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369 개

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제삿날

jelsomina jelsomina
2003년 02월 07일 18시 36분 06초 1213 1 7
늙은이 같은 생각이 나서요
혼자 핏 웃고는 그냥 써보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집은 일년에 제사를 8번 정도 지냅니다.
설 추석 차례하고 ..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인가 ? - 잘 몰라요. 시사를 지내고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 이렇게 제사가 있습니다.

8시까지는 집에 가야되기 때문에
아마도 그날들이 제가 집에 젤 일찍 들어가는 날일겁니다
대부분은 새벽에 들어가니까..

한창 연애할때는 밖에 급한일있다고 몇번 빼먹기도 했죠.

늦게 일어나 오후에 나갈때 지방 써놓고 가라고 엄마는 항상 성화지만
게을러서 그렇게는 못하고
식구들 다 온 후 .. 젤 늦게 집에 들어가 지방쓰고 씻고 옷갈아 입고 바쁘죠 ..

어릴때 붓글씨 잘쓴다고 지방쓰는걸 제가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잘못써도 잘쓴다고 칭찬만 해주시니까  그런줄 알고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위에 네분 할아버지 할머니의 지방을 쓸때는 양쪽에 두분것을 함께 쓰고
아버지의 지방을 쓸때는 물론 아버지 한분의 지방만 씁니다.

엄마 생각이 잠깐 스치고 지나가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 임마..~ 속으로 말하고
삐뚤빼뚤 .. 써내려 갑니다

얼마전까지도 아버님이 쓰시던 오래된 벼루 꺼내서,
지방쓸때면 늘 옆에와 귀찮게 하는 조카에게 먹 갈게 하고
붓 빨고..
귀찮죠..
지방쓸 화선지 자르고 ..

지금은 그냥 먹펜 사다가 쓰는데 왠지 조금 이래두 되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워낙 게을러서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 보면 저 어릴때 하던 짓과 똑같은 짓을 합니다.

오후에 미리 온놈들은 저들끼리도 나이차가 나서 노는게 수준차가 나는지 심드렁 재미없다고 툴툴댑니다.
누구누구 언제 오냐고
괜히 집에 있기라도 하는날이면 붙잡혀 애들 담당이 저이기 때문에 아예 요즘은 도망을 갑니다

하나 둘 모여들고 나이도 짝이 맞는 끼리끼리가 되면 ..
저들끼리 모여서 이불덮어쓰고 머가 그리좋은지 저녁내내 집안이 난리가 아니죠
아랫집 올라온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결국엔 작은형의 큰 소리가 나오죠,
다들 볼맨 표정으로 방으로 쫒겨들어가지만 들어간지 10초만에 쿵쾅쿵쾅 다시 난리가 납니다.

지방쓸때 괜히 옆에와서 맴맴 돌면서 귀찮게 하는것도 똑같고
제사 끝나고 과일 담아놓은 그릇에 손이 먼저가 알뜰히 과일을 작살내죠
맛있는건 항상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할머니께서 배당해주신 몫을 받아들고 먹는 놈들 뺏어먹는 재미도 좋죠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데 아기들이 먹고 있으면 괜히 뺏어먹고 싶어지거든요

음복 한다고 할머니 부터 초등학생 막내까지 한순배 돌고나면 술은 금방 바닥나고 ..

청소할것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엄청 많은 설겆이랑
방방마다 어질러진 물건들.. 아이들이 전부 어질러놓은것이지만 ..
바닥 청소랑 ..

주로 남자들이 그걸 하고 ..
그릇 좀 나르고 하다가 슬며시 도망갑니다 ..

다가와서 삼춘~ 하고 부르면서 라이타 꺼내 보이는 애들하고 나가서 불장난을 하기도 하고
강변을 조금 걷다가 오면 집안이 어느정도 정리가 됩니다 ..

...
조금씩 싸주고 .. 배웅하고 ..
다 가고나면 엄마하고 저랑 둘이 남습니다.

갑자기 텅 빈것 같습니다.
저보다는 엄마가 더 하시겠죠.
나야 머 편합니다 ..

지긋지긋하다 싶게 달라붙는 놈들 가고나면 방에서 느긋하게 담배도 한번 펴보고 ..
엄마는 그렇게 대충 치워놓고 가도 항상 일이 남게 마련인지 ..
새벽까지 뒷정리를 하십니다...

그후로 며칠동안 내내 같은 반찬 같은 국을 먹지만 .. 먹을만 합니다

국민학교 다닐때
학교에서 집이 3분정도 밖에 안걸렸어요

도시락 안가져가고
때가 되면 집에 가서 밥먹고 왔는데 ..

할머니는 내가 오기 한참 전부터 밥상을 보신답니다.
된장찌개 불에 올려놓고, 집앞 학교 정문이 보이는 담벼락에 나오셔서 내가 오나 안오나 보시다가
내가 좀 늦어지는것 같으면
또 들어가 불 줄이고
그렇게 몇번을 하다가 내가 오지 않는 날이면 찌개가 다 쫋아서 그걸 혼자 드시고 했답니다
다 엄마한테들은 얘기죠..

설날 새뱃돈이라도 받으면 엄마가 맡아놓는다고 해놓고는 안주기를 몇번인지 ..
하도 많이 속아봐서 담부턴 할머니가 은행역할을 하셨습니다.

언제라도 내가 필요한때 얘기하면 할머니는
부엌에 나가셔서 한참을 멀 달그락 거리십니다

치사하게 엄마처럼 사기안치시죠.
나도 꽤나 영악했던것 같습니다
그리곤 내가 말한 정확한 액수만큼 가져다 주시죠.
내가 맡긴 거 끝나가는거 알면서도 내 돈 달라고 하면 항상 돈이 나오기두했구요 ..

소풍갈때 할머니가 많이 따라오셨었는데
언제인가 2학년때인가 소풍을 가는데
한남동에서 선정릉까지 걸어간적이 있습니다 ..
물론 그때의 강남은 지금하곤 많이 다릅니다
아주 아주 많이 .. 다릅니다
먼지 풀풀 날리는 버스가 다니던 그런 동네..

할머니 잘 따라오나 안따라오나 뒤돌아보고 뒤돌아보고 ..
할머니는 저 만큼 한참 뒤에서 따라오십니다 ..
그때 할머니 연세가 지금 제 어머니와  비슷하셨을텐데.. 69살..
그땐 당연히 몰랐겠죠...
다리가 많이 아프셨을텐데..

사이다랑 김밥이랑 든 가방을 할머니가 가지고 계시니까
할머니랑 같이 먹기는 하는데
다른 애들은 다 엄마가 오는데, 왜 난 엄마가 안오고 할머니가 맨날 올까 ... 싶었습니다.

올해는 할머니 산소에 못갔습니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날 ..

옆을 지키시던 엄마가 할머니의 이상한 기색을 알고는 친척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한밤에 다들 몰려왔겠죠
식구들 틈속에 북작거리는 집에서 나와
가로등 불빛만 켜진 집앞 동네길을 괜히 쓸고 있는데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더랍니다

노란 가로등 불빛을 받은 개나리 어린 잎들이 더 노랗게 보였겠죠..
엄마는 "개나리가 피는구나 ..". 그런 생각을 하셨답니다.

할머니 제삿날은 저도 그래서 잘 안잃어버립니다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면 엄마한테 물어봅니다 ..

"엄마 할머니 제사가 언제지 ?"
그리고 달력을 보면 며칠뒤 어느날에 동그라미가 쳐져있기 마련이죠 .

할아버지도 뵌적이 없고
그 위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산소에 가서 풀이나 베어드리지  .. 사진도 없어서 ..심적으로 친하지는 않지만
할머니 지방을 쓸때는 좀 잘 써볼려고 노력을 합니다 ..
옛날 생각도 같이 하면서요 ..

휴가나왔더니 그새 얼굴을 까먹고 군복입은 모습을 보고는 제 고모한테 달라붙어서 울어대던 놈이
이제 고3입니다 ..
난 아직 팔팔 멀쩡한데 짜식이 언제 그렇게 컷는지 ..
어제 그제 럭비농구를 연이어 했더니 아침에 아주 죽겠더군요 ..

젤소미나 입니다.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bohemes
2003.02.08 05:45
길다면 긴 이야기인데.. 잠시 앉아서 쭉 읽어봤습니다.. 입가의 미소는 멈출줄 모르내요.. 지금은 친척들도 아주 소수의 몇분만 오시고.. 또래들도 다 컷다구 서먹서먹했는데.. 저 어릴적 우리집 명절느낌입니다.. 그때 생각도 나고.. 어릴적 해봤자 몇해전 일인데두.. 지금은 한참 된 이야기 같내요,.. 헤헤 요즘들어 맘만 복잡해서 잠도 못자고 이러구 싱숭생숭인데.. 간만에 좋은글 읽구 기분이 좋아지내요..
글 잘~ 읽었습니다... ^^
이전
43 / 69
다음
게시판 설정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