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월간 KINO의 Internet Site인 Cy.nema의 '김명준의 미디어 이야기'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현실의 기계적 모사와 그 변용: 디렉트 씨네마와 씨네마 베리떼의 변용을 중심으로 1995. 10. 26. 1.장르와 기법 가상의 현실을 재구성하지 않고, 언제나 가공되지 않은 현실 그 자체에 직면해야 하는 다큐멘 터리의 제작과정은 극영화의 제작과정에서는 전혀 문제될 이유가 없는 英ㅍ볜?? 고민을 낳게 마련이다.
도대체 연출의 개념은 무엇인가 ? 진행중인 현실적 과정에 대해 연출은 어느 정도까지 개입되는가 혹은 개입되어야 하는가 ? 어디까지가 연출이며 어디까지가 조작인가 ? 만들어진 작 품의 결과물은 작품의 소재가 된 대상의 삶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
다시 말하면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윤리적 문제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 시공간의 압축을 위해 막대한 현실적 제약 속에서 어떠한 미학적 방법론을 동원해야 하는가 ? 기법과 효과와 현실간의 갈등관계속에? 어떠 한 원칙이 견지되어야 하고, 어떠한 현실적 타협이 필요한가 ? 난제의 성격은 다양하지만, 작업자 의 입장에서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 공통적으로 직면하는 문제중 가장 미시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수준의 문제중 하나는 다큐멘터리의 고유한 미학적 성격, 보다 구체적으로는 양식(MODE), 기법 (TECHNIQUE)이다.
영화 100년사의 출발점이 초보적인 난픽션 필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현실 복제 능력을 기반으로 삼는 영화의 첫 번째 존재양식이었다. 또한 영화산업내에서 극된?? 지배 적인 지위를 점하는 상황에서, 다큐멘터리는 포괄적인 영상산업내에서 비(非)극영화 부문의 선두 주자로서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해왔으며, 때로는 극영화의 표현수단을 풍부하게 해주는 자양분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장르 내부에 관심을 집중해서 장르의 독자적 규정을 찾고자 했던 노력은 대부분 참담한 실패로 귀결되고는 했으며, 그 도전과 실패의 순환고리속에서 독특한 내적 모순이 존재함이 포착되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른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표현기법의 지배적인 지위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했으며, 극영화에 비해 훨씬 광범위한 양식상의 범주를 지니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이론적인 측면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작업자의 제작과정의 문 제해결과정에서 혼란을 가중시켜왔다. 그러한 점에서, 다큐멘터리 장르에 있어서 고전과 현대의 갈등, 이른바 현장에서 의식적으로 혹 은 무의식적으로 통용되는 원칙과 그 변용, 정서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늠하게 하는 미 시적 기법의 스펙트럼에 대한 고찰 등이 필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따라서, 이 시론적 성 격의 노트에서는 특정한 양식적 기조를 지니는 다큐멘터리가 미시적인 기법에 있어서 어떠한 관 습을 구축해왔으며 다양한 변인들의 영향아래 어떻게 변용되어왔는가를 디렉트 씨네마와 씨네마 베리떼 양식을 사례로 삼아서 검토해보기로 한다. 상이한 양식이 가장 구체적인 수준에서 어떠한 기법상의 차이를 지니고 (양식내부에서, 혹은 여타 양식과) 그리고 그러한 기법이 현실을 재현하 고자 하는 다큐멘터리의 전제(혹은 신화)에 비추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등을 해灼歐? 위한 출발점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2.전통의 구축과 관습의 형성 60년대를 풍미한 현실주의에 대한 착목은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디렉트 씨네마와 씨네마 베리떼 라는, 철학적으로 상이하지만 공통적인 기술적 토대와 기법을 지닌 운동의 형태로서 드러났다.
차이는 극명했으며 때로 그것은 현실적인 논쟁과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씨네마 베리떼는 제작 주체의 현실적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그러한 제작주쳄? 참여적 역할에 의해 일상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려한 반면, 디렉트 씨네마는 카메라의 존재를 가능한 한 숨기거나 혹은 대상에게 익숙한 존재로 변화시켜가면서 현존하는 사실의 핵심을 포착함으로서 관조적인 불간섭 을 제작방법론의 주기조로 삼았다. 그런 면에서, 양자는 전체구성상에서 [만榕沮測? 것을 보여 짐]과 [제작자의 투명성]이라는 상이한 명제를 전제로 삼았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양식은 휴대가능한 카메라와 녹음장비라는 기술적 토대에 유사한 특질들을 지니고 있었으 며 제한된 틀 속에서나마 공통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현존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픽션이 함축하는 연속성의 환상을 파괴하고 역으로 현실적인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점프 컷을 불사하고, 때로는 인터뷰도 회피했으며, 현실의 시공간을 모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시도가 낳은 관객에 대한 심리적 효과는 "마치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 며 그 결과 관객의 위캑? 가상의 목격자(Virtual Observer)로 전화되었다. 따라서, 이 양식은 [사건의 실제 기록(Actual recording of reality)]이라는 다큐멘터리의 기본 전 제와 가장 가까운 듯 보였고, 많은 관객들에게 있어서 가장 신뢰할만한 다큐멘터리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70년대를 경과하면서 이 양식의 기본 전제에 대한 비판과 의혹이 제기되고 다양한 형식적 실험이 진행되면서 이 양식의 운명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전체의 진로는 급격히 변화되었다. 그러한 변화는 한편으로는 양식 자체의 휴머니즘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로. 다른 한편으로는 TV라는 새로운 매체의 지위향상의 결과로 나타났다.
3.변용의 결과 총체적인 고민이 새로운 양식상의 모색으로 이어진 반면, 관객의 수용태도와 제직방식에 있어서 고유한 메커니즘을 내재하고 있던 네트워크 TV의 등장은 양식의 변용으로 이어졌다.
보다 구체 적으로, 전자는 상호작용과 자기성찰이라는 새로운 철隙? 태도의 형성으로 나아간 반면, 후자는 가상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 강화하면서 기법상의 부분적인 변화를 모색해갔다. 그러한 기법상의 변화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형태로 대별되며, 그 초점은 보다 빠른 리듬, 그리고 드라마 구조의 장면 구성에서 볼 수 있는 콘티뉴어티의 확보이다.
(1) 롱 테이크의 실종 영화 탄생 이래 다큐멘터리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롱 테이크는 70년대 이후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기차가 들어오는 광경을 시간의 Ъ憺봉? 유지하며 고스란 히 담아내던 다큐멘터리의 시원은 이미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대사를 전제로 하는 인터 뷰가 예외적으로 출몰할 뿐, 관객의 찰나적인 관심을 끌기 위해 뮤직 비디오와 광고의 거대한 공 격이 시작되면서 변화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이러한 단위 쇼트의 분절화 현상은 뮤직 비디오나 광고에서처럼 파편화된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과는 달리 컨티뉴어티를 확보 하고자 하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많은 작가들은 정지점(dead spot)를 회피하기 위? 애썼고, 픽션이 주는 작가의 통제력을 다큐멘터리에서도 확보하고 싶어했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한 거세현상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멕도걸은 거세의 측면을 다음 과 같이 네 가지로 분류했다. 압축에 다른 잉여 의미의 거세, 관객에게 의미부여의 역할을 제공하 는 해석 공간의 거세, 특히 TV 다큐멘터리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역사적 성격을 지닌 영화제작 행위와 작품과의 관계의 거세, 대상의 내적 맥락의 거세 등이다. 그 결과 일부 작가들은 "러쉬속 에 진실이 있다"는 맥없는 錤봇? 빠져들기도 했으며, 특히 작품이 제작되는 실제환경에 대한 내 용이 거세됨으로서 성찰적 전략은 비주류의 전유물처럼 취급받았다. 물론, 이러한 거세는 강력한 현실적 근거를 지니고 있었고, 그 근거는 장르를 둘러싼 외부조건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의 기본적 모순에서도 발견된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가는 과 정에서는 언제나 작품의 내러티브를 끌고가는 내적 동력과, 대상에 관한 충분한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자하는 현실적 요구가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또한 롱 탔謙㈏? 존재는 편집의 효 과와 결합되기 힘들며, 때로는 그 모호성 때문에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며 의도하지 않았던 일시 적인 이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롱 테이크의 활용을 위해서는 정교한 미학적 고려가 필요하며, 결코 소수 인력에 의해 짧은 시간에 대량 생산될 수 없었고, 이러한 방식은 TV 의 제작관행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렇다면 그 복원은 필요한가 ? 롱 테이크의 고유한 성과에 대한 재검토없이 그 단서를 찾아낸 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두 가지 점에 寧舟舅?.
첫째, 롱 테이크는 일차적으로 현실 의 시공간적 질서를 영화 속에 담아내려는 노력의 결과이거나 혹은, 마르셀 오퓔스의 경우처럼 지극히 정교하게 재구축된 추상적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둘째, 롱 테이크는 작품 속의 각종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개인과 사회, 배경과 전경, 폭과 깊이간의 물리적이고 정 서적인 관계를 롱 테이크는 몽따쥬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때로 그것은 조건과 결부된 대 상의 외적 제한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러한 외적 조건의 변화와 물徨? 주체의 일관성을 표현하 기도 한다. 이러한 근거에 입각해서, 현재의 매체 수용 구조 내에서, 그리고 새로운 미디어의 새 로운 구조에 대한 예상 속에서, 롱 테이크는 그 형식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과 효과를 창출하는 한 부분으로서 전술적으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2) 컷 어웨이, 의사 연결 쇼트(Cutaway & Approximate Link Shot), 그리고 반응 쇼트(Reaction shot) 단위 쇼트의 파편화 현상을 낳은 롱 테이크의 축소가 보다 빠른 리듬감이라는 어쩌면 절박한 생존의 필요성에 의해 일쓱뎬摸?, 컷 어웨이와 의사 연결 쇼트의 활용은 디렉트 씨네마(이하 DC)와 씨네마 베리떼(이하 CV)의 본원적인 특질이 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DC(혹은CV)는 비록 픽션에 대한 강한 반발과 혐오로부터 출발했지만, 역설적으로 다른 어떤 양식보다도 픽션과 가까울 수 있는 현실적 근거를 지니고 있었다. 현존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상, 내러티 브의 구조는 가장 유력한 차용의 대상으로 드라마 구조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도입된 드라마 구조는 전체 작품의 구성과 동렌疸? 아니라, 각 씬 내부의 구성요소의 결합방식 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쳤다.
1) 컷 어웨이 컷 어웨이는 촬영에 있어서 언제나 현실적 제약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에게 있어서 시간의 압축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내는 유력한 무기이다.
동작의 진행과정을 롱 테이크로 잡아내 지 않는 한, 주로 한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기 마련인 다큐멘터리의 촬영에서 컷 어웨이를 사용하 지 않는다면 점프 컷은 필연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대이상의 카마窄? 사용하는 것은 새로운 제약을 유발한다. 이렇게 될 경우, TV의 스튜디오 촬영에서 볼 수 있듯이 개별 카메라의 공간 확 보를 위한 시각의 제한과 음향의 제약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드라마 장르에 있어서 컷 어웨이의 사용은 오히려 예외적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컷 어웨이는 드라마적 구조에 접근하기 위한 다큐멘터리의 고유한 전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전술은 다큐멘터리의 재현 능력을 능률 혹은 환상과 바꿔치기한 결 과일까 ? 이러한 기법자체가 다큐멘터리의 본령을 일탈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일 수 있다.
핵심적인 문제는 항상 극단적이고 편의적인 관행의 범람에서 발견되게 마련이며, 그런 관점에서 컷 어웨이의 사용이 낳을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현실적 맥락의 실종이다. 컷 어웨이는 복귀를 전제로 한 이탈이고, 그 과정에서 시간의 능률적인 압축을 얻는 대가로 현실적 시공간의 왜곡, 혹은 맥락에 대? 관객의 인식 부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2) 의사 연결 쇼트 컷 어웨이는 압축의 수단이지 착각의 수단이 아니다. 말하자면, 컷 어웨이는 진행중인 시각적 이미지의 핵심으로부터 빠져나오면서 그 복귀를 전제로 시간의 압축을 두드러지지 않게 보여주려 했던 것이지 실제 이미지와의 시공간적인 대응 관계를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유사 링크 쇼트의 경우는 그러한 대응관계 자체를 변형시키고 그 변형을 감춘다.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분명 왜곡이며, 시 간의 압축을 의도적으로 감추는 기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사 링크 쇼트가 컷 어웨이에 대해 형식상의 도덕적 우월성(만일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을 지닐 수 있을까 ? 예컨대 10초의 시간이 압축되었음에도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압축되었는지 여부를 판단 할 수 없으며 기계적 모사의 결과만으로는 그 실행 여부조차 판단할수 없는 것과, 압축되었는지 를 확연히 알 수 있지만 오히려 그 압축의 부각을 회피하는 것 자체로 진실성 여부를 논하는 것 은 무의미하며, 형식주의로의 경도 위험성이 있다.
3) 반응 쇼트 180도 규칙은 드라마 구조에서 출발한 것이라기보다는 평면적 영상 이미지를 통해서 공간과 움 직임의 상호 관계를 보여주어야 하는, 뉴 미디어 이전의 선형적(Linear) 영상 매체를 관통하는 시 각적 규율이다.
이러한 180도 규칙이 가장 극명하게 티뉴어티에 대한 다큐멘터리(혹은 난픽션 방송프로그램)의 강박관념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례이 다. 반응 쇼트는 제작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왜곡하는 주요한 계기로 활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브로드캐스트 뉴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극영화에서조차 주요한 모티프가 되기도 한다.) 특히 한대의 카메라로 촬영될 경우 이러한 리액션 쇼트가 활용되는 것은 언제나 실제의 시간과 무관할 수밖에 가능성을 안고 있다. 물론, 유사 링 크 쇼트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기계적 해석의 위험성은 있지만, 유사 링크 쇼트의 경우 동일한 대상에 있어서 시간이 실종되는 반면, 반응 쇼트의 경우는 상이한 대상의 관계가 왜곡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반응 쇼트가 실제의 반응과 전혀 동떨어진 (때로는 전혀 상반된) 형태로 나타나는 사례가 많은 것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면밀한 고려가 없이 활용되는 반? 쇼트, 특히 단편적인 쇼트의 콘티뉴어티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반응 쇼트의 활용은 사각의 프레임 내부 와 외부간의 불가피한 단절을 전혀 극복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시도로 귀착될 수 있다.
(3) 나레이션의 사용
특히 (1)에서 거론한 내적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우 자연스럽게 나레이션의 필요성 이 대두된다. 그리고 나레이션의 활용은 그 능률과 명확성과 함께 양식상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고뇌를 안겨주었다.
신의 목소리를 활용함으로서 나타나는 갰括攘? 혹은 선험주의는 지극히 초 보적인 고민의 대상에 불과하다. 보다 심각한 결과는, 특히 생산성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TV 난픽션(뉴스 릴 혹은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나타나는, 구체적인 표현의 사소한 차이가 실제를 왜 곡하거나 혹은 '객관적인 포장'을 뒤집어쓴 채 지극히 주관적이고 많은 부분 현실을 왜곡하는 주 장이 버젓이 등장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전지적인 가상 존재가 아닌 개별적인 주체에 의한 커멘트, 그리고 제작자의 주관적인 정서를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과 키낸쳔객? 음악은 다큐멘터리의 고유한 힘이었다. 말 하자면, 평면적인 인물 인터뷰(이른바 Talking head)와는 달리 음악이나 나레이션을 사용한 커멘 트는 고백록으로서의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가능성과 현실의 표면적인 객관성과 내면의 주관성을 충돌시킴으로서 진실에 접근하는 유효한 표현방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레이션의 가능성은 확산될 수도 있다.
첫째, 개별적인 커멘트의 결합에 따른 개 인적 주석,
둘째, 전지적 시점의 존재 자체를 패로디함으로서 작가의 목소리를 명시적인 형식 ? 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해내는 전술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기법의 확장은, 실제 TV의 은폐된 의 사 현실주의를 폭로함과 동시에, 나레이션의 가식적 객관주의를 파괴하는 이중의 효과를 낳을 수 도 있다. (4) 재연 기법의 적용 (Reenactment) 사건 발생 당시의 촬영이 불가능했을 경우, 주로 대상자나 목격자의 기억 혹은 제작자의 상상 에 의존해서 이루어지는 재연 기법의 범람은 주지하듯이 전지구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재연 기법 은 특히 TV 다큐멘터리에 있어서는 많은 부분 부정적인 같核? 이어졌다. 재연 기법은 다른 어떤 기법보다도 제작자의 섬세한 책임이 요구되는 기법이며, 또한 다른 어 떤 기법보다도 성찰적 성격이 중요시되는 기법이다. 그러나, 이 기법은 능률을 중시하는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태도와 적절한 취재의 기회가 제한되는 제작조건의 한계라는 조건속에서 센세이셔 널리즘에 대한 유혹과 착종되면서 사용되기 일쑤이다.
특히, DC적 기법과 관련해서 본다면, 현실의 단면을 포착한 클립들과 재연 클립간의 초보적 혼 동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불필요하게 현실? 클립과 유사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은 치명적이 다. 물론, 관객의 기억속에 각인되는 이미지에 대한 책임은 최종적으로 제작자에게 있다는 전제가 동의되어야 하겠지만.(보다 자세한 내용은 졸고 영상포럼?호 [다큐멘터리의 재연 기법] 참조)
4.센세이셔널리즘과 전통의 결합 : 이른바 실제 TV(Reality TV)의 역기능 80년대말 들어 일어난 비디오 테크놀로지의 보편화라는 테크놀로지상의 발전은 다큐멘터리 장 르에 있어서는, 마치 60년대에 16 미리 포터블 카메라가 등장했던 당시와 유사한 편집증을 불어 넣었다.
현실의 전자적 모사는 한편으로는 매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확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는 다큐멘터리가 센세이셔널리즘의 노예가 되는 기현상을 초래했다. 특히, 90년대 들어서 주로 서구의 네트워크 TV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이른 바 실제 TV(Reality TV)는, 기술적 발전의 결과물인 전자적 모사는 다만 반영의 가능성을 제공 할 뿐이라는 당연한 명제를 재확인시켰다. 이러한 실제 TV가 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경우에는 특히 DC적 기법이 주로 범죄 장면과 결합되어 사용되었으며, 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에서 경찰의 활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만 묘사되며 현실감의 증폭에 대해 작가가 선택해낸 부분적인 커멘트가 결론의 색채를 결정짓는다. 이러한 기법은 양식상의 동일시 현상을 극단으로 밀고 간다는 점에서 이미 순응적인 태도로 이어 질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제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취재원과의결탁 때 문에 보수성은 증대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양식의 복원에 대해 니콜스가 지극히 체제 옹호적인 것이며 다큐멘터리의 사망신고서나 다름없다고 격렬하게 비판한 것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특히, 세련된 포장에 식상할대로 식상한 채 일정한 형식상의 갈증에 시달리던 관객들로부터, 그 호응도는 폭발적이었다. 60년대의 DC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롭게 탄생한 것이었으며 일정 정도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 반면, 90년대의 실제 TV는 한동안 잊혀졌던 '목격자(혹은 증거)로서의' 난 픽션이 지닌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동일한 테크놀로지가 전혀 상이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90년대 상황의 한 예 에 불과하다. <가장 우스꽝스러운 비디오>(America's Funniest Home Videos)와 [공중 접근] (Public Access) 으로 대별되는 시민 제작 참여의 양상이 공존하는 것은 그러한 반정립의 대표적 인 사례이다. 그런 면에서, 이제 자기 성찰(Self Reflexivity)의 전략은 매체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아우르지 않는다면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기 힘들게끔 되었다.
이? 단지 이것이 [만들어지고 있 다는] 것뿐만 아니라 [독특한 양식과 제작구조]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으 며, 동시에 관객 스스로 미디어를 만들게 함으로써 가상 목격의 위상으로부터 일탈의 기회를 지 니도록 하는 전략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 전자가 내부 시각의 전환이라면, 후자는 외부로의 시야 확대를 뜻한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센세이셔널리즘과 제작 시스템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제작주체 의 의지 여부가 그러한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5.가능성의 회복과 모색 DC 양식이 장르 내부에서 어떠한 위상을 점하고 있는가는, 관객의 의식 속에 관습적으로 내면 화된 다큐멘터리 양식을 작품 구성의 출발점으로 삼는 가상 다큐멘터리(Mocumentary)의 예에서 쉽게 확인된다.
(, <84 Charlie Mopic>, 등) 뿐만 아니라, 현실의 콘티뉴어티를 바로 옆에서 목격하는 듯이 감각하게 하는 다큐멘터리 양식의 한 분지는 장 르의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시킨다는 점에서 유효한 설득 전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양 식이 관객의 상식적 수준에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자체와 등치 되기도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 가 있다. 그러나, 전술하듯이 이 양식은 출발점에서 선보였던 나름대로의 건강성과 비판정신을 일정 정 도 상실한 채 대부분 센세이셔널리즘에 경도 되어 있으며, 양식의 능률성이라는 이름 앞에, 그리 고 거대한 방송국 씨스템의 관료적 관행에 의해 타협적인 형태로 변용 되고 있다.
상업주의와 관 행적 시스템은 이렇듯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제작의 방법론? 양식에 있어서도 주요한 제약 요인이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있는가 ?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지 못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측면에 서 바라본다면 새로운 양상이 예상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등장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뉴 미디어는 관객의 제한된 능동성을 생존의 근거로 삼는다. 결코 평등한 상호작용이 보장되지는 못하고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관객의 통제력이 향상된다는 것은 매체에 대한 능동적인 접근을 위한 작은 출발점이다.
둘째, 마찬가족? 작은 가능성이자 대부분 지극히 체제 순응적인 이데올로기의 틀안에 갇혀있지만, 뮤직 비디오나 광고의 내러티브의 파괴 현상은 전통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컨벤션으로는 불가능했던 관객의 새로운 태도를 형성하게 하는 작은 촉매제 역할을 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셋째, 산업의 팽창을 추동하는 윈도우의 양적 중대는 활동 공간을 확대시킬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그러한 구조 속에서도 의연히 유지될 상업주의 영 화의 주기적인 관료성은 이른바 비주류 영화의 활약 기회를 역설적으로 늘어나? 할 것이며, TV 다큐멘터리의 제약을 돌파하는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테크놀로지의 변화가 언제나 정치 사회적 역관계에 의해 그 질적 특질이 결정된다는 점은 당연한 전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형식의 변화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당연한 전제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첫째, 미시적인 기법은 전체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재규정된다.
둘째, 각 씬의 시청각 적 이미지의 조합과 그를 통해서 구성되는 내용이 관객과 맺는 관계는, 관객의 매체 경험, 사회 역사적 맥? 속에서 특정 시기 특정 관객층이 특정 씬이 포함하는 사건 혹은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사전정보와 인지도를 지니는가에 따라 재규정된다. 그리고
셋째, 무엇보다도 놓치지 말아 야 할 것은, 형식의 탄생과 변화를 초래한 제작주체의 고민과 그를 강제한 제작을 둘러싼 모든 사회적 역사적 조건, 그리고 그를 통해서 탄생한 창조물 등의 상호관계에 대한 착목이 다큐멘터 리의 본령인, 기계적 이미지로 반영된 진실의 추구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