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자체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개선되는 것이다. 지난 40여 년의 할리우드도 그랬다. 제작과 상영에 관련된 산업 적 요구에 의해 카메라, 필름, 영사기, 스크린 등의 기술혁신이 이루어졌으며, 제품 차별화와 새로운 것을 바라는 관객의 기대치는 엔지니어들을 더욱 채찍질했다. 관객이라는 존재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바라기 마련이며 기술적 발전에 의한 새로움에 매료된다. 그들은 좀더 큰 화면, 좀더 생생한 효과를 원했다.
할리우드는 매력적인 화면을 위해, 그리고 제작 공정의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위해 필름 현상 장비와 테크닉에 초점을 맞추었고, 새로운 질감과 규격을 지닌 필름을 개발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개발과 제작에 드는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새로운 장비와 테크놀로지를 개발하는 데 드는 경비는 과연 벌충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기대는 그런 시도를 부추겼고, 그들은 좀더 화려하며 강도 높은 것을 원했다.
와이드스크린
와이드스크린(wide screen)의 역사는 무성영화 시기부터 시작된다. 20세기 폭스의 70밀리 그랜저(Grandeur), 파라마운트의 마그나필름(Magnafilm), 워너 브러더스의 65밀리 바이타스코프(VitaScope), 아벨 강스의 폴리비전 (Polyvision)등 파노라마적인 풍경을 담을 수 있는 긴 화면은 사람들의 실험정신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는 유성영화 (talkie)개발에 더욱 역점을 두고 있었고, 와이드스크린 개발에까지 돈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0년대에 텔레비전의 강력한 도전을 받은 할리우드는 과거 잠시 접었던 와이드스크린 실험을 다시 시작한다(이처럼 할리우드는 어떠한 ‘요구 ’가 있을 때 급속히 기술의 발전을 이룬다. 영화가 발명되기 이전에 이미 축음기가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27년에야 유성영화가 등장한 것은, 20년대에 와서야 유성영화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Cinerama
1950년대 첫 와이드스크린 시도는 시네라마(Cinerama)였는데 발명자는 프레드 월러(Fred Waller)였다. 시네라마의 원형은 바이타라마(Vitarama)로 이스트만 코닥이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안쪽이 휜 대형 스크린에 이미지를 영사하기 위해 임시변통으로 만든 것이었다. 프레드 월러의 작업엔 석유왕 록펠러와 ‘타임(Time)’이 돈을 댔으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1950년에 지원을 중단한다. 후견인을 찾던 그는 로웰 토머스(Lowell Thomas)와 마이크 토드(Mike Todd)를 만난다(토드는 이후 ‘토드-AO ’시스템을 통해 영화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다).
시네라마 개발 착수에 들어간 그들은 1952년에 <이것이 시네라마다 This Is Cinerama>를 개봉한다. 평범한 다큐멘터리였지만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극장이 몇 개 안 된 탓도 있지만 - 영화관은 미어 터졌다. 메이저 영화사는 1962년 <서부 개척사 How the West Was Won>에서야 시네라마를 시도한다. 시네라마는 세 대의 영사기를 이용해 상영하는 시스템이었다. 촬영 또한 세 대의 카메라로 진행됐고, 27밀리 광각렌즈로 촬영된 필름은 세 대의 영사기로 영사되었다.
하지만 광각렌즈라는 한계는 화면에서 뒤틀림 (distortion)을 만들어냈다. 클로즈업은 도저히 할 수 없었고, 너무 넓은 범위를 카메라가 잡기 때문에 조명하기도 힘들었다. 세 개의 화면으로 나뉘어져 있기에 카메라가 움직이는 쇼트도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해도 스크린에 영사할 때 각 화면 사이의 봉합 부분은 티가 났다. 시네라마는 다큐멘터리에 적합했을 뿐 극영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하면 시네라마는 귀찮았고 비실용적이었으며 비쌌다. 그것은 특별 이벤트가 아니면 세계박람회의 견본시 같은 곳에나 출품할 때 필요했다.
하지만 의외로 시네라마는 흥행에 성공했다. 1960년까지 미국에 95개의 시네라마 극장이 생겼는데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시네라마 방식으로 제 작된 영화의 수는 적었지만 수익성은 좋았고, 시네마라 초기 5편의 ‘기행(紀 行)시네라마 ’는 22개 극장에서만 상영되었지만 총8천2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시네라마 기술은 점점 개선되어 1950년대엔 하나의 렌즈만으로도 가능해졌고 화면을 분할하지 않고도 와이드스크린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때 <서부 개척사>같은 영화가 나왔는데 이 영화는 65밀리로 촬영되었다 (일반적인 필름 사이즈는 35밀리다).
CinemaScope
시네라마가 개인 발명가의 성과물이라면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는 처음부터 영화산업 내에서 개발되었다. 선구자는 20세기 폭스였다. 폭스의 연구부서는 몇 년 동안 와이드스크린 포맷을 연구하고 있었고, 시네라마가 실용화되자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53년 2월, 폭스는 이후 모든 작품을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들은 극장주들을 모아놓고 시사회를 열었고, 3월말이 되자 미국 전역에서 1,200건의 주문이 들어왔다. 첫 영화는 성경을 소재로 한 대하 서사극 <성의 The Robe>(53)였다. 시네마스코프의 스펙터클한 화면엔 아무래도 성서 드라마나 스펙터클 액션이 필요 했고, <성의>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시네마스코프는 하이퍼고나(Hypergonar)렌즈를 사용해 가로 세로 ‘2.77:1 ’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스퀴즈 작업(화면의 가로 길이를 줄이는 작업)을 거치지 않고 영사하면 ‘2.66:1 ’까지 비율이 나왔다. 이것은 시네라마와 거의 비슷한 비율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렌즈였다. 당시엔 하이퍼고나 렌즈를 일반 렌즈 위에 덧씌워 사용했고 두 렌즈의 포커스를 모두 맞춰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포커스 맞추기가 쉽지 않았고 시각적 뒤틀림이 생겼다. 트래킹 쇼트는 거의 불가능했다.
1953년 4월, 폭스는 (요즘은 콘택트렌즈 브랜드로도 유명한) 바슈&롬(Bausch&Lomb)과 계약하고 카메라와 영사기 연결장치 개발을 위해 250만 달러를 투자한다. 추가비용 62만5천 달러까지 포함하면 엄청난 금액을 투자한 셈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기존의 결점은 많은 부분 보강되었다. 이후 아리플렉스(Arriflex)가 핸드헬드 시네마스 코프 카메라를 발명했을 때는 시네마스코프 영상의 혁신을 가져왔다. 폭스는 사업적으로 커다란 야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촬영부터 사운드 재생과 영사에 필요한 모든 제품을 패키지로 묶어서 판매하려고 했다. 그들은 아나모픽 렌즈(anamorphic lens, 굴상 렌즈)에 마그네틱 스테레오 사운드트랙을 덧붙이고, 자신들이 개발한 스크린인 ‘미라클 미러(Miracle Mirror)’를 엮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극장주들의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지나친 비용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후 폭스는 다른 스튜디오 들을 설득해 시네마스코프 설비를 갖추도록 권유했다. MGM이 처음으로 받아들였는데, 다른 스튜디오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시스템을 개발하거나 눈치 를 보고 있었다.
3-D
1951년 군즈버그(Gunzburg)형제는 내추럴 비전(Natural Vision)시스템을 개발한다. 이것은 3차원 입체영상 시스템이었는데, 시네라마와 시네마스 코프 내추럴 비전 등은 모두 텔레비전의 도전에 맞서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내추럴 비전의 3-D 영화 시사는 시네마스코프보다도 먼저 있었다. 아프리카를 무대로 동물들이 등장하는 어드벤처 영화인 <브와나 데블 Bwana Devil>(52)은 사자가 화면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장면을 3차원으로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시사 후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콜럼비아와 워너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파라마운트와 MGM과 유니버설은 각자의 시스템을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해 워너는 <밀랍인형의 집 House of Wax>(53)을 개봉한다. 3-D 영화는 두 대의 카메라를 이용해서 촬영한다. 그때 렌즈에 각각 다른 색의 필터를 끼우고, 완전히 겹치게 찍는 것이 아니라 약간 덜 겹치게 촬영한다. 그리고 상영할 때도 약간은 다른 위치에서 영사기를 돌려 스크린에 영사되는 화면이 완전히 겹치지 않게 한다. 관객들은 폴라로이드로 만든 안경을 썼고, 이 복잡한 과정은 착시현상을 일으켜 3차원 영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3-D 영화는 1년 정도밖엔 가지 않았다. 그 과정이 너무 복잡했고, 각 스튜디오마다 다른 시스템이어서 혼선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Todd-AO
1955년 마이크 토드와 아메리칸 옵티컬(American Optical)은 새로운 대형화면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일명 토드-AO(Todd-AO)로 불린 이 방식은 아나모픽 렌즈로 촬영하지 않고도 65밀리 필름을 이용해 2.2:1의 화면을 만들어냈다(65밀리 필름은 5밀리의 사운드트랙을 포함해 70밀리로 인화되었다). 토드-AO를 위해선 더 크고 더 밝은 영사기가 필요했으며, 이 장치는 와이드스크린에 존재하던 몇 가지 기술적 난제를 풀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사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뒤틀림을 바로잡은 점이다.
토드-AO 시스템은 스크린 뒤의 스피커와 6개의 서라운드 스피커 등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화면과 웅장한 사운드 시스템은 엄청난 영화적 경험이었다. 하지만 토드-AO는 새로운 영화제작 방식을 낳았는데, 고난도의 제작 과정 때문에 증가한 제작비로 인해, 확실히 흥행하고 미리 팔 수 있는 소재만 선택했다. 그러나 토드-AO는 타산 맞추기가 쉽지 않은 방식이었다. 결국 시네마스코프가 주류를 차지했고 토드-AO는 특별한 관객들만이 찾았다.
그 결과 16년 동안 토드-AO 극장은 15개밖엔 생기지 않았다. 이후 파나비전(Panavision)이 생기자 시네마스코프의 화면 뒤틀림은 대폭 교정되었다. 이 시스템은 1958년에 많은 메이저에 의해 도입되었고 폭스가 마지막으로 1968년에 도입했다.
IMAX
아이맥스(IMAX)는 1967년 몬트리올 박람회와 1970년 오사카 박람회 때 첫 선을 보였다. 그리고 1973년엔 옴니맥스(OMNIMAX)가 나왔다. 하지만 너무 큰 사이즈 때문에 아이맥스와 옴니맥스는 피사체 선정에 문제가 있었다. 과거 시네라마처럼 이것 또한 자연 다큐멘터리에나 적합했다. 또한 관객들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구조이기 때문에 쇼트의 지속시간은 좀 더 길어야 했고(사람들에게 형체를 파악할 시간은 주어야 했다), 그런 한계로 클로즈업 같은 앵글이나 극영화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이맥스나 옴니맥스 영화를 상영하려면 극장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현대는 ‘스펙터클의 사회 ’였고, 많은 쇼핑몰들은 아이맥스 극장을 앞다투어 마련했다. 아이맥스는 현대사회의 소비적 공간을 상징하는 기호가 된 것이다. 요금은 비쌌지만 관객은 끊이지 않았다. 1986년 엑스포에선 아이맥스 3-D가 선보였고, 1995년엔 3-D 아이맥스 ‘극영화 ’인<용기의 날개 Wings of Courage>가 개봉했다. 장 자크 아노가 감독하고 발 킬머, 찰리 신이 출연한 이 영화는 40분짜리 산악 액션 어드벤처 영화였다.
출처: escre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