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 영화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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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 한국영화의 또 다른 역사

73lang
2004년 06월 30일 19시 54분 02초 763186
호랭이 아줌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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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은 '폰팅 경험담'이니 '노출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같은 음란 스팸들에게 점령을 당해서리 --;;;

활동이 완존히 중지된 영화 커뮤니티인 '포토 비둘기'라는 까페에서

퍼 온 글임미다.

영화 평론가 이시자 교수님이신 조희문씨가 스크린 쿼터 문제에 대한 발언들이나 기타 영화적인 견해가 굉장히 '수구적(?)'인 면이 있어가꼬

갠적으루넌 벨루 호감이 가지 않넌 분이지만서도 ^^;;;;

한국영화사에 대한 나름의 의식을 가지고 계신건 사실인거 같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일도 재미있지만 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얽힌 이야기도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지라 참 재미있네요.
영상문화정보의 21호에 실린 조희문님의 글입니다

Movie Theatres - Another History of Korean Movie
조희문 Cho Heemoon-상명대 영화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종로는 한국영화의 고향이다.

서울 시민을 상대로 처음 영화상영을 시작한 곳이 종로 끝자락인 동대문 근처였고, <아리랑>이나 <풍운아>같은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선풍을 일으킨 곳도 종로였다.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 한국영화의 성쇄를 이끌었던 극장들이 파란의 세월을 지켜온 곳이 바로 종로였다. 지금도 종로는 영화관객들의 발길로 붐빈다.

흔히 ‘충무로’를 한국영화의 메카로 기억하지만 ‘만든다’는 쪽의 무게 중심을 ‘유통’과 ‘관객’ 쪽으로 옮겨서 보면 오히려 종로가 유서깊은 한국영화의 고향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종로 3가 전철역을 사이에 두고 몰려 있는 극장들에는 요즘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서울극장이 멀티플렉스 극장의 상징처럼 흥행을 하고 있는 한편에서는 옛날 극장들이 변신을 서두르고 있는 중이다. 60년대 영화계의 황금시절을 지켜본 피카디리극장이 신축을 위해 헐렸고, 마주보고 선 단성사 역시 오는 연말쯤 지금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지을 계획을 잡고 있다.

한국영화의 역사와 함께 걸어왔던 유서깊은 극장 국도극장이 지난 99년 연말에 비명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한 채 헐린데 이어 70mm 대형화면의 위용을 자랑했던 대한극장마저 문을 닫도록 한 변화의 바람이 종로통의 극장가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가 시장을 주도하고, 보다 쾌적한 시설을 원하는 관객들의 요구가 더하면서 ‘옛날’ 극장들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부분은 영화산업이 새롭게 각광받으면서 극장의 수요도 함께 늘어나고 있는 덕분에 옛날 극장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 위해 헌다는 점이다. ‘발전적인 파괴’라고나 해야 할지.

영화제작이나 유통이 결국은 개별 기업의 이윤추구를 위한 경제적 활동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한 어떤 극장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낡은 시설을 헐고 새로 지을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소유자의 권한이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역사와 함께 한 추억어린 극장마저 쉽게 사라지는 현상은 귀중한 자료를 파괴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어서 답답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개화기의 새로운 풍물-극장

우리나라에 극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9년 무렵이었다.

서강(西江)의 놀이패들이 아현(阿峴)에 무동연희장(舞童演戱場)을 설치하고 연희를 공연했다는 기사가 황성신문에 나타나는데, 극장의 설립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어 1900년경에 용산에서도 무동연희장이 설립되었는데 공연장 규모나 공연내용은 아현무동연희장과 유사했다. 이들 연희장은 고정된 장소에서 공연을 했다는 사실을 빼고는 특별한 설비를 갖추지 않은 가설무대의 수준이었다. 비라도 오면 공연은 마냥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발전된 규모와 설비를 갖춘 옥내극장이 등장하는 것은 1902년 협률사(協律社)가 설치되면서부터다. 협률사는 한국 최초의 옥내극장이며 무대와 계단식으로 된 3층 관람석, 준비실, 무대막 등을 갖추어 당시로서는 규모나 시설면에서 가장 뛰어난 극장이었다. 원래는 고종황제의 재위(在位)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예식(稱慶禮式) 행사장으로 마련되었다가 콜레라의 만연, 황실의 우환 등이 겹치면서 당초 계획이 취소되는 바람에 공연장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설립과 함께 기생 등을 모집해 공연단을 구성한 협률사는 1902년 12월 2일에 ‘소춘대 유희’(笑春臺 遊戱)라는 프로그램을 공연함으로써 일반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이로써 극장의 상업적 운영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대설비를 갖춘 실내극장이 생겼다는 것은 공연문화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공연양식은 가설무대 중심이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연형식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탈춤이나 판소리 같은 프로그램은 아무데서나 멍석이나 돗자리를 깔면 그것으로 공연준비가 끝난다. 그나마도 없으면 맨땅에 적당히 자리잡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판이 무르익고 흥이 나면 공연자가 구경꾼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구경꾼들이 장단을 맞추거나 덩실거리며 춤을 추기도 한다. 아무데서나 자리만 잡으면 그곳이 무대이고, 흥이 나면 공연자와 구경꾼의 경계도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근대식 극장은 고정 시설을 갖추고, 무대와 객석을 분리하며 야외와 실내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등장하는 것은 1903년부터였다.

한성전기회사가 1903년 6월경에 동대문 전차차고 겸 발전소 부지 안에 영화상영시설을 갖추고 영화를 상영함으로써 ‘동대문 활동사진소’라는 극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영화흥행장으로 나타난 동대문 활동사진소는 한국에서 전차설비를 시공하고 있던 미국인 콜브란(Henry Collbran-한국명 고불안(高佛安))이 동대문 부근에 있던 발전소 겸 전차차고 내의 시설 일부를 개조하여 만든 공연장이었다.

6월 하순부터 시작된 동대문활동사진소의 영화상영은 일요일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밤 8시부터 10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입장료는 10전씩을 받았다. 이때의 영화상영은 주로 한국인들이 관람했지만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들도 함께 관람을 했으며 이들에게는 자동차를 개조한 특별관람석이 제공되기도 했다. 영화상영은 1인당 10전씩이라는 비교적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매일 상영 때마다 1,100명 이상의 관객이 유료관람을 했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으며 입장수입이 1백 원이 넘었다. 당시 서울인구가 20만 명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1천 여 명의 관람객은 놀랄 만큼 많은 숫자였다.

콜브란은 당초부터 영화흥행에 손을 대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전차공사에 동원되었던 근로자들을 상대로 위안공연을 계획했던 것이었지만 이것이 의외의 인기를 얻게 되자 공연의 규모를 확대하며 상설화시켜 나갔다. 1903년부터 영화흥행을 시작한 것은 사업가로서의 감각이 발동한 대목인 셈이다. 의도야 어쨌든 한성전기회사의 영화상영은 큰 인기를 모았고, 이 일은 다른 사업자들에게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할 만큼 새롭고도 흥미있는 사업으로 부각되었다.

1904년 12월 경에는 일본활동사진회(日本活動寫眞會)가 소광통교(小廣通橋) 부근에 흥행장을 설치하고 영화를 상영했으며 프랑스인 마르탱(J. Martin-한국명 마전(馬田))도 새문(新門) 부근에 있던 양옥집을 개조해 극장으로 이용했다. 이어 절골(寺洞)에 일본인이 세웠다는 활동사진소를 비롯 붓골(筆洞)의 일본인 활동사진옥 등도 모습을 보였다. 극장이 새로운 투자사업으로 부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이다.

북촌과 남촌

요즘 극장들이 여러 개의 스크린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바뀌면서 영화관의 모습과 분위기를 혁신적으로 바꾸었던 것처럼, 1910년에 설립된 경성고등연예관은 당시 극장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인 와다나베(渡邊智賴)가 을지로에 세운 경성고등연예관은 모두가 놀랄 만한 고급시설을 갖추었다. 건물의 외관이나 내부 설비를 현대적으로 구비했고 영화상영을 전담하는 영사기사를 고정으로 배치했다.

이같은 시설을 갖춘 탓에 경성고등연예관의 입장료는 이전의 다른 극장들에 비해 큰 폭으로 인상되었는데 특등석은 1원을 받았다. 이 요금은 극장 입장료로서는 가장 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이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경성고등연예관의 영화상영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경성고등연예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관심거리가 되자 고종황제가 이들을 궁내로 초대해 정부관리와 황실 인사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주 와다나베에게 하사금을 주어 격려하기도 했다. 황제가 일반극장의 영사시설을 궁내로 불러들여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 주인에게 하사금까지 주었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경성고등연예관은 당시 서울에서 사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1회에 13-15편의 단편영화를 묶음으로 상영한 경성고등연예관은 평균 2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해 나갔으며 주로 프랑스 파테회사 작품을 상영했고 간간이 일본영화나 무용 등을 공연하기도 했다.

이어서 1912년에는 우미관이 새로운 극장으로 모습을 보였고 1918년 연말에는 단성사가 영화 전문극장으로 가세했다. 단성사는 1907년에 세워졌지만 주로 연극장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인 흥행사 박승필이 극장주 다무라(田村)로부터 운영권을 사들여 시설을 개수한 것이다. 한동안 우미관과 단성사가 한국인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관계를 유지했다. 이같은 양상은 1922년, 인사동 입구에 세운 조선극장이 새로운 개봉관으로 등장하면서 서울 시내의 흥행 판도는 일본인 관객 중심의 황금관, 한국인 관객을 겨냥한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이 서로 경합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이 사이에도 광무대나 대정관, 세계관, 유락관 같은 극장들이 있었지만 흥행을 주도할만한 위치에 있지는 못하였다.

1910-20년대의 서울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서울 토박이들이 주로 살고 있던 북쪽인 종로 일대를 북촌(北村), 일본인들이 새로운 거리를 이루기 시작하던 진고개(현재의 충무로 부근) 주변을 남촌(南村)이라고 불렀다. 이때는 극장도 한국인이 주로 다니던 북촌 극장과 일본인이 다니던 남촌 극장으로 나뉘었는데, 종로 쪽에 있던 우미관, 단성사 같은 극장들이 북촌 극장의 흥행을 이끌었고 을지로 쪽의 황금관, 대정관 같은 극장들이 남촌 극장의 중심으로 떠 올랐다. 남촌 극장과 북촌 극장들이 관객의 출입을 의도적으로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설명하는 변사들이 한국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로 나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북촌 극장에는 한국인 관객들이, 남촌 극장에는 일본인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 따라 극장도 함께 늘어났다. 1923년에 이르러서는 서울 시내에 7개소의 영화 전문극장이 생겨났으며 1926년 무렵에는 경기도의 10개소를 비롯 전국에 50개소의 영화 전문극장이 영업을 하고 있을 만큼 극장의 수는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영화의 대중화가 그만큼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무국 도서과(圖書課) 영화검열계(映畵檢閱係)에서 조사한 극장 및 관객현황 자료에 따르면 1926년 6월말 현재 50개 극장에 입장한 관객의 수는 110만 5,383명이며 지역별로는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 지역이 극장 수로는 20%, 관객수로는 약 5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2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흥행을 주도했던 극장들은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변화의 바람을 맞는다.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 황금관은 모두 극장 소유주와 임대자 간의 권리 다툼으로 분쟁에 휘말리거나 운영부진으로 인한 경영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미관은 일본의 메이저회사인 쇼지쿠(松竹)이나 도호(東寶)영화사의 배급라인에서 제외되면서 제대로 영화프로그램을 수급하지 못할 정도로 침체의 길을 걸었고 단성사 역시 운영을 맡고 있던 박승필이 새로운 사업(극단 신무대 창단?)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경영의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단성사 역시 새롭게 형성된 배급라인에서 배제되면서 군소 극장 중의 하나로 몰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몇 차례 주인이 바뀌던 단성사는 1939년, 마침내 ‘대륙극장’이란 이름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몰락의 처절한 상징이었다. 종로통에서 그런대로 자리를 지키던 조선극장은 1936년 6월 11일, 관람객의 방화로 인한 화재로 불타버리면서 영영 사라졌다. 1930년 후반의 극장은 명치좌와 약초극장, 연극 중심의 동양극장이 이끌면서 한국영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종로통 극장들의 명성도 함께 퇴색했다.

단성사 - 한국영화의 역사

단성사는 한국영화 역사에서 특별한 존재다. 설립 시기로도 오래 되었지만 그곳에서 상영한 영화들의 면면은 곧 한국영화의 흥망과 궤를 같이 할 정도로 파란 많은 사연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흥행사 박승필이 운영권을 인수해 영화 전문극장으로 모습을 바꾼 1918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의 기간은 일본인들이 주도하던 영화 흥행시장에서 한국영화의 자존심과 의지를 지켜낸 시기이기도 했다.

단성사가 서울의 종로통 현재 위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7년. 연흥사, 장안사 등과 더불어 서울에 새로 생긴 신식 극장들 중의 하나였지만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시설은 아니었다. 이것이 영화 흥행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한국영화의 성장을 알리는 상징으로 떠오른 것은 초기 영화계에서 영화제작과 흥행에서 개척자적인 역할을 한 박승필(1875?-1932)이 경영권을 인수해 영화 전문상영관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1918년 말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단성사는 한국인 관객들이 즐겨 다니는 극장으로 사랑받았다.

단성사의 역사는 한국영화 역사나 다름없다. 한국영화 제작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던 연쇄극(연극 장면 중 영화 장면을 삽입한 공연형식)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를 처음 공연했고(1919. 10. 27) 한국영화의 전설이 된 나운규 원작 . 주연의 <아리랑>도 첫 상영(1926. 10. 1)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매년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 것은 <의리적 구토>의 첫 공연일을 근거로 삼고 있다. 한국영화의 무성영화 시대에 단성사는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말엽부터 해방 때까지 일제의 수탈이 심해지고, 첨단 시설을 앞세운 명치좌나 약초극장(또는 약초동보극장) 등이 등장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던 단성사는 1939년부터 해방 때까지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대신 ‘대륙극장’으로 간판을 달기도 했다. 단성사의 몰락은 그곳을 흥행 기반으로 삼고 있던 박승필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일본인들이 주도하던 흥행계에서 힘겹게 버티던 ‘조선인 자본’의 몰락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 다시 이름을 찾은 단성사는 영화흥행의 ‘종로시대’를 부활시키는 중심지 역할을 하며 영화팬들의 추억을 키웠다. 6.25 전쟁이 끝나고 한국영화가 부흥하는 것과 함께 퇴계로의 대한극장과 충무로 근방의 명보극장, 수도극장(스카라극장), 을지로의 국도극장, 종로의 세기극장, 피카디리극장이 ‘극장 벨트’를 형성하던 시절에도 단성사는 그 벨트의 출발점이었다. 새로 생기는 극장일수록 좋은 시설과 새로운 서비스를 내세우며 관객을 불러 모았지만 그래도 단성사가 굳건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세월이 지닌 연륜이 그만큼 묵직했고, 한국영화의 역사가 그곳에서 소용돌이쳤다는 관록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영화의 흥행 최고 기록을 세웠던 <겨울여자>(1977)나 <서편제>(1993)도 단성사의 영화목록을 화려하게 장식한 경우에 든다.
전성기의 단성사는 화려했다.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획을 그을 만한 일들이 단성사를 거쳐 나갔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나 한국인들만의 노력으로 완성한 <장화홍련전>(1924), 무성영화 시대의 전설을 그대로 지닌 <아리랑>의 상영은 그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일이었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는 단성사 사장 박승필이 제작비를 대고 신파극단 신극좌를 이끌고 있던 김도산이 배우들을 동원하여 만든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만든 연쇄극이었다. 그러나 박승필은 이 작품을 ‘최초의 활동사진’ 즉 처음 만든 영화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관객들도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김도산이 주연과 연출을 겸한 이 작품은 의협심 강한 청년이 집안의 재산을 차지하고 형제들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계모의 간악한 흉계를 물리치고 행복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 활극 조의 멜로드라마. 내용이야 틀에 박힌 신파극의 한가닥이었지만 한국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영화장면이 등장한다는 것은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한국 선수들이 메달을 딴 것만큼이나 흥분거리였다. 당시 매일신보(1919. 10. 29)가 전하는 공연분위기를 보면 그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신파 신극좌 김도산 일행이 경성에서 촬영한 신파 활동사진이 조선에 처음으로 지나간 27일부터 단성사 무대에 상장된다고 하자 초저녁부터 조수같이 밀려든 관객 남녀는 삽시간에 아래 위층을 물론하고 빽빽히 차서 만원의 패를 달고 표까지 팔지 못하는 대성황이었더라. 그런데 제일 번화한 것은 각 권번에서 기생온 것이 무려 2백명이나 되어 더욱 이채를 내였더라. 영사된 것이 시작하는데 우선 실사로 남대문에서 경성 전시의 모양을 비추자 관객은 노상 갈채에 박수가 야단이었고 그 뒤는 정말 신파사진과 배우의 실연 등이 있어서 처음보는 조선 활동사진이므로 모두 취한 듯이 흥미있게 보아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더라.

이만한 성공을 경험하고도 덤덤하게 넘길 제작자가 어디 있을까. 박승필은 자신의 계획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에 쾌재를 부르며 연쇄극 제작에 더욱 힘을 쏟았다. 신극좌와 연쇄극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임성구가 이끌고 있는 혁신단과도 손잡고 연쇄극을 제작했다. <학생절의(學生節義)>나 <보은(報恩)> 등에 이르러서는 연극 장면을 줄이고 영화 장면의 비중을 더욱 높임으로써 연쇄극은 영화의 모습에 근접해 나갔다. 박승필로서는 영화제작의 자신감을 얻는 바탕이었다. 영화제작의 가능성을 검증한 그는 단성사 안에 촬영부(撮影部)를 설치하고 영화제작을 본격화함으로써 초창기 한국영화계의 제작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게 된다. 단성사 촬영부가 만든 첫 작품은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1924). 제작과 연기 등 모든 부문을 한국인만의 작업으로 완성했다. 당시 조선극장(朝鮮劇場)을 운영하고 있던 일본인 하야가와(早川孤舟)가 고대소설 ‘춘향전’을 각색한 <춘향전>을 만든 것도 큰 자극이었다. 일본인이 우리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자괴감도 큰 자극이었다.

단성사가 단순한 극장의 수준을 넘어 역사적 공간으로 부각하는 것은 1926년 <아리랑>을 상영하면서부터. 10월 1일부터 상영을 시작한 <아리랑>은 서울을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사는 광인 청년 영진이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부잣집 집사 오기호를 처단하는 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돈을 앞세워 마을 사람들을 숨죽이게 만드는 부자, 그의 권세를 믿고 마을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집사, 그리고 그들에게 시달리는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일제 식민지 통치에 시달리는 조선 민중들의 처지와 어딘가 닮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에 저항이라도 하듯이 미친 청년 영진이 부잣집 집사를 응징하는 장면에서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후련함을 느꼈고, 일본 순사의 포승에 묶여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에서는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절절하게 느껴야 했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생생한 경험이었다. <아리랑>은 관객과 함께 시대를 공유하는 영화로 떠올랐고 주연을 맡은 나운규는 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아리랑>은 이전의 영화가 경험하지 못했던 선풍과 화제를 일으켰고, 단성사는 그 흥분을 공유하고 확인하는 세례의 장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아리랑>의 충격파는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영화를 제작한 영화사는 요도 도라조(淀虎藏)라는 일본인이 설립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었고 영화를 감독한 인물은 쓰모리 히데이치(津守秀一)라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계에서는 <아리랑>의 감독이 누구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록 중에서는 어디에도 나운규가 이 영화를 감독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경우를 찾기 어렵다.

일본인이 제작하고 일본인이 감독한 영화에서, 당시의 관객들이 시대의 암울함과 그것을 거침없이 두들기는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시대의 모순이 절묘하게 엉겨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태생적 혈통의 진실이 무엇이었건 간에 <아리랑>은 영화가 동시대의 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것에 반응하는 관객의 엄청난 열광을 확인하며 무성영화시대를 찬란하게 빛냈다. 단성사는 당당하게 한국영화의 중심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 번영과 몰락이 교차하는 영화계에서 영원한 승자란 존재하기 어려운 법.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단성사는 몰락의 과정에 접어든다. 단성사를 영화흥행의 중심에 세워 놓았던 명제작자 박승필은 나운규가 제작하는 영화에 돈을 대고 ‘신무대(新舞臺)’라는 신극단을 만들어 흥행을 시도하는 등 연극과 영화에서 주도권을 지키려 했지만 뜻과는 달리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운규가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서 벗어나 ‘나운규 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를 세우고 제작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박승필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나운규가 만든 영화들은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만신창이가 되거나 나운규의 과욕으로 인해 흥행에 실패하는 경우가 잦았다. ‘신무대’의 공연도 기대에 어긋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박승필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졌다. 결국 박승필은 1932년 1월 4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난 단성사는 선장을 잃은 범선이나 다름없었다.

오랫동안 단성사의 지배인이자 사원의 대표격인 박정현이 뒤를 이어 정상화를 모색했으나 이미 기울기 시작한 현실을 막기에는 숨만 찰 뿐이었다. 명치좌(明治座)나 약초극장(若草劇場)처럼 새로운 설비와 서비스를 갖춘 새 극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들어오는 영화들은 토키(발성) 제작이 일반화된 추세여서 극장들은 괜찮은 영화를 상영하려면 토키 설비를 갖추어야 했다. 시설을 그대로 둔 채 음향설비만 바꾼다는 것은 허름한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얼굴에 물칠만 하는 격이었다. 배급회사들 또한 설비가 부족한 극장에 좋은 영화를 공급할 이유가 없었다. 단성사는 이래저래 흥행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단성사는 새로운 각오로 건물을 새로 짓기로 작정하고 1934년 5월 11일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5개월 일정으로 9월 말에 재개관하기로 했던 일정은 예정보다 길어져 같은 해 12월에 들어서야 겨우 흥행을 재개했다. 그러나 한 번 기울기 시작한 사세는 쉽게 되돌아서지 않았다. 영화 대신 연극 공연을 하는 등으로 2-3년을 겨우 버티던 단성사는 결국 쌓이는 적자를 견디다 못해 1937년 하반기에 들어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가 직원들 대부분을 해고하는 사태와 직면했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나 다름없었다. 그후 단성사의 소유권은 여러 사람을 거치며 파란을 겪다가 1939년 2월에 이르러 명치좌의 소유주인 이시바시(石橋)에게로 넘어갔고 1939년 7월, 마침내 ‘단성사’라는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 박승필의 뒤를 이어 극장을 운영했던 박정현도 병석에 들더니 결국 그해 8월 22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단성사가 간판을 내리던 무렵의 영화계는 일제 식민지 통치의 압박이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였다. 만주를 침략하고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전시 비상체제로 돌입했고 사회 각 분야는 전쟁 수행을 위한 후방기지 역할을 해야 했다. 영화는 전쟁 수행을 독려하기 위한 선전의 수단으로만 허용될 뿐이었고 그것을 제외한 일체의 역할은 유보되거나 금지되었다. 한국영화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로 빠져들었다. 단성사의 몰락은 한국영화의 암울한 자화상이나 다름없었다.

일제시대의 암울함은 그렇게 단성사와 한국영화를 짓눌렀다.

단성사 극장이 활기를 되찾은 것은 6.25 전쟁이 끝나고 한국영화가 새롭게 부흥하는 것과 함께다. 1945년 일제 식민지 통치의 종식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고 영화계는 <자유만세>, <해방된 내고향>, <윤봉길 의사>, <삼일혁명기> 같은 영화들을 통해 그 감격을 담았다. 하지만 그 감격은 남북의 분단과 이념의 대립이라는 또 다른 비극 앞에서 숨을 멈추어야 했다. 가난이 사라지지 않은 현실에서 살벌하게 예각을 세우는 이념 갈등은 영화계를 구호 속에 묻어 버렸다. 수입되는 영화도 별로 없었고 제작되는 영화는 더 빈약한 현실에서 극장은 영화 흥행보다는 악극단의 공연무대로 이용되거나 머리띠를 두르고 피켓을 흔드는 궐기대회의 행사장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해방과 함께 ‘단성사’라는 이름을 되찾았지만 온전하게 꿈과 희망을 나누는 영화공간으로 되돌아가기는 어려웠다. 그 사정은 단성사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지나야 하는 극장들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서울의 극장들이 호황을 맞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이 끝나고 2-3년이 지나면서부터. 가뜩이나 빈약한 영화계 살림은 전쟁을 거치는 동안 더욱 형편없이 산산조각이 났지만 전쟁에 상처받은 마음들은 어딘가 기댈 언덕을 찾고 있었다. 영화는 그런 시대와 사람들을 위로하며 꿈같은 희망을 보여주는 창문이었고 극장은 잠시의 위안이나마 찾을 수 있는 배급소였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이나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같은 영화들이 이끈 50년대의 부흥은 널리 퍼져나갔고, 1957-8년 무렵에는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연간 100편을 넘어설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이어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연산군>같은 영화들이 선풍을 일으키며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에서 수입된 영화들도 관객들의 눈길을 잡았다.

서울의 극장가는 새 영화를 상영하는 개봉관과 한 물을 뺀 영화들을 이어서 상영하는 변두리 재개봉관, 개봉관 입장료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관객들이 하루종일 버티며 두 편짜리 영화를 번갈아 볼 수 있는 동시상영관(3번관)으로 서로의 위치를 정하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서울의 개봉관은 종로 3가의 단성사와 맞은 편의 피카디리를 한 쪽 끝으로 하고 퇴계로의 대한극장이 또 다른 끝을 이루며 남북을 연결하는 ‘극장 벨트’로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에 스카라, 명보, 국도, 세기극장이 있었고 국제극장, 아카데미극장, 파라마운트, 을지극장, 중앙극장 등이 광화문과 을지로, 명동 주변에 포진했다.

단성사는 어쨌든 개봉관 중의 하나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어느 극장에도 뒤지지 않는 역사와 관록이 한 몫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흥행이 호황을 누리고 새로운 설비를 갖춘 극장이 하나둘 늘어가는 상황에서는 관록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되지는 못했다. ‘70mm 대형화면’이니 ‘6본 트랙 음향’이니 하며 새로운 설비를 자랑하는 극장들이 생기고, 하다못해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이라도 내세우는 극장이 늘어날수록 오래된 극장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밀리기 마련. 단성사는 개봉관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기는 했지만 전성기 때의 명성과 비교하면 어딘가 허전한 모습이었다.

<벤허>나 <아라비아의 로렌>처럼 스케일이 큰 스펙타클 영화는 대한극장이 보란 듯이 과시하고 한국영화는 국도나 명보 같은 극장들이 전문으로 삼고, <007 위기일발>이나 <007 살인번호>같은 화제작들은 마주보고 있는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단성사의 위상은 조금씩 줄어드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겨울여자>(1977)나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같은 영화들이 차례로 한국영화 신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하면서 단성사의 위상은 새삼스럽게 영화계의 관심을 모았다. 김호선 감독, 장미희, 신성일 주연의 <겨울여자>는 70년대 유신시절의 암울한 정서를 영화로 그려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기록인 67만 관객을 불러모았고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젊은 김두한’ 이야기 <장군의 아들>은 누구도 쉽게 깨지 못할 것이라는 <겨울여자>의 기록을 넘어 68만 여 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국민영화’로까지 불린 <서편제>는 <장군의 아들> 제작팀에 의해 스스로 기록을 바꿔버린 놀라운 이벤트였다. 한국영화로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라는 ‘100만 관객’의 장벽을 넘은 대기록의 주인공이 된 것이어서 영화계의 흥분과 설레임은 긴 여운을 남겼다. 영화 흥행에는 묘한 징크스 같은 것이 있어서 손님이 드는 극장은 어떤 영화를 붙여도 손님이 든다고 믿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손님이 안 드는 극장은 어떤 영화를 붙여도 흥행이 시원치 않다는 낯가림이 심하다.

요즘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일반화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여러 개의 극장에서 동시에 영화를 상영하는 일이 당연한 것으로 통하지만 특정한 영화를 독점으로 상영하며 흥행을 하던 시절에는 어느 극장을 개봉관으로 잡는가는 민감한 사항이었다. 흥행사들 사이에서 이른바 ‘손님빨’로 통하는 ‘아시바’가 좋은 극장과 그렇지 않은 극장의 위세는 예민하게 갈린다.

그런 시절에 한국영화 신기록이 잇따라 단성사에서 터져 나온 것은 영화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 사이에도 <어우동>, <무릎과 무릎사이>처럼 최고기록은 아니더라도 3루타는 될 만한 영화들이 받쳐 주었다. 외국영화로는 <007 죽느냐 사느냐>, <다이하드>같은 것들이 분위기를 띄웠다.

1988년 이후 미국영화의 직배가 시작될 때 20세기 폭스나 워너 브러더스 영화사처럼 미국의 메이저 중의 중요 멤버이면서 UIP(유니버설, 파라마운트, MGM)배급망과는 별도로 배급망을 찾던 영화사들의 배급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던 단성사였고 그 덕분에 한때는 반짝 흥행을 누리기도 했지만 더 좋은 시설, 더 좋은 서비스를 따라 발길을 돌리는 관객을 붙잡아 두기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지경에 직면하고 말았다.

단성사가 지나온 과정을 보면 한국영화사의 변천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개화기의 풍물에서부터 일제의 강점기에 겪었던 파란의 세월과 사연,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해방공간의 이념적 혼란과 갈등, 전쟁이 끝난 후 가난과 절망에 지친 사람들에게 간절한 희망처럼 다가선 영화들, 외국영화의 공세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며 아주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도 오뚜기처럼 일어나 새로운 디딤돌을 만들어온 한국영화,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다가오는 변화의 물결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변해야 하는 현실까지 모든 것이 한국영화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다.

뒤에서 오는 물결이 앞의 물결을 밀어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지난날의 기억과 역사까지도 허물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허전하다. 단성사마저 모습을 바꿔버리면 지난날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그래도 아직까지 종로가 영화 흥행의 중심지로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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