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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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사용연료는 백등유

tudery tudery
2006년 01월 13일 06시 48분 27초 3129 1
nanro_Pc2.jpg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던 일을 해추우려 남대문 시장을 찾았다.
여기저기 볼 필요도 없는 일마저 보느라시간은 훌쩍 저녁이 되어 버렸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들어 간 곳이 두평 남짓한 잔치국수 가게,
얼굴이 길쭉한 아저씨가 혼자 신문을 보다가 손님을 맞는다.

뭐?

메뉴라봐야 잔치국수하고 육계장, 그리고 떡만두국이 전부다.
아저씨 얼굴을 보아 육계장을 맛있게 끓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떡만두국은 땡기지 않는다.

잔치국수요.

보던 신문을 턱턱 접더니 대답도 않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국물이 넘쳐 흐를듯, 커다란 스텐냉면기에 잔치국수가 나온다. 허옇다.
젓가락으로 저어야 안에든 국수가 얼굴을 빼족 내민다. 그래도 고픈 배는 넙죽넙죽 잘도 집어 삼킨다.
정.말 맛.없.다.

국물도 훌훌 마셔. 좋은 거야, 메루치 국물.

좋다는 메루치 국물도 두어모금 마신다.
살거 같다는 생각이 지나간다. 좋은거다, 메루치 국물은.

난리야, 난리. 전두환때는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잖아.

경제 이야긴가보다.
내 먹는 모양새를 지긋이 지켜보던 아저씨가 옆집 안경가게는 오늘 마수걸이도 못햇다는 말을 전한다.
지금 시각 오후 4시. 정말 난리다, 난리.
전두환때는 오후 네시까지 마수걸이도 못하는 안경가게는 없었다. 정말 난리다, 난리.

그건 뭐하러 찍누.

담배를 한대 피워물고 난 후, 옆에 놓인 난로에 사진기를 들이대자 아저씨가 핀잔을 준다.
손님이 없으니 신경 쓸 인간은 나 하나다.

아저씨도 한장 찍을께요.

말같이 긴 얼굴을 가진 아저씨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세수도 안한 얼굴을 뭐하러 찍어?

손사래를 치며 성큼성큼 다가온 아저씨가 여전히 넘칠듯 출렁대는 메루치 국물이 가득한 냉면기를 집어든다.
세수도 안한 아저씨가 만든 넘칠듯 출렁대는 메루치 국물로 가득찬 맛없는 잔치국수를 다 먹은,
찍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난로에 카메라를 들이댄 인간이 되어버린 난, 잠시 할 말을 잃는다. 난리다, 난리.

간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어려워진 경제가 전두환의 시대를, 박정희의 시대를 그리워 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시대를 그리워 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적어도.

그것은 난로다, 난로.
사용연료는 꼭 백등유를 넣어야 한다.
휘발유와 경유는 사용금지다.
물론 불순등유 변질등유도 사용금지.
시나리오작가집단 풍년상회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73lang
2006.01.13 21:15
날이 갈수록 각박헌 시상에서

빠 아니면 까

적군 아니면 아군

흑 아니면 백인

시대에

성님처럼

가솔린이나 디젤이 아닌

그 백등유 같은 균형감각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험다요

시방처럼 추운 날씨에

성님의 글을 읽어봉께

사람덜의 꽁꽁언 마음을 따땃허니 녹여줄 그런 백등유루 지피넌 난로가 문득 그립고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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