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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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다시 생각해 봐

purnnaru
2001년 11월 26일 02시 56분 14초 1169 4 12
뭔가에 집중하려면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고 했지
지금 니가 하는 일을 제대로 하고 싶다고 했지
그래서 매일 널 원하는 그와 이쯤에서 정리하려 한다고 했지
난 그저 술잔을 채우며 네 말을 들었을 뿐이지만
그래, 지금 이 글을 본다면 다시 생각해봐

과연 그럴까

그는 이 시간에도 네 숙제를 대신 해주고 있지
네가 전화만 하면 언제든 달려가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네 옆자리를 차지할까 두려워하며
떄론 울고 때론 소리지르고
멀어지려는 너를 지키려고 하지
혹시 네 마음이 잠시 멀어졌다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지

그래, 나도 오래 전 그런 친구가 있었다
서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서로 자극이 되지 않는다면
냉정해야 한다고 믿고 마음을 닫아버린 친구
하지만 이젠 좀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
난 이기적이었던거야
하루를 24시간을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그가 그렇게 모든 것을 던져 매달리는 게
두려웠던 거야

말없이 밤길을 걷거나
별이 보이는 골목길에 앉아 이어폰을 나눠끼고 음악을 듣거나
손이 시리면 가만히 잡아주거나
잠 못이루는 새벽 전화를 걸거나
답장이 없어도 좋으니 편지를 받아 줄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것 뿐인데
단지 그것 뿐인데
난 그것조차 귀찮아했고
그 시간조차 아까와했고
내가 가야하는 길을 더 빨리 걷기 위해
그를 밀어내버린거야
그런 거야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내가 그런 존재를 필요로 할 때
나를 귀찮아하는 사람에게 밀려난 후에
혼자 편의점 문 밖에서 찬 맥주를 마시다가
잠시 그 친구를 생각했지
너, 그 때, 이렇게 쓸쓸했니

다시 생각해봐
이 꼬맹아
처음 그를 발견하고 너 얼마나 기뻤는지
처음 그가 널 받아들여주었을 때 너 얼마나 행복했는지
처음 밤을 지새고 돌아와 너 얼마나 바보처럼 울었는지

사랑과 일 사이에서 고민한다고 착각하지마
새로운 사람이 필요한거야
네겐 지금 네 일에 도움이 될 존재가 필요한거야
급한 숙제를 대신해주는 것 보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저 먼 미래를 좀 더 확실히 보여줄 사람
네 손을 좀 더 강하게 잡아당겨줄 사람
그래,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랑은 얼마나 오래갈까
그게...과연 사랑일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널 삶의 전부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면
네 마음을 전부 보여주지 못했다면
네가 생을 걸고 모든 것을 줄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넌 아마...분명히...지금 네가 밀어낸 사람보다 더...
상처를 입을 텐데...

다시 생각해봐
그리고 그에게 말해
지금 네 이기적인 마음의 전부를 보여줘
그 다음은 그에게 맡겨
네가 마지막을 결정하려고 하지마
최선을 다한 그에게 맡겨
그런 다음, 또 한잔 하자
잘자라, 꼬맹이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urnnaru
글쓴이
2001.11.26 03:00
아주 익숙한 대중가요같군...그래, 난 통속적이야, 이것도 머 괜찮은 걸...
Profile
image220
2001.11.26 08:07
아뇨. 내내 노랫말 같아서 더욱 좋았는데요.
simplemen
2001.11.26 16:52
한때의 내가 오버랩되는....꼬맹이말고..다른편....ㅠ..ㅠ
vincent
2001.11.27 09:19
이 말 꼭 해주고 싶었던 사람들이 머리속을 왕왕 스쳐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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