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369 개

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못된 죽음

sadsong sadsong
2005년 05월 06일 02시 00분 21초 2417 11 99
어려서부터 우리들에게 '의정부 큰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그 분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놀라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러한 지식들을 습득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내용의 다양함과 풍부함은 신기할 정도여서,
예를 들어, 평생 골프장이라고는 구경도 못 해보셨음에도
골프 이야기만으로 몇십분쯤은 족히 이어가신다거나 하는 식이다.

한번 시작된 이야기가 쉽게 멈추지 않아
마주앉은 사람들을 다리저리게 만들거나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종종 반복되기도 하지만,
일흔 넘도록 피붙이 하나 얻지 못하고
가난 속에서 타향살이 하며 쌓이고 쌓였을 외로움을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런식으로나마 풀어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와야 했던 이북 고향땅으로 다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면서
반백년 세월 그 허름한 '북쪽' 의정부 집을 떠나지 못하신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며칠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중환자실로 실려가신 '의정부 큰아버지'는 이제 거의 의식을 잃으셨고,
그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고간다.
의식을 잃기 전, 남은 기력을 다해 베게 등을 던지며 알 수 없는 화를 내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엄마는, 돌아가실 때가 된 분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이해하신다.
나도 어디선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겠지..

지금쯤..
꿈을 키우던 젊은 날의 고향 모습들로 머릿속을 채우고 계실까..
마지막을 지켜봐줄 자식 하나 없다는 사실에 가시는길 더 힘드실까..
우리들에게 아직도 풀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으실까..


오늘 아침엔,
아버지의 수십년 동료 교사였던 'OOO선생님'의 갑작스런 부음을 전해 듣는다.
혼자 등산을 나섰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소식.
험하지 않은 나지막한 산이라 더 안타깝기도 하고 믿어지지 않지만.

담배 한 대 피우기도 어려워 한 개비를 가위로 몇 토막씩 잘라 나눠 피우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종종 이야기 하셨다는 그 선생님은,
그러한 집안 내력 탓일까, 굉장한 재산을 가졌음에도 남들 보기에 불편할 정도로 허튼 돈은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작년에 퇴직을 했고, 이제야 좀 여유로운 말년을 지내보려고 했을지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그 선생님과의 가장 최근 만남을 떠올리신다.

한달 전 쯤 있었던 그 마지막 만남은 고약하게도 어느 초상집에서였는데,
역시 함께 근무했던 또 다른 동료교사의 외동아들을 보내는 자리였다고 한다.

그 선생님의 서른두살 외동아들은
어느날 아침, 잠을 깨우러 들어간 어머니의 부름에도, 손길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었다고 한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 순간을, 그 순간 아들 앞에 선 그 어머니의 무너지는 가슴을 떠올려 보는 것 만으로
나는 숨이 가빠진다.

그날도 어머니는, 아들을 위한 아침식사를 정성껏 준비해 놓으셨겠지.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 모두에게 최소한의 준비할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는 이런 갑작스러운 죽음은
얼마나 '못된' 것인지.

산에 올랐던 선생님은, 어제 별것 아닌 일로 다투었던 아내를 위해
산에서 내려와 집에 가는 길에
평생 사본적 없는 꽃다발이라도 사들고 가볼까 하는 설레는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지난 밤 잠들기 전의 아들은, 저녁때 이유없이 짜증을 부렸던 어머니를 위해
다음날 잠에서 깨자마자 어머니 등 뒤로 슬쩍 다가가
어깨라도 주물러 드려 볼까 하는 수줍은 마음을 먹었을지 모를 일이다.

아직 비가 내린다.

휴일 어린이날, 집에 모인 가족들의 한 가운데에선
세상에 나온 지 백일이 조금 지난 두명의 조카들이
무엇이 편치 않은지 울기도 하고
무엇이 좋은지 웃기도 한다.

sadsong / 4444 / ㅈㅎㄷㅈ
=====================
울기도 웃기도 한다..
=====================
1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rpig72
2005.05.06 14:48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 이후가 어떠한지를 모르기때문이다."

어떠한 죽음도 남은 이들에게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 죽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떠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망자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우리의 뇌를 스치고 가기 때문은 아닐까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봅니다.......
mojolidada
2005.05.06 20:52
형! 앞으론 '삶의 아름다움 행복함' 이런 가식적이기도 한 글들을 올려보는건 어떨까?

........
Profile
jelsomina
2005.05.07 04:59
쌔드송이 그런 글을 올리는 경우가 가식적이라는 거야 ?
아니면 그러한 정서의 글들이 모두 가식적이라는 거야 ?
citizenhoik
2005.05.09 14:46
새드송님은 언제웃나요?
silbob
2005.05.09 17:15
(새드송님은 화장실에서 몰래 웃어요)
Profile
sadsong
글쓴이
2005.05.09 20:54
웃을만 할 때는 웃죠. 잘 웃습니다.
(화장실에선 주로 무표정하거나 인상을 쓰게 되던데요.
특별히 발바닥이 간지럽다거나 하지만 않으면..)
shally
2005.05.09 23:15
난 새드쏭이 잘 웃어서 좋던데...
그 웃음이 모두 가식이었나요???

글구 실밥님은 새드송이 화장실서 웃는거 어찌 아셨어요???
Profile
image220
2005.05.11 10:10
크흑
Profile
kinoseoul
2005.05.11 16:23
예쁜여자 지나가도 잘 웃더만요.
백일지난 애기들..참 예쁘겠다..
봄에 태어나서 좋겠네.
ryoranki
2005.05.15 18:26
이쁜 실밥이 뭐하고 살고있어?
Profile
sadsong
글쓴이
2005.06.16 19:54
남은 이야기들은 나중에 마저 들려주세요. 천천히.
그동안 힘드셨을테니..
오늘은 그냥 아무 걱정 없이 편히 눈 감고 계시면 돼요.
이렇게 시원한 바람 부는 날....
이전
25 / 69
다음
게시판 설정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