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
앞으로 한시간 후면 난 공항으로 간다. 오늘 드디어 한국에서 피디가 온다. 피디와 감독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쑥스런 면도 있지만 학교 후배로서 과감히 자신의 일을 접어두고 오는 최피디 최장훈이 고맙다. 오늘은 참 바빴다. 고바우 하숙집에서 꽉 한달을 채우고 나와 주연배우 임경택씨가 마련해준 집으로 이사를 왔다. 짐이라곤 큰 가방 두개가 전부인데 이사는 늦게했다. 이사갈 집은 공짜로 살아서 좋지만 불편한 점이 꽤 있다. 우선 밥을 해먹어야 하고, 빨래도 직접 해야하고, 인터넷도 안 되고, 프린터기도 없고...집 주인이자 주연배우인 경택이도 이사한 지가 얼마 안돼 살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한끼라도 더 먹고 가려고 하숙집에서 저녁까지 버텼다. 버티면서 인터넷전화도 하고, 시나리오도 몇 부 프린터로 뽑았다.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마지막 저녁이라고 그동안 애들 과외 해줘서 고맙다며 맛있는 필리핀식 생선 요리를 해주셨다. 해주는 밥을 맛있게 먹다 밥을 해먹을 생각을 하니 마지막 저녁은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이사를 와 가장 먼저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이 집은 수영교실을 운영하는 경택이 뿐만 아니라 수영강사인 영재와 윤성, 그리고 경택이 친구인 휘수까지 살고 있다. 나와 최피기까지 살면 남자면 6명이 사는 것이다. 냉장고엔 고추장과 고추, 그리고 고기가 있었다. 김치 없이 밥을 못 먹기에 시장에 가 배추와 필피핀 스타일 무를 사다 김치와 깍두기를 담궜다.
이제 최피디를 만나로 공항으로 가야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진행이 잘 될 것같은 느낌이 든다.
6/22
새벽 1시경 세부퍼시픽을 타고 최피디가 드디어 필리핀으로 들어왔다. 혹시 공항에서 문제가 생겨 못 들어오진 않을까 별격정을 다했다. 최피디가 나오는데 너무 너무 반가워 꽉 안아주고 싶었다. 최피디는 한국에서 투자 받은 돈으로 HDV카메라를 구입해서 왔다. 그리고 우리집에 들러 엄마가 해주신 밑반찬을 들고 왔다. 오늘부터 더 부지런해야 한다. 이 집에 나 뿐만아니라 최피디까지 공짜로 산다는 생각에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밥을 준비해야 했다. 어제 만든 깍두기가 날씨가 더워선지 익어버렸다. 엄마가 보내준 깻잎과 오이지, 그리고 김과 미역국을 끓여 늦게 일어난 최피디에게 대접했다. 하숙집 아줌마가 해주던 밥이 그립지만 이제 몇 달간은 이렇게 먹어야 한다.
이른 점심을 먹고 최피디와 우선 헌팅을 해 놓은 촬영장소를 갔다. 필리핀이 첫 방문인 최피디는 소음과 매연과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70년대를 풍기는 시장 골목을 들어서자 몇 백억짜리 세트라며 감탄을 했다. 내가 이 시장 골목을 처음 들어섰을 때 느꼈던 같은 감탄이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최피디와 소주를 마셨다. 최피디가 잔다. 이제 난 그만 믿고 따라야 한다. 최피디가 있어 행복하다.
6/23
오전부터 최피디와 시나리오 회의를 했다. 최피디와 그동안 전화로 나누지 못했던 시나리오에 대해서 첫 토론를 했다. 최피디는 시나리오 보안점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비록 내가 쓴 시나리오지만 최피디는 자신이 쓴 것처럼 시나리오를 잘 분석하고 있었다. 몇 가지 대안을 내 놓았는데 모두 다 맘에 들었다. 다음주까지 한두 번 더 토론을 하고 시나리오 최종본을 뽑기로 했다. 에바 백화점에 가서 어제 산 핸드폰도 바꾸고, 이것저것 샀다. 공짜로 얹혀 산다지만 먹을거며 필요한 물건들은 내가 다 사야한다. 주인공 남자의 아들역인 필립역과 어울리는 18살 대학생을 만났다. 나이도 아주 어려 보이고, 한국과 필리핀 혼혈아처럼 생긴 얼굴이 맘에 들었다. 최피디가 나보다 떠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길거리 캐스팅을 여러건 성사 시켰다. 여자 주인공역을 맡은 여자도 만났고 조연 배우들도 만났다.
6/24
아침부터 최피디가 물었다. 도대체 얼마 남았냐고...솔직히 오래 알고 지낸 후배이자 피디지만 창피해서 우물쭈물 둘러댔다. 500만원 남짓으로 영화찍겠다고 필리핀에 혼자 왔을 땐 그냥 밀어 붙이면 다 될걸 생각했다. 근데 자꾸 돈 얘길 꺼내자 그냥 질러 버렸다.
최피디와 나의 일년 오픈 왕복 비행기표 두장에 하숙비 그리고 비자 연장비에 핸드폰값, 그리고 각종 잡다한 경비와 없는 돈에 돈까지 꿔줘 남은 거라곤 70만원이 전부였다. 남은 70만원 가지고 1시간 40분짜리 영화를 만들겠다고 버티고 있는 내가 너무 우수웠다. 최피디는 미국에서 영화 피디가 아닌 감독으로 투자를 받아 찍은 상업영화로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던 터라 나에게 자신만만하게 궁상 그만 떨고 투자를 받자고 제의했다. 저녁을 먹고 몇 시간 동안 각종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다. 정말 치사하다 싶을 정도로 억지스런 아이디어도 나왔다. 우선 투자 이전에 이곳 언론사를 통해 영화 찍는 걸 알리고, 언론에 보도된 후 투자 유치를 받기로 했다.
6/25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언론사에 돌릴 프레스킷을 만들었다. 이곳 한국 신문사와 잡지서를 돌며 우리 영화 시놉시스와 나와 피디의 약력, 그리고 프로덕션 일정이 담긴 프레스킷을 들고 우선 마닐라서울부터 갔다. 마침 그 곳 사장님 친구분이 독립 영화 감독과 친구분이셔서 우리들을 잘 반겨주셨다, 기자를 소개시켜 주셨는데 내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고 취재를 올까 생각 중이셨다고 말씀하셨다. 나와 피디는 인터뷰를 하고, 일면 머릿기사로 올려달라고 협박을 하듯 밀어붙였다. 이번주 토요일 발행되는 토요판에 실어 주신단다. 아, 드디어 뭔가 진행이 되는구나...주간 마닐라로 갔다. 이 곳은 더 호의적이라 주간지 일면 기사와 사진, 그리고 한달후 일면 기사를 한번 더 내 주시겠단 약속을 받았다. 이런식으로 언론을 통해 보도가 돼야 나와 피디가 하는 짓이 사기로 보이지 않을것이다. 돈이 없어 길에서 나누어주는 맥도날드 활인 쿠폰으로 점심을 먹는데 최피디가 일을 도와주겠다고 같이 돌아다녀던 주연배우가 라지를 시키자 열이 받았는지 앞으로 콜라를 마시고 싶으면 직접 사 드시라며 쏘아 붙었다. 배우는 긴장했고, 난 통쾌했다, 그래 돈도 없는데 자꾸 왜 사달라는거야...
6/26
오늘은 최피디 생일이다. 돈이 없어 선물을 못 사주고 그냥 억지 감동을 선물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일어나 미역국을 끊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한국에서 보내준 김밥용 김으로 참치 김밥을 만들었다. 최피디가 한국판 프레스킷을 영문으로 다 번역하고 나와 밥상에 앉았다. 미역국을 보자 약간 감동을 먹은 눈치다. 나의 작전이 먹혀 들었다.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부수율을 자랑하는 일요신문사를 찾아갔다. 이곳에서도 역시 호의적인 성과를 얻었다. 광고담당하시는 기자분이 협찬을 받을곳을 직접 알아봐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뉴스게이트란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 했는데 너무도 차가운 대답에 기가 죽었다. 교민사회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기사는 절대 실어줄 수 없다며 내 영화가 교민사회와 무슨 관계가 있냐며 신문을 하듯 물어봤다. 화가 나 피디에게 화풀이를 했다니 장훈이가 그 기자 손좀 봐줄테니 화 풀라는 농담에 그냥 웃어 넘겼다.
최피디 생일인데 환전할 돈이 없어, 잘 아는 하숙집 아저씨네 집에 가서 저녁을 얻어 먹자고 했다. 시간 맞춰 가서 밍기적 거리다보면 밥을 줄테니 ...최피디가 아침에 해준 미역국과 김밥으로 억지 감동 먹었으니 그만 하란다. 이런게 궁상이다. 후배 생일날 남에 하숙집 밥을 대접해준다며 데려가니...근데 최피디가 아이디어를 냈다. 맥주를 사가지고 하숙집 아저씨를 찾아가 자연스럽게 투자 얘기를 꺼내자고...근데 아저씨가 없었다. 결국 술과 양파링을 들고 길거리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사람 이용해 먹으려다 벌받은 거라며 서로를 보며 웃었다. 맥주 6병을 마시고, 이 동네에서 가장 싼 코리다 맥주집에 가 맥주를 더 마셨다. 내일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