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 영화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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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시네마 노브<Cinema Novo>

venezia70
2004년 02월 20일 17시 17분 40초 753440
1. 시네마 노보의 배경

1950년대 초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1930년대 신국가 체제를 주창하던 바르가스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하여, 민주화가 진행되고 정치 및 문화 활동이 신장 되기 시작 한다. 이에 1952년과 53년 각각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파울로에서 브라질 영화인들은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영화를 논의 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하는데, 이 회의에는 알레스 비아니, 로돌프 라니, 도스 산토스 등이 참석 했다.

그러나 1954년 바르가스의 갑작스런 자살로 인해 쿠비체크가 정권을 잡게 되는데, 쿠비체크는 전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개발 중심의 국가 주의"를 주창했다. 하지만 이 이데올로기는 사회 정치적 통제를 내포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서 중산 계급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정치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예술을 브라질 사회의 변혁을 위한 도구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국가가 당면한 문제에 토론이 모든 집단의 논의 관제였는데, 1955년 시네마 노보의 씨앗이라고 불리는 도스 산토스의<리우 40도>가 만들어진다. 산토스는 이 영화로 브라질 영화계에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기법을 소개 했는데, 세계 최대 규모의 마라카나 축구장과 빈민가의 풍경, 관광객이 바라보는 리우시 중심가와 그 이면에 자리 잡은 빈민촌 등 이 영화의 주인공은 지금까지 브라질 영화에는 등장한 적이 없었던 "브라질 민중의 삶" 이었다. 이후 산토스를 위시한 글로베르 로사, 뤼 게라 등에 의해 협의체가 형성되었으며, 시네마 노보라 불린 영화를 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64년 3월 군사 쿠테타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검열을 강화하는 등 강압적인 사회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시기 시네마 노보 그룹은 다가 올 쿠테타를 예견하지 못한 지식인, 개혁의 과정에 힘을 실어주지 못한 중산층의 이기심과 근시안에 대한 방성으로 인해 그들의 관심사를 지방에서 도시로, 부랑하는 농민이나 도시 빈민에서 중산층을 다루게 된다. 1968년에 이르러 군부 독재가 더욱 강화되고 브라질 국민 전체가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으며, 고문이 일상화 되었다. 따라서 영화인은 자신의 의견을 곧바로 표현할 수 없게 되었고 점점 그 응집력을 잃어 가게 되었다.

2. 시네마 노보의 경향

시네마 노보는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도스 산토스의 <리우 40도>의 경우처럼, 물론 픽션이고 가공된 이야기였지만 독립 제작, 비전문 배우의 기용, 스튜디오가 아닌 실제 현장에서의 촬영 등 일상의 생활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뒤 1960년데에 이 운동은 보다 급진적이었고 영화 협력체가 만들어져 가난, 굶주림 ,폭력의 현대 브라질에 어울리는 혁신적인 미학을 추구했다. 이 운동의 영화인들은 인민주의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인민주의적이었던 것은 이 영화들이 역사와 신화,그리고 민속 문화와 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혁명적이었던 것은 공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소작인들의 권리를 웅호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인민주의 적 웅호가 대부분의 브라질 국민들이 처한 가혹한 현실 조건에 대해에 아무것도 해 줄수 없는 무력한 것이라는 것을 이 영화들이 명백히 밝혔기 때문이다.

글라우베르 로샤는 1965년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 공동체 속의 제 3의세계"라는 심포지움에서 '굶주림의 미학'이라는 말로 브라질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다른 국가에서의 작업과 어떤 차별성을 갖는 지를 설명했다. 빈곤의 상황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처참한 삶의 현장 앞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살펴보는 듯 멈추며, 마음보다는 머리로, 감성보다는 이성으로 관조하듯이 움직인다. 이렇듯 새로운 미학과 한 대의 카메라를 들고 굶주림의 한가운데에서 일하는 것이 바로"시네마 노보의 정신"이었다.

3. 대표적인 감독과 작품들

1) 글라우베르 로샤

로샤는 러시아의 에이젠슈탕인의 작품과 이론 그리고 표현 방식에 영향을 받은 서사적인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그의 영화는 질적으로 강하고 폭발적인 영향을 일으켰고 따라서 브라질 영화는 그의 작품 이후 변화게 되었다.<검은 신 한얀 악마_1964>는 브라질 밖으로 가장 널리 배급된 영화인데, 모두 브라질 북동부의 불모지대를 배경으로 산적 집단에 관한 신화의 근원과 극단적인 가난에서 생겨난 신비스러운 종교를 탐구한다. 특히<검은 신 하얀 악마>는 극렬한 민족주의와 양식화된 의식의 결합,폭력과 광란의 표현으로 인해 혼란 스런 인상을 주며 우리들 대부분의 문화적 경험에는 완전히 낯선 일종의 야만적인 환각으로 화면을 밝힌다.

<죽음의 안토니오>를 개봉한 후 로샤는 억압적인 정치 상황으로 인해 브라질을 떠나야 했고 1970년대를 외국에서 보냈다. 1976년 귀국한 후 그의 마지막 극영화인<지구의 나이_1980>를 남기고 1981년(벨리가 태어난 해인데....ㅜ.ㅜ)갑작스레 죽었다. 그는 갖앙 논쟁적인 시네마 노보의 대변자이자 걸출한 이론가요 실천가로 기억되는 영화 감독이다.

2)도스 산토스

산토스는 1955년 시네마 노보의 효시로 불리우는 <리우40도>로 브라질 영화계에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을 소개하면서 데뷔했는데, 시네마 노보의 많은 감독들 중 누구도 그의 풍부한 다작-총14편-을 흉내 낼 수는 없었다.

그의 1963년작 <황폐한 삶>은 시네마 노보의 여러 걸작중에서도 손곱히는 수작으로 브라질 북동부를 배경으로 한 가난한 시골 농민 가족이야기를 달고 있다. 이 영화는 농지 개혁 문제에 대한 국가적인 논의가 한창 제기되던 때 제작 되었는데, 산토스는 심각한 농촌 현실과 문제를 거론하기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에게 영화란 사회를 변화실킬 수 있는 꿈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사랑을 향한 굶주림_1968>을 만들 즈음 산토스는 초기 언더 그라운드 영화 운동 뿐아니라 두번째 시기를 맞는 시네바 노보 운동에 대한 고뇌에 찬 자기 반성을 갖게 되고, 197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민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여<오굼의 부적_1974><기적의 천막_1977><길 위의 인생_1980>등을 만들었다

3) 루이 구에라

구에라는 1960년 유럽으로 가서 1952-54년 사이에 파리 이덱(IDHEC)에서 영화를 공부한 유학파이다.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시네마 노보의 주역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총_1963>을 완성한 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였다.

<총>은 브라질 동북부 지방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의 보호와 부자들의 식량 창고을 지키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고,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과 군인들이 겪는 갈등에 관한 내용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농부와 파견된 군인들 간의 정치, 경제적인 갈등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군대 내부의 갈등이다. 군대는 농부와 지방의 세결 사이에서 억압적인 중재자 역할을 하는데, 결국에는 그들이 대립을 격화시키고 만다. 이 영화는 그 형식에 있어서도 분절적이다. 가뭄과 빈곤의 농촌 풍경은 농부의 숙명론과 수동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반면에 군은 동적이고 복잡한 현대 사회를 대표하고 있다.

그는 1967년 다시 유럽으로 <달콤한 사냥꾼>을 만들었고, 1975년 모잠비크 독립을 축하하기 이해 고향에 들른후 <가을_1975>로 다시 한번 은곰상을 받았다.79년 모잠비크 최초의 극영화이며 모잠비크 해방을 다룬<학살에 관한 기억>을 만들었다.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극작가와 작사가, 배우도 겸해 베르너 헤오조크 감독의 <아귀레, 신의 분노>에 출연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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