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을 거의 회복한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나보다.
첫촬영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다시 불규칙한 생활이 시작됐다. 서울에서는 절에서 공수해오는 무화학조미료, 저공해 도시락 같은건 꿈에도 생각 못하고일반 식당 음식등을먹어가며 스트레스만빵으로 받았으니....
결국오른쪽 허벅지에 문제가 생기면서 계획했던 일정을 접고 다시 보성으로 내려와야했다. . 조그맣게 메추리알처럼 딱딱해진것이 나중엔 거짓말 보태서 타조알 만큼 커졌다. 걸면 통증도 있고 피멍도 들었댄다.
주위의 사람들이 걱정을 하는것 같아 괜찮다고 말했지만 무척 고민이됐다. 이러다가 다리라도 자르게된다면....
젠장... 갑자기 실실 웃음이 나오기 시작하는거다.
시각장애에 혈액투석에 다리절단장애까지...
비주얼 적으로 그림은 되지않는가...
손을 절단하지 않았으니 인형은 만질 수 있고 인형을 만질수 있으니 콘티를 할수 있을것이고....
근데 영화를 만들수는 있겠지만 살아가기는 아니 살 수는 없을것 같다.
병원에서는 근괴사라고 가급적 움직임을 제한하고 안정을 취하란다.치료 법이 없단다. 한의원에서도 갗은 병이라고 하지만 처방은 달랐다. 더욱 운동을 열심히 하랜다.
이런 된장... 허긴 이런 일이 한두번도 아니고...
난 양쪽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대로 한다.
사실은 여기 말듣다가 저기 말 듣다가한다. 물론 양쪽 모르게 말이다.
나름 모르게 한다고 하는데아무래도 눈가리고 아웅같다.
지금도 그렇게해서 거의다 낳았다. 통증은 짖즉에 사라졌고 사이즈는 쌍쌍바 잘못 뜯긴쪽 사이즈정도?
10월 15일 2회차 촬영준비를 하면서 두 번째 기획작인 {新시각장애인 임덕윤, 대처법} 제작(촬영포함)에 들어간것이다.
연출부도 없고 촬영부도 없다.
왜 안뽑고 혼자 하냐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영진위 필커등에 글을 올렸었다. 근데 지방근무라서 싫단다.
급한 마음에 전화로간단히 면접을 보고 하겠다는 사람을 하나 뽑아서 3일정도 일을 진행했었다. 서울에서 다리에 문제가 생기기직전의 일이다. 일하다가 하루 몸살이 나서 못나온다는 문자를보내왔다. 걱정도 되고 카메라도 필요()전날 카메라를 맡겼었다)하기 때문에 전화를 걸었다.
어라? 뭐야? 전화를 안받는다. 결국오후에 연락이 되어서 퀵으로 받았지 만퀵이 퀵이아니라 로우여서 결국 돈은 돈대로 날리고 촬영은 촬영대로 못하고...
연출부에게서 못할것 같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렇게 첫 연출부와의 인연은 끝나는 것 같았다.
오늘에서야 확인한건데... 첫날 촬영한 사운드가 엉망(매미소리 차소리 비행기소리 결정적으로촬영하면서 사운드 체크가 되지않아테스트만하고 믿고 갔다 등등)으로 숙소에서 대사녹음을 한 테잎이 있었는데 그 위에 감사하게 다른 걸 촬영해 놓고 가셨다. 확인하는순간 도는 줄 알았다. 어쩌겠는가 테잎을 뒤로 감아놓지 않은 내 잘못인걸... 이걸로 진짜 인연이 끝났길 기대하는수 밖에...
다시 구인을 했지만 여전히 다들 지방이라 난색을 표하고 졸업한 대학 교수님께 부탁드리고 지역적으로 가까운 광주영상위원에회도 전화를 하고 글을 남겼으나 노력이 부족한지 아직도 혼자다.
필커에도 글을 올렸었는데 고등학교 동창중에 카메라맨이 있었다. 5~6년전 에전화통화가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긴 이형기라는 친구다. 나를 이두용감독님께 인도한 이 친구도 처음엔 영화배우로 시작해서 감독의 꿈을 키우다가 어느날 카메라맨이 되어서 났타났다. 1991년녀석이 감독, 주연한 8미리 필름 단편의 촬영을 내가 했고 1997년 KBS 교통캠페인갓길이용에 관한프로그램에서는 녀석이 촬영하고 내가 연기하는등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제법 삘이 통하는 친구다.
마지막 통화 내용이 맘에 걸리는데 결혼(비디오를 내가 찍었는데 편집이 얼마전에 끝났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아마 10년이 넘은것 같다.)하고 애가 생기면서 프리랜서 카메라맨 생활이 점점 부담스러워진다고...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고...
욕심으로는 아직 그친구가 카메라맨을 했으면 좋겠다. 지금 작업하는 단편[킬러(가제)]의 경우 20년이 넘는 친구들이 도와주고 있다.고3때 만나 난 영화로 한모군과 오모군은 연극으로 첫발을 내 딛었엇다. 불행히도 녀석들은아직 그길을 걷고 잇고 나머지 김모군도 연출부로 시작해서 지금은 미술감독을 하고있다.
약 20여년전에 그렇게 4명이 모여 단편을 찍은적이 있다. 약속한카메라맨을 하기로 한 친구가 오지않아 4명이 돌아가며 카메라를 잡거나 그룹샷일땐 삼각대에 세워놓고 기냥 돌리.... 물론 내가 주련이다. 반나절만에 촬영을 마쳤으나 편집이 문제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리니어 편집기는20살이 갓 넘은 련출부에게는 엄청난 고가였다. 프리미어 같은 런리니어 편집이 있다는것도 1998년 대학에 들어가면서 알게됐다. 당시 영화계에는 비디오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물어볼때가 마땅히 없었다. 물론일부의 이야기다.
오! 놀라워라. 고모히 빠져나가려는 저 잔머리!!!
당시에 비디오 카메라 좀 만졌다면 한번씩은 해봤음직한 {바보편집}을 했다.을영구없다. 띠리리리리 하며 편집하는게 아니라 바는 카메라 플레이버튼 을 누르고 보는 레코드버튼을 누르는걸 말한다. 그렇게 편집을 하는데 슬로우장면이 필요했다. 요즘처럼 잔머리가 발달하지 못해서 덜컥 디지털이팩트와 슬로우가 되는 견착식캠코더 한대를 더 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외산 물건에 대한 반감이 커서 처음에는 국산 8미리캠코더와 국산 비디오데크를 고집했다.물론 테잎도 국산을 고집했다.
지금도 변함없이 살려고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싼쪽으로 손이가니....쩝...
국산 캠코더는 당시 나음 콤팩트한 모델이라 자주 가지고 다니며 촬영을 해댔다. 지금 아쉬운것은 현장에 가지고 나가면 빠졌다고 혼날까 현장에 가지고 가지 목했다는거다. 지금 당시 촬영한 테잎들을 디부이디로 옮기고있는 중이다. 가끔 보았던 테잎들도 그렇지만 전혀 기억이 없는, 내가 이걸 촬영했었었나하는 생각이 드는 테잎들이 발견되어 요즘에는 한참 추억여행중이다.
테잎들에는 돌아가신 할머니도 계시고 지금은 군대간조카녀석의 5살 때부르던 김완선 노래도 있고 지금은 고3인 외조카의 돌때 모습도 있고 대장암으로 죽은 친구 모습( 첫 딸 낳고 재미있게 살던 신혼때의)모습도 있고
12년전 준비하던 영화가 업어져 이별여행을 떠났던 감독님과 연출부들도 있고 양수리 종합셋트장 행사를 위해 현장 답사를 간 지금은 타계하신 감독님도 게시고....
그리고... 지금은 70이 된 노친네의 50을 갓 넘긴 모습이 있다.
변함없는듯하지만 젊은우리 엄마의 목소리가 거기 있다.
지금은 못난 자식 때문에 시커멓게 타들어간 가슴으로 살고있을 불쌍한 우리 엄마가장차 눈멀고투석을 받아야만 살 수있는 막내 아들이 찓는 카메라를 보며 찍지말라고 손사레를 칠모습이 거기있다.
이런 또 얘기가 따른 쪽으로 가려합니다. 자! 자! 헛기침 한번 하고... 험!
무슨 이유이여서인지 몰라도 나는 거의 촬영 원판들을 가지고있다. 재활용을 한적이 거의 없다. 물론 촬영하는 일에 흥미를 잃고 카메라도 낡고해서 몇 년은 손대지 않았지만 촬영한 테잋들은 거의다 가지고 있다. 아니 있는것 같다. 가족들이몰래 버리지않는한 거의 다 있다고 본다. 근데겉에 표시를 잘 안해놔서 내용을 확인해야 어떤건지 아는데 보관이 잘못됐는지 70대 복사중 10개가 테잎이 끊어졌다. 전에 브이에이치에스는 가끔 붙여서 스기도 했지만... 그건 눈이 보일때 얘기고...
아직도 좀 남았는데 걱정이다. 한모군이 손재주가 있는데 부탁하려고 말은 꺼냈지만 공연 준비로 바뻐서.... 혹시 이글 읽는 분들중 테잎 수리하는 곳 아시면 리플좀 부탁합니다.
이형기라는 친구 결혼식 테잎을 편집한 사람이 그러는거다. 테잎 노이즈가 생기고 색감이 떨어진다고.... 그때부터 어떻게 해야하나 6미리로 옮겨야하나 고민하다가 디브이디로 결정했다.지금은 라인만 연결하고 녹화버튼 만누르면녹화가 되니 참 좋은 세상이다.
이제 진짜 본론으로 돌아가자.
나는 1989년이라 기억하는데 확인이 아직까지 안돼고 있다. 세명다 기억이 잘 안난다는거다. 1명은 찍은것도 기억이 안난단다.
원래 교우관계가 원만치 몫해서그나마 지금의 친구들밖에는 연락이 안되고 있다.한 친구는필커에서다시 만났고 연극하는 친구와는 가끔씩 자주 연락을 취했기 때문에 그나마촬영장에서 마음껏 응석도 부리고 성질도 피울수 있는것이다.
시각장애인 영화감독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참!영화같은 이야기다.
내가 촬영감독마저 친구를 찾는 이유는 좀 더 편안하게 데이터를 얻기위함이다.
설령기존의 시갖장애인 영화감독 매뉴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매뉴얼이지 임덕윤의 매뉴얼이 될 수 있지는 않을것이다.
영화라는것이 점자나 보행법처럼 일정한 규칙 속에 갖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나름 규칙을 지켜가고있다. 기본이 있어야 변형도 가능하니까... 처음에 영화 만들때처럼부딛치고 깨지고....
보도진들에게 이형기를 찾는다는 이야기만 해서일까 그친구 얘기는 쏙 빠졌다. 어제 윤종신의 두데알림방에 사연을 보냈다. 공식적으로 알아보는건 다 했다. 어디에도 녀석의 소식을 알수 없었다.한국 카메라맨 연합회도 가입이 안되있고 고등학교 동문회에도 연락처가 없고...
그 친구를 찾아 좀 더 나은 데이터를 얻었으면 하는데....
이런이러다가 끛이 없겠는데요.
제가 한 수다 하데... 할 말은 많고 타수는 느리고 프로그램은 꼬여서 한글을 닫았다가 열었다가 컴퓨터를 껏다가 켰다가...
못 믿으시겠지만 어제 한 오후 세시부터 열라 써댄게 이거밖에 안돼네요.
지금은 새벽 세시 반. 두 번째 이야기에 이어서는 다음에 이어서 할께요.
글의 시작을 반말로 시작해서 중간에 바꾸기도 그렇고...혹시 불편해
하는 분이 계시지 않을까 조금 걱정됩니다.
혼자 살아온 날들좀 정리하려고 시작했던게 보시는 분들이 계시니 탄력을 좀 받는데 글을 쓰는 상황이 좀 어렵네요. 날씨도 그렇고 체력도 그렇고...
내일은 아니 오늘은 혼자병원에 가야하는 날입니다. 한의원 직원들이 출장을 가거나 바쁜 날이라...
택시를 타면 3만원을 받기 때문에 아주 힘들지 않으면 버스타고 가고 오거든요.
버스를 타러갈때도택시로 복내라는 곳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가야합니다.물론 화순에 가서도 병원까지는 택시를 이용해야 하구요.
이런 네시네요. 잠깐 눈을 붙여야지 아님 이따가 혈압을 재면 높을게 뻔하기 때문에....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