는 자신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ꡐ실종ꡑ이라는 모티브로 대만의 10년간을 통과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기 연민의 슬픔과 감상주의의 표정을 내면의 붕괴로 담아낸 데뷔작 <해탄적일천(1983)>과 타이페이에서 동거하는 어느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불안을 느끼고 결국 헤어져서 새로운 상대를 찾는 영화 <타이페이 이야기(1985)>를 만든 이후 그는 도시화와 산업화를 겪으며 변화해 나가는 와중에서 삶에 대한 소속감없이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인 <공포분자(1986)>를 만들었다. 항상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산업 사회 속의 도시, 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는 항상 불안하다. 그들은 언제나 고독하며 치유할 방법조차 찾지 못한다. 이러한 인간관계와 개개인의 심리 상태를 에드워드 양은 냉정하고 심각한 자세로 접근해 나간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역시 1960년대 초 외래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던 당시의 타이페이를 무대로, 대륙에서 넘어온 외성인과 본토인 사이의 대립과 아무런 가치적 판단 기준 없이 미국 문화 속에 젖어사는 청소년들이 겪어야만 했던 사회 혼란기를 그리고 있다. 다분히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주제에 접근하는 에드워드 양의 작품세계지만 그의 작품에서도 대만의 역사와 사회 변화를 인식하고 재해석하며 영화작업에 임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3) 왕 퉁

왕 퉁은1942년 중국 북동부 출신으로 1949년에 가족이 모두 타이페이 외곽으로 이주했다. 국립영화학교 재학시절 쇼 브라더스 사에서 아르바이트로 그림을 그린 것이 인연이 되어 영화계에 입문해 여러 영화의 미술감독을 거쳐 1981년 <협잡꾼>으로 데뷔한다. 그는 다른 뉴 웨이브 감독에 비해 나이가 많았으며 낙후한 대만 영화계의 현장에서 자란 인물인데, 간결한 이야기 전개, 역동적인 영상 등 상업 영화 틀 속에서도 뉴 웨이브의 후광없이 자수성가했다.

그후 그는 미술감독의 경력을 살려 탐미적인 역사물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대만 영화의 거목으로 인정받은 계기는 1987년작 <허수아비>에서 <바나나천국(1989)> <돌아오지 않는 산하(1992)> 로 이어지는 대만 역사 3부작이다. 특히 허수아비는 대만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웃음과 소박함과 풍자의 품격을 지닌 블랙 코미디로 대만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참고 문헌]

1. 아시아 영화의 이해(주윤탁, 김지석 편집) - 제3문학사
2. 아시아 영화를 다시 읽는다(김지석) - 한울
3. 세계 영화 기행1.2 (조재홍 외) - 거름
4. 영화론의 전개와 제3의 영화(김정옥 외) - 시각과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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