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
배우를 만났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였다. 처음에 봤을 때 한국인과 닮은 외모가 맘에 들었는데 막상
이 친구를 선택하려니 자꾸 망설여졌다. 결국 한 시간을 얘기하다 그냥 돌아왔다. 하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했지만 너무 들어 보이는 나이로 인해 아버지역을 맡을 배우와 세워 놓으면 형제처럼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이런 식으론 절대 배우를 구하지 못할거란 두려움이 들었다.
5/30
시간은 점점 흘러가는데 9명의 주요 출연 배우중 한국에서 올 여배우와 비행기에서 만난 호성이형 밖에 캐스팅을 못 했다. 스텝도 구하지 못했다. 결국 필리핀카페24에 글을 올렸다. 필리핀엔 영어 공부를 하러 온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돈 한 푼도 안 주고 스텝으로 일해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스텝을 구하기 위해 나도 그들에게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고 생각에 영어 수업을 제안했다. 일년간 한국 학원에서 영어 선생을 한 경험을 살려 공짜로 영어를 가르쳐주고 그 시간만큼 스텝으로 일해 달라는 글을 올렸다. 5명이라도 내 글을 읽고 연락이 온다면 성공이란 생각에 컴퓨터 앞을 지켰다.
시간은 정말 느리게 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반응이 들려왔다. 10명도 넘는 분들에게 이 메일이 오고 전화가 왔다. 그 분들 중 한국에서 몇 일후면 필리핀으로 오실 분들도 계셨다. 일일이 답장을 해 드렸다. 그들 중 스텝이 아닌 연기를 해 보고 싶다는 분과 약속을 하고 SM메가몰에서 만났다. 일식 뷔페에서 만났다. 이곳에서 수영 아카데미를 운영하시는 분이셨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철철 넘쳤다. 무엇보다 날 매혹시킨 건 적당히 나온 배와 검은 피부, 그리고 매서운 눈매...기타노 다케시같은 카리스마는 없어도 시나리오상의 이미지와 너무도 흡사했다. 영화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저녁에 나에게 전화가 왔다. 소주 한잔 하고 싶다며 나를 불렀다. 그 분과 난 동갑이고, 우린 소주 4병에 마음이 통해 친구가 됐다.
그는 이제 이 무모한 범죄에 가담한 나의 가장 든든한 파트너가 됐다. 지금 정신이 몽롱하지만 주연 배우를 너무 쉽게 찾은 안도감이 왠지 내일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두렵다.
5/31
아침을 먹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시간을 넘기면 아침을 못 얻어먹으니까 본능적으로 눈이 떠졌다. 어제 술을 마신 배우 임경택씨가 술김에 시키는 연기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친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런데 먼저 전화가 왔다. 내가 마음을 바꿨을 까봐 먼저 물어본다. 정말 해보고 싶으니 기회를 달라며, 내가 시키면 배설물도 먹을수 있다며 재차 협박처럼 말한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배우를 구할 수도 있었지만 비행기표와 체재비, 그리고 용돈까지 챙겨줘야하는 부담감에 이곳에서 살고 있는 분을 찾았는데 임경택씨는 딱이다. 비행기표 살 일도 없고, 마닐라에 집이 있어 체재비 걱정도 없고, 거기다 철철 넘치는 열정은 날 더욱 매료시켰다. 이제는 주연 배우의 아들역을 맡을 15살 가량의 코피노만 찾으면 배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같다. 임경택씨에서 일요일에 나올 최종 시나리오를 주기로 했다.
6/1
부산에서 아이들 교육차 마닐라로 오신 하숙집 아주머니 두 분이 내가 인터넷에 올린 스텝 구인 광고를 보셨는지 아이들 영어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하신다. 중학교 3학년 여학생 둘과 남학생 1명인데 수줍음이 많아 나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던 아이들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어린 학생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필요한 성인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들 부탁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르쳐 준다고 해도 이 어린 아이들이 내 영화에 스텝으로 뛰지도 않을텐데 괜한 시간 낭비가 아닌가 싶었다. 오늘 오후 바로 첫 수업을 했다. 하루에 8시간 학원 공부하고 나랑 또 공부를 하려니 애들이 몸을 비비 틀었다. 애들한테 말했다. 난 공짜 선생이다. 니들이 열심히 안 하면 나도 하기 싫다고...애들이 착했다. 나도 모처럼의 수업이라 긴장을 좀 했다. 무사히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평소에도 잘 해주시던 아주머니들이 커피를 타다 주고, 과일을 주고...대우가 너무너무 틀려졌다. 내 이름이 아닌 선생님으로 불러주셨다. 선생님 소리가 듣기 좋았다. 1시간 반 투자에 앞으로 하숙집 생활이 아주 아주 편해질 거란 밝은 전망이 든다. 스텝으로 지원해준 분들중 저녁에 한분을 만났다. 25살 남자인데 다음주부터 일주일에 두 번 영어를 가르쳐 주고, 영화 찍을 때 그 시간만큼 현장에 와서 슬레이트를 쳐 주기로 했다. 아, 드디어 연출부가 생겼다.
6/2
부산에서 전화가 왔다. 50대 아저씨인데 필리핀으로 이민을 오실 예정이란다. 25살 먹은 아들은 먼저 보내 영어를 공부 시킬 예정인데 나에게 같이 데리고 살라고 하신다. 하숙집에 살아 같이 데리고 살수 없다고 하자 그럼 스텝으로 일을 하라고 시킬 테니 영어 공부 좀 시켜달란다. 내가 정말로 원한건 영화 스텝인데 사람들은 영어 때문에 먼저 문의를 한다. 아, 이러다 영화를 찍는게 아니라 영어학원 선생이 다시 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영어보다는 영화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야겠다. 임경택씨가 또 술을 먹자고 전화가 왔다. 주연 배우가 술을 마시자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시나리오가 마무리 될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상태론 내일까지 속이 안 좋아 고생을 할 거 같다.
6/3
하루 종일 핸드폰을 꺼 놓고 시나리오 막바지 작업에 들어갔다. 빨리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건네주고 싶은 욕심에 조급해진다. 저녁에 3번째 영어 수업을 했다. 아이들이 조금씩 내게 마음을 연다. 엄마들 때문에 필리핀에 끌려 와서 공부하는 게 불만이란다. 내가 말했다. 오고 싶어도 못 오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런 투정 부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오늘 밤에 임경택씨에게 시나리오 주기로 한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
6/4
한국에 있는 촬영감독님과 통화를 했다. 촬영 스케줄이 엉켜서 8월달에나 오실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되면 7월 달에 올 여배우와 스케줄이 맞지 않는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배우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나에겐 촬영감독이 더 절실하다. 여배우에게 전화를 걸어 8월 달에 올수 없냐고 했더니 화만 내고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끊고 나니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연료도 안 주는데 시간까지 내 맘대로 바꿨으니 화가 날만 하다. 여배우는 물 건너 간 거 같다. 잘 된지도 모른다. 어차피 필리핀 배우가 맡아야 할 배역인데 얼굴이 안 나온다고 한국 배우로 밀어붙인 내가 잘못이었다. 촬영 감독님이 8월 중순이나 말쯤에 시간이 되실 것 같단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되면 모든 스케줄이 꼬인다. 결국 다른 촬영감독님을 일단 확보해야 내가 덜 불안할거 같다. 김기덕 감독님 시간때 같이 일한 촬영부님에게 전화를 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사정을 했고, 허락을 받았다. 공짜로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내가 너무 초라하다. 드디어 시나리오가 나왔다. 임경택씨에게 시나리오 나왔냐고 또 전화가 왔다. 나오긴 했는데 한번 더 손을 보고 주겠다고 했더니 또 만나 술을 하잔다. 배우가 마시자는데 어쩔 수 없어 또 나가 술을 마셨다.
6/5
핸드폰을 꺼 놓고 하루 종일 시나리오 교정 작업을 했다. 오늘은 반드시 배우에게 주리라 마음먹었는데 자꾸만 아쉬움이 남는다. 배우에게 2통의 전화가 왔었다. 사체업자에게 쫒기는 심정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다. 내일아침까지 시나리오를 꼭 뽑아야겠다.
6/6
드디어 시나리오가 나왔다. 주연배우 임경택씨에게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건넸다. 아, 이제 시나리오 걱정은 잊고 배우 섭외와 헌팅에 신경 써야겠다.
오늘은 깊은 잠을 자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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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유와 금전적 여유만 있었다면
기꺼이 범죄에 동참하고 싶을만큼 님의 고군분투 영화만들기가
아름다워 보입니다...
꼭 멋진 영화 만드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