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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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뇌사

pearljam75 pearljam75
2005년 07월 12일 23시 41분 04초 1736 5 14
내핸폰.JPG

몇 년 전부터 여기저기 아프기도 하고 몸이 말을 안 들어 내 속을 무던히 썩히기도 했지만
올해는 넘길 줄 알았다.
설마 화창한 7월의 어느 아침에 그렇게 떠날 줄은 몰랐다. 향년 5세.

삼성 애니콜 플립 모델명 SPH-A2106 ...2001년 4월 13일 생. 현재는 단종된.
엄마가 길거리 행사대에서 십 만원 주고 사주신. 내 생애 최초의 핸드폰.
DM OFFLINE MODE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 2005년 7월 12일 오전 열시, 얘는 이제 전화가 안 된다.

먹통이 되어서 다시 전원을 켜보니 액정에는 안테나 안뜸 표시가 떴고 화면 가운데는
‘DM OFFLINE MODE’라는 글이 생겼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멘트는 무슨 뜻일까?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보니 삼성 애니콜 제품인 경우, 메인이 나가서 그렇단다. main? ...
이미 고무줄 두 개를 동여매 연명하던 아이였는데 이건 뇌사판정이 분명하다.

전원도 들어오고 전화번호 200개도 고스란히 저장이 되어 있어 확인할 수 있지만
이제 전화를 받을 수도 걸 수도 없다. 통화 버튼을 누르면 서비스 지역이 아니라고 여자는 말한다.
얘는 그녀라고 불러야겠다. 왜 모든 안내멘트는 여자 목소리로 이루어져있을까? 왜? 왜?
남자가 녹음하면 안 되나? 멀더 요원 목소리를 맡은 성우가 안내해주는 거 듣고 있으면
음흉하고 섹시하니 좋을텐데...

이 아이의 지난 5년간의 행보는 다음과 같다.

변기 투하 1회, 그로 인한 기절 1회, 이어서 A/S 서비스 방문 1회, 음주 후 분실 1회, 그에 따른 회수 1회,
건망증으로 인한 분실1회, 그에 따른 회수 1회,
타인의 두개골 난타 1회, 커플요금 믿고 까불다 배터리 터질뻔한 사건, 그 밖에 ...
뭐 그리 파란만장 하지 않았다.
하여간 이제 좀 쉬어야 할 때!

뭐든 끝을 보고야마는 성격 때문에 바둥바둥 갸날픈 이 아이 고생이 많았다.

핸드폰도 없이 옛날에 나는 어떻게 신촌이나 종로같이 사람 많은 곳에서 약속을 하고
사람을 만났는지 모를 정도로 통신의 혁명은 가속화, 대중화되는데
사실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점점 치사해지고 엷어진다.

이제는 발신번호 추적땜에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슴 떨려하면서 몰래 전화를 걸었다가 받으면 끊고,
받으면 끊고 하는 지랄을 떨 수도 없으며, 외박하고 술 마실 땐 엄마, 아빠의 잦은 전화에 눈치를 봐야하고
위치추적으로 내 소재가 들어나 잠수도 제대로 못타는 시대다.

한 6개월, 핸드폰 서비스를 정지시켜놓고 산 적이 있었다.
무척 재밌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는데 다시 한번 그렇게 살고 싶지만 일 때문에 그럴 수는 없어서
후딱 인터넷 쇼핑몰에서 슬라이드형 컬러 핸드폰을 주문했다.

단음에, 흑백화면에, 전화번호도 200명밖에 저장이 안되는 또 몇 년간 컬러링은 'Take on me' 여서
오랜만에 전화 거는 놈들 족족 제발 음악 좀 바꾸라고 퉁을 놓았었는데,

이제 카메라도 달리고 컬러화면에 몇 화음이 벨소리로 울려대는 매끈한 핸드폰...
이번에도 믿는 삼성 애니콜 제품이니 또 한 5년 동고동락할테다.

얘는 보상교환하지 않을 생각이다. 반납하지 않을 경우 2만원의 비용이 더 지불된다는데
나중에 시대극(?) 찍을 때 소품으로도 써먹을 수 있을 것 같고,
전원만 켜지면 보상해준다고는 했지만 고무줄 2개만 떼어내면 그게 산소호흡기라도 되는 냥
배터리와 상단부분이 분리되어버려 전원이 홀라당 나가버리는 관계로 반납하는 게 양심에 반한다.

게다가 너무 정들어서 내가 간직하고 싶기도 하고...

뇌사상태에 빠져버린 플립형 핸드폰,
눈 먼 늙은 개,
구멍 난 4년차 나이키 스니커즈,
13년 된 분홍 머리핀,
30년 된 발렌타인... (이건 아닌가? -.-a)

나는 이런 것들에 마음이 가니 나중엔 땅 좀 사서 고물상 차려 먹고 살아야겠다...
오랜된 것들에 진정성이 느껴진다.
아, 이런 때 또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은 R.E.M 의 ‘Imitation of Life' 로구나. 에헤라디야~

Don't look back in Anger.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bohemes
2005.07.13 00:42
고물(故物)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__
이젠 펄쨈언니의 ☆☆☆☆ 해독은 더이상 없는건가요?
나름 예전의 추억이 많았던 핸폰기종과 같은거라 언니의 핸폰을 보며 종종 회상에 잠기곤 했는데.. 내 추억도 이젠 정말로
먼지쌓인 구석으로 들어가버리겠군요... 조만간 언니의 새로운 핸폰 구경이나 시켜줘용~~ 헤헤
Profile
kinoson
2005.07.13 11:54
저역시 명복을 빕니다. (__)

저는 지난 6년간 총 4번의 휴대폰을 교체했는데.....

바닥에 떨어트린걸 트럭이 밟고 지나가서 한번..
나이트에서 미친듯이 놀다가 잃어버림.. 한번...
여자친구와 싸우다가 너무 화나서 담배인줄 알고 광화문 한복판에 집어던져서 한번....

뭐 대략 그렇습니다..

이번에 새로 산 휴대폰은 오래 써야죠...쩝
73lang
2005.07.13 12:21
몇년전..

고속뻐스터미날 화장실에서

술에 취한 서너명을 상대로

핸펀을 들고 싸운적이 있슴미다.

쓰러진 애들을 쓰윽 한번 훑어보고는 마지막으루다 옆에 있든 소변기를 핸드폰으루 내리쳤도만..

변기가 와장창 하구 산산조각이 났었슴다....

근데 핸드폰은 아무 고장읍씨 2년넘게 사용혔었슴다...--;;;;;;

그게 그 유명한 서울 고속뻐스터미날 화장실을 피범벅으루 만들었든 벽돌 핸드폰 사건임다

시방 쓰고있넌 핸펀도 제 수명이 다할때까정 쓸 생각이고만요..

쬐깐헌 디카하나 사서리 합체를 시켜볼끄나 무쟈게 고민때리고 있넌 중임다

우겔겔..
aesthesia
2005.07.13 21:54
아니 어쩜 펄쨈님 하나하나가 어쩜 그렇게 제 마음에 쏙드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원래 펄쨈님 같은 '분' 너무 좋아해요~~!!맞아요 우리나라 휴대폰 Qualcomm에
엄청난 로얄티를 내고 있죠..걔네들 배불려주는 겁니다~~!!코카콜라와 마찬가지로..
로얄티만으로도 평생 먹고 살죠..사실, 엄청난 휴대폰 소비국가 우리나라가 Qualcomm을
엄청나게 배불려준건 사실이죠~~!! 원래..애국심이 좀 있어서 제가..평소 돌아다니면서도
공공기관 불을 알아서 끄며 모든 것을 절약하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존경스러운지~물도
아껴써야 하는데..ㅎㅎ..
그건 그렇고 또 우리 낭만꽈 사람들은 옛것을 너무너무 좋아하잖아요~~! 저도 그래요
못버려요..그냥 못버려요..추억이 있기때문이죠..나와 함께했기때문이죠..
사람도 오래된 사람이 좋고.. 급기야 한 1년전쯤엔 그 무전기 수준의
휴대폰이 갖고 싶더군요..
사람들은 저를 외계인 취급했지만..아니..전 외계에서 왔습니다..
Profile
pearljam75
글쓴이
2005.07.14 21:03
드디어 새 핸드폰이 도착했습니다.
옛날 전화에 있던 번호들 옮겨 저장하느라 손 아프더만요.
대리점에 가면 케이블을 이용해서 번호를 통째로 옮겨주지만 그러고 싶지 않더군요.
뇌사한 핸드폰에 남아있는, 차마 지우지 못한 번호들... 옮겨 저장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머리속에서는 지우지 못하니까요. 그래도 <삼순이>에 나온 대사처럼 "추억은 아무 힘도 없어요."
과거청산! 민족과 사회만 할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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