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벨 바그의 배경
스탠리 카우프만은 프랑스 누벨 바그의 근원을 "파리"라는 장소에서 찾으려 했다. 예술가들의 새로운 예술에 대한 대담성의 전통을 150년간 지니고 있었고, 젊은 영화광들에게 과거의 명작들을 보여줌으로써 체계화된 영화사를 제공했던 시네마떼끄가 있었으며, 순수 영화적인 이론이나 미학적 기준을 형성하고 다듬고 고수했던<까이에 뒤 시네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프랑스 특유의 영화적 전통의 바탕위에 전후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인식이 첨가되면서 누벨 바그가 탄생할 수 있었던 필연적 요소를 집약시킨 표현으로 이러한 환경을 통해 자라난 세대가 곧 전후 프랑스 영화 세대였다
50년대 말 프랑스의 영화 제작들은 TV 앞에 모여 있는 관객들은 영화관으로 불러들이는데, 끌로드 오땅 라라(Claude
Autant Lala)의 영화처럼 많은 돈을 들이는 영화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생각들 두가지 요소가 더 자극했는데, 그 하나는 지원법(loi d'aide)이다. 이것은 죽어가는 영화 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1948년에 채택된 우수 영화 선정 제도인데, 1955년과 1959년에 개정 되었다. 이 법안은 실제로 용기있는 영화 제작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프랑소와 트뤼프의 단편<개구장이_1958>는 500만 프랑의 제작비를 들여 450만 프랑의 프랑의 상금을 받았으며, 끌로드 샤브롤의<아름다운 세르쥬_1958>는 4,600만 프랑 제작비가 들어 3,500만의 프랑의 상금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제작자들이 10대 관객을 확보하기 위해 젊은 감독들을 기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젊은이들은 그들 부모 세대와 반대되는 비상투적인 새로운 영화를 원했다. 이들이 품고 있던 불만은 사춘기와 연관되기도 하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지속적이며 치열한 사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니콜라스 레이의<이유 없는 반항>이나 엘리아
카잔의<에덴의 동쪽>이 1955년 미국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 젊은 감독들은 이런 청교도주의 와 방종 간의 갈등에는 별 흥미가 없었고 그들 나름대로 대중을 이끌려고 했다.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의 <밀회_1955>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 주었는데, 루이 마르꼴 레이는 "프랑소와 사강보다 2년 전에 아스트뤽은 부패가 심하고 견고한 기반을 상실한 세계의 공허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젊은이들의 깊은 좌절로 인해 비애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라고 했다. 게다가 프랑스의 젊은 감독들은 불만에 찬 사춘기의 소년보다는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에 더 이끌렸다. 미국의 젊은 관객이 제임스 딘이나 마릴린 먼로 같이 자기 연민적이고 다소 상처입은 것 같은 배우들을 요구했던 반면 프랑스의 젊은 관객들은 브리짓드 바르도를 요구 했다.로제 바딤<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_1956>에서는 그녀는 괴로운 경험 속에서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프리 섹스의 개념을 실현했다.
누베바그는 20년대 독일 표현주의나 2차 대전 후 네오 리얼리즘처럼 응빕력있는 영화 운동으로 시작된것은 아니었지만 1954년 1월 <까이에 뒤 시네마>지 31호에 프랑소와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이 도화선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는 먼저 당시의 프랑스 영화가 깐느나 베니스의 입상을 목적으로 한 '질의 전통(tradition de la qualite)' 에 기대어 심하게 병들어 있음을 지적했다. '질의 전통'은 유행처럼 저명한 소설가의 자품들을 영화화하던 경향을 말한다. 이처럼 소설의 각색화로 인한 영화의 제작으로 인해 당시의 감독은 다만 각본화된 시나리오나 촬영대본을 충실히 필름으로 옮기는 기술인, 직업적 고용인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화에서의 감독의 위치를 재정립하기 우해 '작가 주의(politique des auteurs)' 을 대두시킨다. 이로서 영화 작가(auteur)는 촬영 중에 자신의 개성이나 정신 상태를 반영
하는 감독으로 활실한 위치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경량의 16mm 동시녹음 카메라와 동시 녹음 장비인 나그라의
개발은 영화의 개인화 일반화에 크게 기여하여 영화의 주인으로서 감독 위치를 확고하게 했다.
2. 누벨 바그의 경향
프랑스어인 '누벨 바그'는 1950년대 후반 좌파적 성향의 주간지<렉스플레스(L'express)>의 편집장 프랑소와 지루가 새롭게 떠오르는 청년 계급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엇다 통상적인 관례인 기성 감독 밑에서 수업을 마치지 않은 까이에 그룹의 평론가 출신들(프랑소와 트뤼포,끌로드 샤블롤, 장 뤽 고다르 등)이 대거 영화 현장으로 진출하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이른바 '청년 영화' 의 신화가 시작된것이다.
누벨 바그의 기초가 도는 것은 샤르트르와 까뮈의 실존주의 철학인데, 특히 까뮈의 <이방인>은 누벨 바그의 경향과 접근 방식의 원형인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들은 논리도 정의도 질서도 없는 세계 속에서 동기도 불확실하고 방황하는
듯한 행동을 한다. 누벨 바그의 영화 역시 잘 짜여진 각본이라기 보다는 무계획성, 자의성 등이 그 특징이다. 엄격한 서술의 제한으로부터의 자유로운은 시간적 순서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감정의 지시에 따른 시간과 공간 구성에 가능케 한다.
이들은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장려하고 야외 촬영의 잇점을 이용하고 스투디오 안에서 작업에 따르는 제약조건으로 부터 자유로운 작업을위해 새롭고 가벼운 장비를 사용했다. 미학적으로 누벨 바그는 영상의 새로운 형식, 매우 유연한
영화 문법-몽타쥬,촬영기의 움직임.새로운 연기 지도 등의-을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누벨 바그의 전형적인 빠른 몽타쥬는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키고 전통적인 영화에서 평행적이거나 대위법적인 몽타주보다는 훨씬 큰 진실성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줌(zoom),스톱 모션, 긴 패닝,시각적인 화면 재구성등은 당시 획기적이고 새로운 영화 문법이었다.
누벨 바그 영화인들에게 있어서 영화는 현실처럼 리얼하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훌륭한 어떤 것이라 명제에 충실하다. 누벨 바그 영화 속에 나타나는 것처럼 영화는 인샌을 모방하는 옛술이라기 보다는 예술 자체를 모방하는 예술이었다.
파스칼 보니체는 이렇게 쓰고 있다. "누벨 바그는 민첩한 촬영기의 이용에 의해 영화를 거리로 나가게 한 면과 프랑스 영화 제작소의 낡은 미학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어떤 반항이라는 면에 있어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 반항은 영화의 혁명에 이르지 못했으며 진보적 프랑스 영화에 토대를 제공하지도 못했다. 주제에 있어서도 기존의 영화와 근복 적으로 다른것이 아니었고 당대의 절박한 사회적 무제들을 회피학 있었던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 대표적인 감독과 작품들
1) 프랑소와 트뤼포
초기 트뤼포 영화들은 영화의 기술적인 면과 인간과의 관계를 자유라는 주요한 예술적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다루었다. 주인공들은 반항자로서 외로워하며 관습적인 사회 규범을 답답하게 느꺄 주위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400번의 구타_1959>의 주인공 앙뜨완느는 위선적이고 냉담한 어른들에 의해 감옥과 감은 학교로, 학교와 같은 감옥으로 다녀야 했다. <피이니스트 쏴라_1960>의 주인공 샤를르 꼬레는 연주회자의 피아니스트가 누릴 수 있는 명성과 행운을
일부러 버리고 작은 술집에서 일한다. 그에게는 그곳이 더 자유롭다.<쥘과짐_1961)에서 까뜨린느는 아내 ,주부, 어머니라는 모든 사회 규정에 대해 매우 불편해 한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자살 한다. 트뤼포의 초기 작품은 시작적 변천의 추이나 감정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과감히 생략했다. 그의 이런한 생략법은 논리적으로 구성된 영화에 부족한 강렬함.
자연스러움, 경쾌함을 부여한다.
또한 그는 스톱 모션이나 슬로우 모션 등의 영화적 형식들을 혼합하기를 좋아했다.<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부분에서 감화원을 빠져나와 바다로 뛰어가는 앙뜨완느의 길고 주관적인 트래킹 쇼트 뒤에 소년의 앞을 응시하는 스톱 모션은 소년의 앞에 놓여 있는 불확실한 미래를 의미하는 듯하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는 대담하게 불숙 한 장면을 삽입시킨다. 주인공은 "나의 어머니는 급사할 것이다"라고 저주한다. 그 다음에 난로 옆에 있는 늙은 부인이 갑자기 가슴을 부여 잡고 바닥으로 뒹구는 장면이 삽입된다. 그는 거기에 어떠한 해석도 주지 않은채 이야기로 다시 들어간다.
트뤼포의 초기 흑백 영화와 그 후 10년간으 컬러 영화는 다른 성격을 뛰고 있다. 트뤼포으 컬러 영화는 그가 흑백 영화에서 보여 준 비관적의를 파기하고 인간과 사회 전체, 개이적인 정서와 예술적인 소명 사이의 종합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의 후기 영화의 주제는 교육과 예술에 관한 것이다. 이 두 주제는 그의 초기 영화로부처 시작되었는데, 그의 후기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2) 장뤽 고다르
트뤼포의 영화가 주제와 기술적인 면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고다르의 영화는 변화가 많고 혼합적이며 다양한 사상과 영화적 법칙을 혼합하는데 있어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수 있다.
그는 인간의 경험을 논리적이고 불가해한 것으로 본다. <비브르 사비_1962>에서의 갑작스럽고 우연한 죽음,<네 멋대로 해라>에서의 우법을 사용하기도 했느데,브레히트의 전제는 예술과 인간의 문제는 엄격히 논리적인 것이라고 분리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대부분의 영화는 바로 이런 브레히트 거리두기, 소외의 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네 멋데로 해라>의 점프 컷과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남성,여성_1966>에서으 대안적 사운드 사용등의 그 예이다.
한편으로 그는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우화를 즐긴다. 반면 구체적인 사실과 인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즐기기도 한다 <비브르 사 비>의 매춘부, <중국 여인_1968>에서 모택동 사상에 심취한 학생들의 연설,<1+1_1969>에서의 급진적 정치와 민주적 정치에 대한 토론 등이 그것이다.
고다르의 영화적 경향은 1968년5월 혁명이후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변화한다. 그는 어떤 예술 작품이나 영화도 어떻게, 왜 만드는 것인가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것을 만드 수 없다는 것을 점차로 깨닫기 시작 했다. 고다르의 영화에 중요한 영향을 준것은 제 3세계의 영화들이었다. 이 영화들은 파리 혁명 후 처음 유러에 나타났는데, 적극적인 정치적 행휘를 옹호하고 단결된 노동자 계층의 관충에게 정열적으로 접근하는 이들 영화는 유럽 지식인이었던 고다르에게 충격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