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네오 리얼리즘의 배경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범죄와 비도덕적인 것이 영화에 담겨서는 안되다는 지침을 내려 놓았다. 이 시기에 만
들어진 영화들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었으며 오직 이탈리아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웅대한대하 사극물과 감상적인 상류 계급 멜로 드라마 ━ 후에 "백색 전화 영화 White telephone movie" 라고 불린 ━
의 제작에 편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면 좋은 현상도 있었는데 그것은 유명한 "치네치타 스튜디오"가 설립되고, "이탈리아 영화학교"가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훨씬 중요한 것으로 몇몇 영화 감독들이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면에서 파시즘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네오 리얼리즘의 존재는 이 처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처들에 대해 이들 감독들이 느꼈던 불만에도 일정 부분
빛지고 있다. 그래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1942년작<강박 관념>을 네오 리얼리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이유는 비스콘티도 1930년대 프랑스의 장르노와르 밑에서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운동의 전조라고 인정되는 영화<토니(1934)>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게 된 좋은 기회가 있었다. <토니>는 프랑스에서 사느 이탈리아 이민 노동자가 한 여성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인해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르노와르는 비직업 배우를 고용하고 야외 촬영을 했으며 현장음을 그대로 살려 사운드 트랙으로 삼았다. 영화는 입자가 굵고 사실적이엇으며 게다가 현장의 잡음들이 다큐멘터리적 ┏핍진성┓을 강화했다.
1943년 무렵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은 종말을 맞고 있어고, 1944년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했다. 파시즘이 몰락하자 노동 계급과 도시인의 궁핍한 삶의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들은 현실의 거친 모습들을 담으려고
했고, 관객들의 현실을 통해 관개과 만나야 한다고 생각 했다. 이런 원칙들은 영화의 스타일과 내용에도 스며들엇으며 사회적 현실,즉 전후 이탈리아에 만연한 빈곤과 실업에 그 초점은 맞춰졌다.
2. 네오 리얼리즘의 경향
네오 리얼리즘의 토대를 이루는 전제들은 그 운동의 주요한 창안자중 한 사람일 뿐 아니라 대변이기도 했던 시나리오 작가 세자르 자바티니에 의해 매우 강력히 주창되었다. 그는 한 유명한 회견에서 네오 리얼리즘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생가하는 네오 리얼리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독창성이라면 '이야기'의 필연성이 인간의 좌절을 감추는 유일한 무의식적 방법이었다는 것과 그러 종류의 상상력이 단지 생생한 사회적 현실들 위에 생명이 없는 공식을 추가하는
기술이었다는 섯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엇다는 것이다. 이제 영화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거나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현실과 실재하는 것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숙고 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네오 리얼리즘 영화는 먼저 리얼리티를 위해 문학작품의 각색이 아니라 현실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둘째 사회적 현실에 초첨을 맞추었고 셋째 이런한 리얼리즘을 확보하게 위해 지방 사투리도 그대로 놓아둘 정도로 대화와 말을 자연스럽게 놓아 두었다. 또한 비직업 배우의 기용과 야외 촬영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위의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는 비토리오 데 시카의<자전거 도둑(1948)>밖에 없다.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는 문학 작품을 각색 했고<무방비 도시>는 스타 배우 안나 마냐니를 기용하고 3개의 소형 스튜디오 세트를 사용해 조건을 완벽하게
따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1945년 치네치타는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어 잇었고 녹음 기재는 귀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촬영은 실제 장소에 의존 했고,그들의 영상은 기록 영화처럼 거칠었다. 로셀리니의<무방비 도시>역시 성질이 다른 자투리 필름들로 촬영되었다. 또한 거리나 건물 내에서의 촬영은 이탈리아 촬영 기사들로 하여금 할리우드 ┏삼점┓ 조명 체계와는 다른 가능한 조명 상황으로 촬열하게 되었다. 대사를 후시 녹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독들은 소수의 스탭으로 현장 촬영과 카메라 움직임을 사용할 수 있었고, 이러한 현장 작업이 허용하는 연기와 배경에 대한 즉흥적인 결정은 미장센과 카메라 움직임에 어느 정도 자유를 주었다.
내러티브에 있어서도 네오 리얼리즘은 비교적 관습적인 플롯 구성을 거부하고 그 어떤 해결책을 제시 하진 않았다.
기촌의 백색 전화기 영화나 할리우드 폐쇄된 내러티브와는 대조적인 열린 성격을 갖게 되었다.
영화 운동으로 볼때 네오 리얼리즘은 10년을 지속했다. 그러나 네오 리얼리즘 최후의 작픔을 데 시카의<지붕_1956>으로 꼽는다면 14년으로 늘어 난다. 어떤 의미에서 네오 리얼리즘은 1950년대초 소멸되었다. 전후 이탈리아가 다시 번영을 맞기 시작하자 당시 이탈리아 정부는 이탈리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품은 모두 상영이 금지되기
시작하였고 이제 유명해진 네오 리얼리즘 감독들은 보다 개인적인 관심사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네오 리얼리즘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뒤에 유럽,미국,인도 등의 영화 제작 관행에 미친 영향력은 압도적이엇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로베르토 롯셀리니
<무방비 도시>눈 1943-1944넨에 로마사람들이 겪었던 실제 사건들을 기초로 했다. 이 시기는 연합군 부대가 로마에 입성하기 전이며 여전히 독일의 통제하에 있던 때였다. 롯셀리니는 다양한 원천으로 재원을 끌어모아 비밀리에 영화를 만들었는데,돈은 계속 부족했고,제작 조건은 믿을 수 없이 원시적이었다. 기술적이고 재정적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는 다른 이탈리아 영화 제작자들로 하여금 동시대의 현실을 다루는 그 개념들과 방법을 추구하도록 고무시키는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나타났다.
1934년부터 영화 작업을 해온 롯셀리니는 무솔리니의 정권 아래에서 백색 전화기 영화류의 작품을 만들어 오다가 시나리오 작가인 세리지오 아미다이와 페데리코 펠리니와 함께 혼란스런 이탈리아의 실상을 그들이 할수 잇는 최대 한도의 것으로 보여주려고 했고 그 거친 아름다움과 강렬한 정서는 이전의 어떤 것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롯셀리니는 곧이서 네오 리얼리스트의 양식과 의도를 갖고 있는 다른 주요한 영화인<전화의 저편_1946>을 선보였다.
이 여화는 여섯 개의 개별적인 에피소를 통해 정복자들과 피정복자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연
합군이 취한 군사적 행동을 추적하고 있다. 지도들과 뉴스릴 필름이 부분들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그 극적인 삽화들이 더 큰 역사적인 맥락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각각의 에피소들은 최초의 불신으로부터
점차 친밀한면을 스케치하고 있다. 영화 전체는 자발성을 통한 솔직함과 활력을 실현하고 있는데, 롯셀리니의 양식은
제재와 그에 대한 작가로서의 태도를 완전하게 견지해 나가는 것이다.
2) 비토리오 데 시카
비토리오 데 시카는 감독이 되지 전1930년대의 유명한 영화 배유였다. 감독으로서 그 최초 작품은 시나리오 작가 자바티니와의 첫 공도 작업인<어른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_1943>였는데, 비스콘티의 <강박 관념>동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사실주의적인 경향이 어느정도 비교가 될만 하였다.
전후 네오리즘의 선상에서 그는 군인들의 구두를 닦고 뚜쟁이질을 하고 암시장에서 물품을 팔며 근그니 생계를 이어나가는 로마소년들의 이야기인<구두 닦이_1946>를 만들었고,1948년 네오 리얼리즘의 이상에 가장 가깝고 평해지는 <자전거 도둑>을 내놓는다. 얼마 동안 일할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갖게 된 실업 노동작 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전거를 도난당한다. 이야기를 도둑질로 이끌어 가는 사건들과 자전거를 되찾으려는 시도는 영화속에 함축된 사획적이고 정치적인 비판을 포함하여 완전하고 의미있는 예술 작룸에 충분한 "풀롯"을 제공한다. 또한 주인공과 그의 아들이 자전거를 찾는 과정을 추적하는 동안 언뜻보기에는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탈리아 사회의 다양한 측면이 묘사되는데, 고도의 절제와 능숙함이 화면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으 알 수 있다.
비록 그 착상이 기록영화에서 보여지는 이전의 방법들에 기초하고 있지만 <자전거 도둑>의 정서적인 풍부함은 상당 할 정도로 보통 사람과 그의 어린 아들의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3) 루키노 비스콘티
루키노 비스콘티의<강박 관념_1942>은 <무방비 도시>가 나타나기 전 네오 리얼리즘의 전조라는 것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 그영화의 주제 내용보다도 의도적으로 단조롭고 매끄럽지 못한 그 자연주의적 양식 때문에 더욱 그럭하다. 1948년 그는 <흔들리는 대지>라느 네오 리얼리즈의 걸작이라고 인정되는 작품을 만들었으나 이 경우에는 주로 양식보다는 오히려 그 제재와 제작 방법에서 네오 리얼리즘적이었다.
<흔들리는 대지>는 독점적 지배를 행사하는 상인들에 의해 가난에 시달리는 한 시실리 어부 일가에 대한 영화로, 공산당의 후원을 받아 전적으로 현지에서 야외 촬영되고 비지업 배우를 기용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실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이 극단적인 양식화의 형시겡 기대고있는데, 여부들은 조심스럽게 장식적으로 모여있고 그들의 움직임은
안무에 따라 이우어진다. 조명은 풍부한 대비로 정교하며 마치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처럼 조절되고 배치 되어있다. 다른 네오 리얼리스트들의 영화들보다는 그리스 고대 연극에 더 적합할 것 같은 장면들도 보인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그의 후속 작품에서 볼수 있듯"바로크식 원근도법"이라고 불리는 것에 더욱 정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