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아메리칸 시네마
(New American Cinema)
1.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배경
1960년대 미국은 연좌 데모와 시위, 행진, 폭동 등에 의한 시민권 운동과 학생 파업, 참가 거부 등에 의한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저항 운동과 함께 소위 청년 문화라고 불리우는 것이 생겨났는데,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물질 축적만을 추구하고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 정직과 예의가 결핍되어 있는 그들 부모 세대들과 획일화된 교육 체계, 거대 산업과 공모된 정부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속에서의 무관심, 자기 만족, 순응주의 등 너무도 배타적인 관심 영역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들은 머리를 기르고 성의 구별이 모호한 -과거의 전통과는 다른- 옷을 걸침으로써 자기들의 단결을 표시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사회로부터 일탈하여 마약이나 히피 문화에 빠져들어가기도 했다. 또한 그들이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여기는 것에 미국인을 개입시키고, 미국 내의 빈곤과 불공평, 인종 차별을 방관하도록 한 정치-경제 구조를 활발히 공격하였다.
이 시기의 정신은 ꡐ청년 영화 youth filmsꡑ 혹은 ꡐ현재 영화 now filmꡑ 라 불리우는 영화들 속에 반영되었으며, 저항 운동의 열기가 줄어들기 전까지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 영화들은 구세대와 갈등하는 젊은이와 그들의 새로운 생활 방식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이제 극장의 주요 단골 손님이 된 청년 관객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때로 그것은 젊은 영화감독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어떤 방법으로든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탐구하였고, 몇몇은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또 외국에서 들어오는 당시의 영화들처럼 여러가지 형식을 -전통적 허구 양식과 함께 기록 영화나 실험적 양식이나 주제 등을- 결합시켰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1967, 아서 펜)> <졸업 (1967, 마이크 니콜스)> <이지라이더 (1969, 데니스 호퍼)>의 공개와 함께 ꡐ뉴 아메리칸 시네마ꡑ 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2.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경향
이들은 영화를 오락을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객들에게 자극을 주고 생각하게 하며 심지어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본 것에 혐오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청소년 비행 문제, 항의 데모, 마약 문제, 시민의 권리 투쟁, 경찰의 잔학성과 편협성 등과 함께 빈민가를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또한 현대 세계의 혼란상을 포착하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영화들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든가, 극단적인 편견과 객관성의 부족으로 결함이 많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한 영화들은 전통적 가치를 공격하는 한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내용이 기괴하고 대담하고 통렬할수록 흥행 수익은 더욱 높아졌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젊은이들이 미국의 영화를 좌우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감독들과 제작자들 조차 젊은 세대층이었으며, 그들은 노골적인 언어와 나체의 묘사, 그리고 생생한 성 행위를 묘사하는 대담한 이야기를 선택하고 또 그러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많은 당대의 감독들이 표현하는 주제들은 복잡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야기한 의문점들은 항상 심오한 것들이었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들 중에서 하나의 특징있는 주제나 중심적인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기는 어렵다. 1960년대의 영화들은 그 당시의 모든 면을 반영하고 의문시했던 것들이었다. <불리트(1969)><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야생화(1969)> 같은 영화들은 폭력에 대한 인간의 냉담함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 다른 영화들은 금지된 사랑의 영역을 우선적으로 다루기도 했는데, <조지 수녀의 살인(1968, 로버트 올드리치)> <하사관(1969)> <계단(1970)>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아서 펜의 <앨리스의 식당(1969)>,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1968)> 등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문제였던 세대 간의 차이를 다루었다. <푸트니 스우프(1969)>와 <미디엄 쿨(1969)>은 가족과 사회 간의 불화합을 파헤쳤으며, 특히 <미디엄 쿨>은 자치 문제에 대한 논쟁을 다루었다.
특히 <이지라이더>는 18세부터 25세 젊은 관객들에게 선호의 대상이 되었는데, 당시의 유행가 가사에 나타난 것과 같이, ꡐ미국을 찾아서ꡑ 마리화나와 환각에 젖어 오토바이를 타는 두 명의 젊은이는 청년 문화의 우상으로 여겨졌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빌리와 캡틴 아메리카는 고지식한 사람들과 남부의 촌놈들에 의해 죽는다. <이지라이더>는 그와 관련된 주제를 다룬 장편 영화들을 많이 만들게 하였으며, 그들 중 일부는 당대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에 대한 비판에 있어 훤씬 간접적이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아서 펜
1922년 필라델피아 태생으로 TV 코미디와 쇼 프로를 통해 경력을 쌓았고 이후 1958년 <왼손잡이 건맨>으로 데뷔했다. 1967년에 만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흔히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포문을 연 작품으로 말해지지만, 아서 펜의 의도가 그렇게 새로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영화들은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짚어내는 '해부적인 시각'으로 유명하다. 그는 폭력과 권력, 권위의 문제에 집착하는 감독이며, 비교적 건강한 권위를 표현한 <추적(1966)>, 권위에 대한 일그러진 상(象)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리고 <작은 거인(1970)>이나 <표적>에서 보여지는 합법적 폭력들은 그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케 한다. 그에 대한 비판은 그가 해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대안 제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닌 듯하다.
2) 데니스 호퍼
1936년 캔자스 주 다지 시티 태생으로 12세부터 아역 배우로 활동했다. 또한 <이유 없는 반항(1955)> <블루 벨벳(1986)> <워터 월드(1995)> 등 모두 74편의 영화에 출연한 악역 전문 배우로 유명하다. 한편 그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1967)>의 아서 펜과 <졸업(1967)>의 마이크 니콜스 감독과 함께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힌다. 1969년에 40만 달러를 들여 만든 <이지 라이더>로 깐느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제작비의 40배인 16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다. <라스트 무비(1971)> <칼러스(1988)> <체이서(1994)>등 모두 7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참고 문헌]
1. 세계 영화사 (잭 C. 엘리스/ 변재란 역) - 이론과 실천
2. 영화 예술 (데이비드 보드웰, 크리스틴 톰슨/ 주진숙, 이용관 역) - 이론과 실천
3. 세계 영화 기행1.2 (조재홍 외) - 거름
4. 영화 사전 - 이론과 비평 (수잔 헤이워드/ 이영기 역) - 한나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