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로 재일이 할머니 찾아나선 이야기.

weirdo
2004년 03월 01일 00시 36분 40초 2901 6 1
입대를 앞두고 있었던 구년인가 십년 전쯤의 겨울.
그 때 왠지 모르게.. 군대 가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그러던 끝에, 죽기전에 꼭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바로 '일출'이었습니다.
그 전엔 제대로 본적이 없었거든요.
동쪽 바다 향해 달려가는 밤기차. 입석.
추위에 떨면서 열차 계단이나 통로 바닥을 오가며 토막잠을 자다가
"안에 자리 많이 생겼으니 들어가서 자라."고 누군가 저를 흔들어 깨워준 것은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결국, 바다위로 솟아오르는 시뻘건 불덩이를 두눈과 가슴에 담을 수 있었죠.


-바로 아래 작업일지에 잠깐 언급된 것처럼-
'꽃봄'에 등장하는 할머니를 찾아야 했습니다. 재일이라는 중학생 손자를 홀로 키우시는 떡파는 할머니예요.

노역을 맡아주실 배우분들 접촉도 진행하면서..
실제 현지인을 캐스팅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감독님 의견으로,
'강원도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들을 많이 볼 수 있을 장날에 맞춰 연출부 두사람이 밤기차에 올랐습니다.
출발 몇시간 전까지도 기차 잔여석이 충분하길래,
자신만만 예약도 하지 않은 채, "자리 없으면 입석으로 가지 뭐." 장난 삼아 말했었는데,
진짜 자리가 없더군요. 재밌습니다.

열차통로. 함께간 김군은 세면대 옆자리에,
저는 그 옆 공중전화부스 안에 쭈그리고 앉아 잠을 청했습니다.
성인 한사람 겨우 서 있을만한 그 안에서 팔다리 접어 꽉차게 앉아 있자니,
일제시대, 항일투사들 가두어 두었다던 -서있을 수밖에 없을만큼 좁은 공간의- 그 작은 독방이 떠오르기도 했구요.

그러다 또 재미있습니다.
몇시간 뒤, 이번에도 십년전 그날처럼 누군가 우리를 깨워주었거든요.
"저기요, 저 안에 지금 빈자리 많이 생겼거든요."


태백시 통리 장터.
큰구렁이 가져다 놓고 차력도 보여주면서 뭔가 팔아보려는 인상 않좋게 생긴 누구.
신기한 여러가지 마술 보여주면서 뭐든지 잘 닦이는 약 팔아보려는 인상 좋게 생긴 누구.
술에 취해, 지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시비를 거는 나이 지긋한 누구.
정오도 지나지 않은 시간부터 환한 얼굴로 맛있게 술잔 기울이는 누구누구.

그 와중에도 우리는,
찹쌀 도너츠 천원어치와, 부침개를 돌돌 말아서 만든 어쩌구 이천원어치,
통영 살다 잡혀온 멍게 삼천원어치로 장터 분위기 속에 빠져들어 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같이간 연출부 김군 집이 바로 통영이기도 하죠.
울퉁불퉁 못생긴 남쪽 바다 고향친구를 동쪽 산속 탄광마을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곤 반갑게 씹어먹어버린거죠.)

하지만, 우리가 찾는 할머니는.... 그날 그곳에 안계셨습니다. 어디 계세요?
몇번을 휘젖고 돌아다니던 장터를 떠나, 이번엔 마을에 있는 노인정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다섯 곳쯤.
그때마다 들고 갔던 열두개 들이 매실음료는 가게에 따라 8천원이나 9천원쯤.
노인정, 경로당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연세는 일흔 안팎쯤.
우리 연출부 두사람 나이를 더해보니 쉰여덟쯤.
한결같이 '머리숙여' 인사하시던 그분들의 공통된 반응은,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고, 뭘 이런걸 사오고 그래요",
"아이고, 좋은일 하시네요.", "아이고, 시골에 와서 고생 많으십니다." 쯤.

좋은일 하는게 맞는거예요? 맞는 겁니까? 맞아야 하는거겠죠?

'왜 쪽팔리게 -낙후된- 도계 모습을 영화로 찍느냐?'며 불평을 터트렸다는 택시 모는 옆집 현*이에게,
'개 코같은 소리 하네.. 좋은 일이지, 쪽팔리긴 뭐가 쪽팔려!'라고 쏴주었다는 욕쟁이 할머니.

'할머니 등장할 일 있으면 꼭 써달라'고 네번쯤 이야기 하신 연기력 으뜸 할머니.

장터 방앗간에 기름 짜러 왔다는 주황색 잠바 할머니.
나이 일흔 넘어 버스타고 방앗간 가서 기름 짜는 지금의 당신 모습을
재잘대던 열 일곱 시절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

키크고 예쁜 스물두살 손녀딸이 서울 어느 백화점에서 일한다며
우리같은 '잘생긴' 총각들 손주사위 삼으면 좋겠다는 고운 할머니.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오직 혼자뿐이라는, 웃기만 하고 말씀 없으시던 할머니.

아랫니 윗니 하나 없이 쭈글쭈글 웃으시고 담배 피우시면서 '나같은거 찍으면 뭐하냐.'던 할머니.

장면 설명 듣고서 기꺼이 연기(?)까지 해주신 몇분의 할머니들.

남편 없고 자식들 타지로 떠나고 그 땅에 혼자 남아서는,
아무런 할 일도 없이 그저 점심때쯤 하나둘 노인정에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화투도 치고 가끔은 노래도 부르고.

어느 한분도 쉰여덟 우리에게 반말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는 슬퍼지기 시작한 겁니까.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떠났던 3일간의 성과가 전무한 것은 오히려 후련한 것입니까.


천구백구십삼년 팔월 오일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도,
십오년쯤 시골에서 혼자 사셨구나....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silbob
2004.03.01 01:22
오늘은 진짜 새드하네
bjyop
2004.03.01 03:35
제작부에 새로 들어가신 지연씨를 응원하는 사람입니다. ^^
지연씨 힘내서 꼭 좋은 영화 만드는데 일조하시길 ~~
나중에 구경가도 되죠? ㅋㅋ
filmocus
2004.03.02 17:21
준식이가 술취한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준식아 강원도의 화류계를 평정하고 돌아오시게...ㅋㅋ
uni592
2004.03.04 18:14
CG팀 아는 사람이네. 정피디하고 원석씨한테 안부나 좀...
adnanda
2004.03.06 17:54
강릉 가는 기차 안에서 봤습니다.

기대되요, 꽃봄
youcan2002
2004.03.09 22:17
승엽오빠 고마워~~~~ 열씨미 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