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혼자가 아니다...

berkeleysam
2007년 06월 21일 17시 38분 45초 5515 8
트로피컬 마닐라 13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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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를 털어버리니 이제 배우 문제다. 필리핀 배우를 찾아야 한다.
길거리 헌팅은 일단 실패했고, 다음 대안으로 전단지를 생각했다.
배우를 찾는다며 A4용지에 글을 써서 에바 백화점 앞에서 들고 서 있었다. 한국과 필리핀 혼혈아인 코피노처럼 생긴
15살가량의 소년을 찾는다고 썼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 이 나라 말인 따갈로우로 번역까지 했다.
소년이며 소녀며 할 것 없이 호떡집 불구경 하듯 몰려들었다. 무슨 영화냐며 물어본다. 오는 사람마다 일일이 다 답을 해주려니 가뜩이나 더욱 날씨에 짜증이 솟구친다. 짜증을 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격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에 화가 폭발했다. 단 두 시간도 못 돼 백기를 들었다. 이건 길거리 헌팅보다 더 미친 짓이다.
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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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3대 방송국중 하나인 GMA를 갔다.
천국의 계단과 주몽의 선전 간판이 크게 붙어있다. 한국처럼 방송국 앞에 가보면 괜찮은 배우를 구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 방송국 앞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10분을 걸어 ABS-CBN 방송국으로 갔다. 이곳은 GMA와 달리 공개방송을 보러 온 사람들로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한국처럼 청소년은 거의 안 보이고 나이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띠목 근처에 있는 동네로 갔다. 차도에 만든 농구대 앞에서 농구를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농구
구경이 목적이 아니라 배우 섭외가 목적이라 애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런데 다들 전형적인 필리핀 애들처럼 생겼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농구를 중단해야하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농구를 하는 아이들을 보니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했다. 너무 더워 바닥에 주저앉아 농구를 한참이나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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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배우 임경택씨와 이번 영화 일을 도와주는 김휘수란 친구와 함께 시나리오에서 나오는 주인공 동네를 같이 갔다. 이 나라 부통령과 가장 유명한 여배우가 산다는 동네는 그야말로 좋은 집들로 꽉 차 있었다. 그 좋은 집들을 둘러 싼 게이트를 벗어나자 빈민촌이 모습을 드러냈다. 빈부격차가 엄청 심한 필리핀의 모습을 한눈에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곳 방문이 처음이 아닌 나로서는 나를 반겨주는 아이들의 웃음이 반갑다. 이곳이 처음인 경택씨와 휘수씨는 아이들과 친해지려고 농구도 같이 하고 말도 걸어본다. 낮인데 10대 아이들이 모여 앉아 싸구려 위스키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다 주인공 필립역의 어울리는 아이가 지나가자 나와 경택씨가 본능적으로 그 아이를 지목했다.
한국과 필리핀 혼혈아처럼 생긴 얼굴에 매서운 눈매가 맘에 들었다. 아이라기 보단 18살 청년이었다.
제스라고 불리는 친구였다. 연기에 관심이 많고 영화 출연에 적극적인 제스는 우선 부모님 허락이 필요하다며 집으로 같다. 집에 계신 어머니와 얘기를 했다. 어머니가 영어가 안 돼 한국에서 살았다는 고모가 나와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통역을 했다. 엄마는 찬성이었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일을 나간 아버지에게 물어볼 테니 내일 다시 와 달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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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제스네 집에 갔다.
아버지가 낡은 차를 닦고 있었다. 아버지도 아들의 영화 출연에 적극 찬성이었다.
일단 부모님이 찬성을 하자 본격적인 영화 얘기로 들어갔다. 제스가 영화에 출연한다는 소문이 나자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총 출동을 해 나를 지켜봤다. 내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영화는 어떤 내용인지 수 없이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일일이 다 대답을 해 주었는데 영화의 내용을 듣더니 제스와 가족들이 조금씩 불안해 지는 눈치였다. 결정적으로 제스가 영화에서 아버지로 나오는 한국 배우와 목욕을 같이 하는 장면이 있으니 다 벗어야 한다니까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한국에선 아버지와 아들이 다 벗고 목욕을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제스와 부모님은 그런 장면은 절대 안 된다며 노를 했다. 난 실망했지만 미리 말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괜히 촬영 중간에 이런 문제로 갈등을 겪다보면 영화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갈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목욕 장면 뿐 아니라 문화적 습관과 관점에서 생길 수 있는 씬들을 필리핀 배우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지 걱정이 들었다.
제스를 마지막으로 길거리 캐스팅은 더 이상 무리란 판단이 들었다. 지금까지 열명이 넘는 배우를 만났고, 그들의 연기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지만 보고 달려들어 일일이 영화를 이해시키는데 한계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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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프로듀서가 나타났다.
자비로 필리핀에 오고 싶다는...학교 후배다. 시나리오를 보내고 도움을 청했는데 다행히 시나리오를 맘에 들어 해 같이 일하게 됐다.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한결 몸이 가벼워진다. 우선 한국에서 처리할 일들을 내가 손수 전화하고 이메일을 보내서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일이 편해졌다. 카메라 장비며 촬영감독님 재 섭외로 골치 아픈 일을 피디가 맡아주기로 했다.
다음주에 필리핀으로 피디가 오기전에 헌팅이며 배우 섭외를 마무리 해야겠다. 피디가 내 식으로 하다간 배우를 못 찾을 거라며 필리핀 배우협회를 통해 구하라 조언한다.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그런데 아무런 커넥션도 없이
섭외가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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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랑 통화를 했다.
필리핀 미술협회 회장을 잘 아는 피디 친구가 있단다. 그 분의 도움을 받으면 배우 섭외는 물론 이 곳에서 현지 스텝을 공짜로도 쓸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당장 연락을 취해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다 받아내라고 재촉했다. 내정됐던 촬영감독님은 다른 영화 촬영으로 우리 영화의 참여가 어렵게 됐고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섭외했던 촬영감독님도 거절 통보를 받았다. 피디가 충무로 퍼스트 촬영감독과 계속 미팅이 있다고 하니 기대를 가져 봐야겠다.
피디가 미국에서 같이 작업했던 촬영감독에게 전화를 해 볼 예정이란다. 미술 협회 회장과 미국 촬영 감독, 그리고 한국 촬영감독일 중 한 가지라도 잘 풀렸으면 좋겠다. 피디가 생기고 뭔가 일이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날 기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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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더 좋은 헌팅 장소를 섭외하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
워낙 교통 체증이 심해 낮에 버스를 타도 엉금엉금 기어간다. 버스가 서면 어김없이 땅콩 장사와 생수장사가 버스에 탄다. 운전사는 아무 불평 없이 문을 열어주고, 손님들은 지루함과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음식을 사 먹는다. 필리핀에서 불과 몇 년 전 일반 시내버스에 총을 든 무장 강도들이 타 승객을 포함해 5명이 사살되는 엄청난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를 들은 나로선 버스에 타자마자 창문이 잘 열리는지 조사부터 했다. 총 쏘는 시간이 더 빠름에도 불구하고 왜 창문을 확인했는지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지만 영화도 못 찍고 총 맞아 죽으면 얼마나 억울할까 생각해보니 내 행동이 그렇게 우습지 많은 않았다.
차에서 내려 MRT 열차를 탔다. 우리 돈으로 220원 정도하는 열차를 타고 각 역마다 내려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갔다. 어디가도 동네마다 아이들이 넘쳐난다. 티 없이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신발도 없이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면 나이키를 신고 있는 내가 미안해진다.
하루 종일 걷다 보니 허기가 져 저녁을 두 번이나 사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타고 갔는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처음 와 보는 동네에 도착해 있었다. 어둠 속에서 걷다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어 결국 택시를 탔다. 택시비 아끼려고 버스를 두 시간이나 탔는데 오히려 돈이 손해가 났다. 이럴 때 정말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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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걷다 지쳐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끔찍한 사고가 났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트라이시클이 자동차와 부딪혀 트라이시클 운전자와 안에 탔던 손님이 크게 다쳤다. 트라이시클은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다. 탈 때마다 느끼지만 누구 말대로 목숨 내놓고 타야한다는 말이 딱이다. 돈 몇 푼 아끼려다 병원비로 몇 만배 깨진다는 말이 피부로 와 닿았다. 피디와 통화를 방금 끝냈다. 암울한 소식들뿐이다.
미국 촬영감독은 바빠서 못 오고, 한국 촬영감독님들은 페이 문제가 걸려 고개를 젓는단다. 하긴 비행기표만 달랑 주고 한 달 이상 와서 공짜로 촬영해달라고 하니 누가 오겠는가...거기다 미술 협회 회장은 이탈리아로 출장을 가 한 달 동안 필리핀에 안 들어올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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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 백화점 안에 있는 장비 대여점으로 촬영장비와 조명 장비 대여 비를 알아보러 갔다. 정말 믿기지 않은 말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루 HDV 카메라를 빌리는데 우리 돈으로 32만원, 거기다 HD 촬영감독 고용 5만원, 장비 운반료 4만원...토탈 하루 41만원...한국에서 빌려오면 10만원이면 뒤집어쓰는데...재차 물었다. 32만원이 한달 대여로 아니냐고...내가 필리핀을 너무 우습게 본거 같다. 이 가격이 외국인이 빌렸을 때 가격인지 현지인들도 똑같은 가격은 무는지 필리핀 친구와 다음에 다시 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피디가 좋은 소식을 던져줬다.
피디 아는 친구가 돈을 투자하겠단다. 누가 내 영화에 십만원만 투자해 준다면 꾸벅 절이라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400만원을 주겠단다. 큰돈이다. 그 돈으로 HDV를 대여하지 않고 돈을 더 보태 아예 구입하기로 했다. 카메라 대여 문제가 해결되니 맘이 편해진다. 이제 촬영감독만 구하면 한국에서 해결할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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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 촬영장소인 주인공 동네로 또 갔다.
저번에 매듭짓지 못한 주인공 집 대여료 문제를 해결 지으러 갔다. 피디가 오면 같이 갈까 생각도 했지만 둘이 간다고 가격이 더 싸질리 없을 것 같았다. 오늘도 집 주인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여료를 얼마를 원하냐고 물으면 따갈로우로 식구들끼리 협의를 한다. 너무 답답해 5일정도 쓰고 한달 렌트비에 전기세 내 드리겠습니다 사정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주연배우 임경택씨 집을 갔다. 다음주면 이 집으로 이사 올 것이다.
임경택씨가 집에서 제일 큰 방을 무료로 내주었다. 나 뿐 아니라 피디, 그리고 한국에서 올 또 다른 스텝들이 이 집에서 염치없이 무료로 살 것이다. 미안하고, 고맙고...임경택씨에게 다시 한번 거듭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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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 갔다.
모든 걸 잊고 신나게 수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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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안 좋다.
하루 종일 약 먹고 방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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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털고 있어났다.
더 좋은 헌팅 장소를 섭외하기 위해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너무 더워서 콜라를 수 십 잔을 마셨다.
배우는 피디가 오면 같이 구하기로 해 헌팅에만 전념했다. 오늘 하숙집에서 마지막 영어 수업을 했다. 시원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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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일 한국에서 피디가 온다.
힘이 난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어깨가 가벼워진다.
피디는 결국 촬영감독 섭외에 실패했다. 이유는 돈이었다. 돈을 주고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이곳 현지에서 미술협회 회장을 통해 촬영감독을 구하거나, 피디가 촬영감독 역을 맡기로 했다. 피디는 촬영을 몇 번 해본 경험이 있어 그나마 불안은 덜하지만 조명엔 문외한이라 걱정이 된다.
오늘 새벽 필리핀카페24에 스텝과 배우 구인 광고를 올렸다. 일주일전 필커에도 올렸는데 그때보다 반응이 좋다. 불과 하루 만에 공짜로 스텝 일을 해주겠다고 십여 명이 지원을 해주셨고, 배우 지원해주신 분들도 기꺼이 무료로 출연을 해주신다고 해서 힘이 난다. 배우 지원하신 분 중엔 한국에서 탤런트로 활동 하셨다는 분과 연극을 하셨단 분도 계셔서 다음주 미팅이 기대된다.
난 이제 혼자가 아니다.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berkeleysam
글쓴이
2007.06.21 17:51
사진은 필리핀 현지 코디를 해주고 있는 라니
lobery
2007.06.22 00:21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힘 내시고... 준비 잘 될거라 기대합니다...
lch10167
2007.06.22 05:21
님의 열정에 멀리서 나마 박수를 드립니다. 더운데서 고생많으시내요
수고하십시요
Profile
image220
2007.06.22 17:51
화이팅.
sh28ho
2007.06.24 11:36
정말 가서 도와드리고픈 마음이 불끈 드네요.
그치만, 돈을 떠나서 공연을 하고 있는지라....

화이팅 입니다.
너무도 멋지고 좋으네요.

어떤 작품이 나올지 얼른 보고싶어집니다. 항상 읽으며 그곳의 기운을 느낄께요^^
pall009
2007.06.29 01:01
우선.. 고생이 많으시군요. 꼭! 돌아올 것이 있으리라 믿어집니다.
한국조연배우섭외는 마무리 됐는지요?
전 42살의 배우입니다. 죄송하지만.. 시나리오를 볼 수 있을까요?
제 연락처는 010-4368-0406 입니다.
그럼...
meatbyounghun
2007.07.08 21:33
감독님 저희가 있짜나요^^ㅋ
tlme8348
2007.09.01 18:54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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