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에서 영화가 상영되었음을 밝혀주는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영화광고이다. 이 광고에 의하면 10전의 입장료를 받고 동대문의 한성전기회사 기계창고에서 하오 8시 부터 10시 까지 단편영화를 상영하고 있음을 알렸다. 활동사진 이전의 영상에 대한 접촉인 1894년 소공동에 차린 천연당 사진관에서 비롯된 사진 촬영은 하나의 이변이었다. 물론 구전에 의하면 1897년 충무로의 본정좌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고 하지만 확인된 기록은 없다. 이 밖에도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Burton Homes)의 여행기에서 언급된 내용들은 1899년 한국에서 전차를 타고 영화촬영 했음을 밝히고 있다.
어쨌든 한국의 대중에게 공식적으로 영화가 전래된 것은 1903년 동대문 기계창 이후로 봐야하며, 원각사의 전신인 협률사(왕실극장)를 비롯하여 영화 흥행을 목적으로한 전용 영화 극장이 미국이나 프랑스의 최신필름 등을 본격적으로 상영하여 서울의 명물로 등장하였다. 동대문의 기계창고는 동대문 활동사진 관람소로 명명하다가 1908년 광무대로 바뀌어 영화와 함께 민속 기예도 공연하였다. 이어서 단성사가 문을 열었고 연흥사, 고등연예관(스카라 부근), 우미관(국도), 조선극장, 장안사(파고다), 대정관 등 일인들이 극장을 소유하여 외화를 직수입 상영하였다고 한다. 1910년 이후 한국에 들어온 영화들은 지금 들어봐도 꽤나 수준이 있는 외화들로 그 당시 관객의 영화 문화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였나 가늠할 수 있다. <쿼바디스><엘리자베스 여왕><지바고><부활><쟌다르크> 등의 문예물이나 <인톨러런스><호반의 처녀> 등 실험극이 상영되었다니 놀라운 이야기다.
2. 한일합방과 영화의 도입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한국은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열강들에게 차례로 문호를 개방했다. 처음 활동사진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1897년에서 1900년 무렵은 그야말로 이름만 주권 국가이지 외인들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고 각종 이권이 외국에 양여되거나 침탈당하던 때였다. 특히 일본은 러일 전쟁이 일어난 후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한국에서 전략적으로 필요한 지역을 사용할 수 있도록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후, 한국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잇는 협약을 계속 체결하여 일본의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다.
한국이 이처럼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만 것은 수구, 개화파의 대립과 이로 인한 정국 불안이 가장 큰 내적 요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한국이 어느 외국세력으로부터 자립하려고 할 때마다 또다른 외세에 더욱 크게 의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에 주재한 서양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의 무능력과 부패에 실망을 느끼고 한국을 뒤로 제쳐놓은 채 한국의 운명을 일본과 협의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국내외 정세는 한일간 강제합병이라는 쓰라린 역사의 한 순간을 우리 민족에게 안겨주었다.
이처럼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사진 관객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활동사진은 근대화된 서구 문명을 접하는 몇 안되는 통로 중 하나였는데,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이후 국내에 근대적 교육 기관으로서 사립학교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인들, 특히 이미 학령을 넘어섰거나 여타 이유들로 인해서 교육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사람들이 근대화된 신문물은 접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만나게 된 새롭고 신기한 기계 출현, 그리고 그것이 뿜어내는 빛줄기가 스크린 위에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의 풍물을 소개하는 모양을 보면서 사람들은 전부터 품어오던 개화에 대한 열망과 호기심이 조금이나마 충족되는 것을 느꼈다. 말하자면 활동사진(영화)은 개항의 물결이 파도처럼 들어오는 관문인 동시에 폐쇄된 민족 심리의 거대한 해방, 그 충족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3. 연쇄극(kinodrama)
일제하에서 폐쇄된 생활을 영위하던 한국의 지식인들은 영화를 통해서 선진 제국의 문화와 역사를 통해 오락성과 예술성을 향유했고 자유와 해방의 바람으로 한국 예술의 성장의 꿈을 키웠으리라 본다. 신연극, 신문학은 물론 무용, 음악, 미술 등 영화 문화로부터 받은 충격은 한국의 젊은 예술인 등을 자극하고 깨우치게 하였다. 한국영화의 제1세대 개척자들은 연쇄극이 시작되기 전까지 연극 극장 공간에서 파묻혀 있었는데, 당시 신극좌를 운영하던 김도산은 연극계의 불황을 극복하려는 수단으로 연쇄극을 꿈꾸고 있었다. 연쇄극이란 연극 도중에 막과 막 또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무대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장면을 활동사진으로 촬영해서 스크린 위에 비추어 주면서 연극의 효과를 높인 것이다.
마침 황금관의 신축 2주년 기념(1908)으로 <선장의 처>라는 연쇄극이 한국땅에 선보이게 되었는데, 김도산은 여기에 매료되어 민족자본가 박승필과 의기투합하여 <의리적 구토(1919)>를 제작하게 된다. 이 작품의 내용은 그 당시 만연하던 신파 활극류에 불과하나, 우리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발표는 영화사적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민족의 자긍심을 내세운 작품이다. 일인들이 운영하던 극장속에서 유일하게 조선인으로서 단성사를 운영하던 박승필의 숨은 뜻은 우리 전통 예술의 활성과 새로운 영상 예술에 대한 기득권의 야망이 읽을 수 있다. <의리적 구토> 이후 <시우정(1919)><형사고심(1919)> 등 잇달아서 제작된 4편의 연쇄극이 그 점을 암시한다. 아쉬운 점은 영상 기술이 없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인 촬영 기술에 의존하여 일본인 소유의 카메라인 영국제 윌리엄슨(Williamson) 궤짝 카메라로 찍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한국 최초의 영상 예술이다. 영화 미학적으로 볼때 연쇄극은 연극 예술의 확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연극 공연 사이에 스크린에 비추어진 영상의 참여는 연극무대의 보조적 존재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일종의 무대막 구실에 불과한 기능이다. 따라서 영화라 명명하기엔 영화적 조건이 미미하고 영상으로서의 가치는 필름으로 스크린에 보여 준다는 물리적 조건만으로도 유효하다. 세째, 영화 작업의 여건을 마련했다.
촬영을 제외한 모든 작업이 순수한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워졌다는 사실은 완전한 한국영화를 만드는 기초적인 작업을 완수 했다고 본다. 이후 이필우가 일본에서 영국인으로 부터 촬영과 현상 기술을 배우고 귀국하여 1920년 <지기>를 비롯하여 다수 연쇄극의 활동사진 부분을 촬영하게 되었는데, 이로서 모든 제작과정이 순수히 국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박승필의 민족자본과 김도산의 우리기술로 만들어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 이후 2,3년은 바야흐로 연쇄극의 시대였다. 연쇄극 제작은 주로 당시 신극단체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기세는 ‘문예단’을 이끌며 <지기(1920)><장한몽(1920)> 등을 연쇄극으로 만들었고 ‘혁신단’을 주도한 임성구는 <학생절의(1920)>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화려하게 출발하며 개화한 연쇄극은 불과 3년이 못되어 소멸하고 마는데, 이기세가 ‘문예단’을 해산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전향하고 얼마가지 않아 ‘신극좌’의 김도산마저 뜻하지 않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데 원인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연쇄극은 자연 소멸되고 말았는데, 찬연했던 초기에 비해 너무나 허무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어찌되엇든 이 연쇄극은 한동안 외국 활동사진에 빼앗겼던 관객을 어느 정도 돌이켰고 우리 영화 제작의 시험기가 된 중요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