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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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메모장 예찬론!

junsway
2006년 01월 21일 18시 29분 28초 1645 3
고등학교 때인가.... 국어교과서에 실린 어떤 수필인데..... 정확한 제목과 저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용인즉.... 아주 지독한 메모광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메모가 가능한 한 남자, 그 남자가 남긴 수많은 메모들이 그가 사는 집안을

가득 매우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 수필을 정말 좋아했다. 그 영향은 아니겠지만 지금 나는 직업상으로 시작했던 메모가 거의 일상화 되어

꽤 즐기는 취미가 되어 있다. 조그마한 손수첩에서 다이어리 2개, 연습노트까지 생각나면 바로바로 적을 수 있는 것들

을 항시 준비하고 다닌다.

처음엔 의도적으로 메모하려 하였는데.... 수첩이 있으면 펜이 없고, 펜이 있으면 수첩이 없고........ 그래서 손바닥에도

적고, 봉투에도 적고, 책 안쪽에도 메모하고, 은행 돈봉투에도 하고... 닥치는 대로 하며 게릴라적인 메모를 해왔다.

그 체계가 잡힌 것은 불과 1년전부터.....

생각의 신속성에 따라... 그 길이에 따라... 또한 깊이에 따라 메모하는 것이 달라졌고....

이젠 그 메모를 다시 한글에 정리하여 파일로 저장하여 갖고 있게 되었다.

그 화일의 종류로 테마에 따라 일곱 종류나 되고, 각 화일은 적어도 A4로 이삼십페이지를 넘었으며

그냥 생각나는 대로 메모하는 말그대로 '메모장'화일은 한줄 두줄씩 적던 것이 이제 육십페이지를 넘게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녹음기를 구입했고.... 녹음기는 다시 개인용 녹음기와 취재용 녹음기로 늘어났고..... 두대의 녹음기를

통해 얻어진 화일도 만만치 않아 다시 시디에 몇십장을 구워놓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남들이 다들 디카다 캠코더다 하며 최첨단 영상 메모에 몰입하는 이 때, 난 아직도 그런 것들이 낯설다.

타고난 기계치이기도 하고.... 아직 그 효능에 대하여 절감하지 못하서이리라..... 시나리오 작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

냐고 질타도 많이 받고... 생각해 보면 내가 쓰는 시나리오가 언듯 영상적이기 보다는 문학적이라는 느낌에 가끔 내 자

신에 실망을 많이 하기도 한다.

그러나 천성이 낙천적이고, 워낙 늦깍이적인 감각이라....... 올해 말이나 내년에는 손에 디카와 캠코더를 들고

사정없이 뭔가를 찍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2006년, 내가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메모에서 기인한다.

단순히 생각의 편린을 긁어 모으는 메모의 매력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에 대한 진정한 쾌락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의식적으로 적어대던 것이 이젠 이젠 내 의식을 떠나 스스로의 메커니즘 안에서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내 인식의 자식들이 스스로의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살아 숨쉬며, 다시 창작의 향기를 내 뿜는다.

내가 어찌 이들을 버릴 수 있으며,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그래서 어느새 이 메모장들은 내 자식으로 성장했고, 내 옆에서 나와 함께 글쓰기의 전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나를 질타하고.... 때론 내가 그들을 너무 신뢰하면 자신들을 잊으리고 매몰차게 충고하기도 한다.

때론 애인처럼, 떄론 선생처럼, 때론 창부처럼..... 정말 소중한 내 친구처럼 내 옆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이제 '메모장'은 내 스스로의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열정과 감성을 믿으라고 언제나 부탁한다.


그 모자이크같은 수많은 메모들이... 그 점묘화같은 구성들이 결국엔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리라고는

정말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결과의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인식의 결과물이 소설이나 시나리오로 집필됐을 때 느끼는 기쁨은 또한 얼마나 큰 기쁨인지.....

2006년... 그래.... 이렇게 소박한 마음으로 그리고 정말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국민학교 때,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준 내용을 과목별 공책에 적기 싫어서

통합노트라 스스로 이름짓고 공책 한권만 가지고 다니다 매일 선생님의 '참 잘했어요' 도장으로 머리를 맞던

그 어린 소년이 자라 메모광이 되어가다니.....

세상이란 참 알 수 없고... 미래는 항상 열려있을지니.....

동지들이여..... 힘내서 쾌락의 세계로 가보자........



마틴 트레비스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aesthesia
2006.01.21 20:30
오우~멋진데요~
저도 문득 떠오를 때 메모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긴했지만 번번히..그저 놓쳐버리고 말았다는..
그냥 머리속에 무조건..ㅎㅎ..
73lang
2006.01.22 02:06
무슨 영화제나 세미나자리 같은디서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보면여

영화감독 지망생이거나 학상분덜이 자주 하넌 질문중에 하나가

"감독이 될라문언 워떤게(무슨 재능이) 필요험까요?"라넌 것이 있넌디요

시방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넌 박모 감독님, 김모 감독님을 비롯한 대부분의 잘나가시넌 (?) 감독님들께서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넌 대답덜이 있슴다.

"이- 영화럴 헐라문언 문학적인 재능이 있어야써!! 영상적인 매체일수록 문학성이 더 필요허당께!!"


junsway님의 윗글 중에

'생각해 보면 내가 쓰는 시나리오가 언듯 영상적이기 보다는 문학적이라는 느낌에 가끔 내 자신에 실망을 많이 하기도 한다.'라는 부분에서

제 입장선 부럽기도 하면스롱

실망할께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워 해야 될 것이라넌 생각이 드넌고만요





건필하십셔 (__)
junsway
글쓴이
2006.01.22 13:25
감사합니다.... 모두들 건필하셔서 2006년에는 오래된 것들은 모두 물러나고 새로운 기운이 한국영화계를 이끌어 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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