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369 개

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12월 23일

sadsong sadsong
2010년 12월 24일 01시 20분 27초 2542 2

며칠 전, 다섯 살 조카 은우가 갑자기 피를 한웅큼 토하는 바람에 응급실에 입원을 했습니다.
내내 곁을 지키던 엄마(저에겐 형수입니다)를 잠시 집에 가 쉬게 하고
할머니(저에겐 엄마입니다)가 대신 간호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삼촌입니다. 잠깐 들렀죠.

 

형수가 다시 오겠다던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조카는 자꾸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바라보며 벌써부터 목을 빼고 기다립니다.
정작 시침 분침도 제대로 볼 줄 모르면서 말이죠.

 

"지금 몇시지? 엄마 언제 오지? 엄마 빨리 오면 좋겠다."를 반복합니다.

 

할머니 : 은우는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어?

은우 : 은우는 엄마를 제일 사랑하니까.

 

웃기거나 귀엽습니다. 다섯 살이니까.

 

할머니 : 그래, 원래 사람들은 자기 엄마를 제일 사랑하는 거야.

 

기다렸다는 듯 조카 은우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은우 : 그럼 아빠(저에겐 형입니다)는... 할머니를 제일 사랑해?

할머니 : 할머니가 아빠의 엄마니까.

은우 : 그럼 삼촌은 누구를 제일 사랑해?

삼촌 : 삼촌도 할머니지.

은우 : ...그럼... 할머니는 누구를 제일 사랑해?

할머니 : ......

은우 : 왕할머니?

할머니 : 그래 할머니의 엄마는 왕할머니니까. 근데 왕할머니는 돌아가셔서 안 계시잖아.

 

은우가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머쓱한 듯 입을 엽니다.

 

은우 : 근데... 그래도... 땅을 파보면 거기에 있잖아.

 

아마도 제딴엔 '제일 사랑할 엄마'가 없는 할머니를 위로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표현이 좀 거칠긴 했지만... 그런 은우에게 엄마와 전 그저 미소를 지어주었습니다.

 

 

 

 

아직 죽음이 무언지도 잘 모르는 은우의 왕할머니, 저의 외할머니. 엄마의 어머니.
다섯 살 조카의 말처럼, 외할머니가 차가운 땅속에 몸을 누이신지 오늘로써 1년이 되었습니다.

하늘 아래 엄마의 둘도 없는 현명한 벗이었다고
제가 그토록 눈물로 아끼고 사랑한  친구였다고
그것을 잃은 슬픔 제발 알아달라고
피 토하며 외칠 일이야 있겠습니까.


다만,

'엄마 잃은 엄마'의 심정을 좀 더 헤아렸어야 했는데...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계실 할머니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건강한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 반발짝씩이라도 내디뎠어야 했는데...

 

엄마가 마음 놓고 수다를 떨 말벗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일년이 지난 이제야 깨달았을 뿐입니다.

결국 건강하지 못한 정신으로 어둡고 부끄럽게 산 것으로 기록될 또 한 번의 한 해가 쌓였을 뿐입니다.

 

 

꿈에서 만난 할머니는 저를 보며 눈물 짓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벌써

한 해가 지났습니다.

 

 

----------------------------------------------------------------
시골의 장터 오늘은 일요일
해 뜨기 한참도 전 대야를 이고 향하는
할머니의 꿈 우리 건강한 꿈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꿈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 루시드 폴]
-----------------------------------------------------------------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hal9000
2010.12.24 19:07

잠에서 깼더니 수도가 얼어서 보일러도 안돌아가고 그랬나보드라고. 동상 초기의 발끝이 쎄하더군.

드라이기하고 토치가지고 보일러 파이프 녹이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새벽 꿈에 외할아버지 웃으면서 계신걸 봤어.

방에가서 감 좀 가지고 나오라시길래 가서 방문을 여는데. 그때 움찔 눈을 뜨면서 잠에서 깼던거 같다.

옆집에서는 수도가 동파됐다고 웅성웅성 난리가 났는데 거기 비하면 얼마나 다행이야. 드라이기질로 막은 나는.

오늘 24일이면 그 시골 읍내에서는 5일 장이 섰겠구나. 이렇게 추운데도.

 

...덕분에 집에 전화 한번 걸었다.

uni592
2011.01.24 10:56

나한테 효도하라고 말로만 하지말고 새드송도 실천하는 나부랭이가 되었으면 한다. 정말...

어제 엄마한테 소리지르고, 바로 후회가 들었지. 그래서 나에겐 피같은 맥주한캔을 엄마한테 드리면서 추운데 어서 들어오시라고 했다. 왜 남들 다 쉬는 일요일에 베란다 청소를 하셔서 내속을 뒤집는 것인지...

이전
3 / 69
다음
게시판 설정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