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나리오 작가가 있었다.
주변에서는 그를 방콕거사라 칭했다. 주위와 담을 쌓고 집안에만 틀어 박혀 무언가(!)하고 있는거 같기는 하나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그를 칭하는데 그보다 더 적당한 말은 없을 듯 싶었다.
그에게는 아픔이 있었다.
걸칠것이라고는 난닝구밖에 없는 그가 밖으로 나다니는데에 사회는 너무나 많은 예의를 요구했던 것이다. 빤스입고 난닝구 걸치고 거리를 스트리킹하는 것은 그가 이세상에서 선택해야할 마지막 일이었다. 안타까운 천재는 정녕 그의 세상을 만나지 못하고 거리의 스트립퍼로 마지막을 맞을 듯했다.
그런 그가 시나리오를 하나 써냈다. 누가 보아도 불후의 명작일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의 확신을 뒷 바침하듯이 영화사는 그의 시나리오를 말도 안되는 가격에 선뜻 뺏어갔고 그의 영화는 몇번의 캐스팅 난항과 몇번의 투자사 유치에 좌초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극장에 걸리게됐다.
결과는 너무도 의외의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관객은 그의 시나리오가 토대가 된 영화를 외면했고 평론가들은 물만난 고기처럼 그 영화를 씹어댔다.
그의 영화에 대한 소문이 홍수에 도야지 떠내려가듯 전국에 펴져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때려부술 거리에 목말라하던 민중은 들고 일어났다.
광장에서 평의회가 열렸다.
이 열린 사회에 하등의 도움이 안되는 그런 영화를 생산해낸 시나리오작가가 심판대에 섰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그것이 투영된 시나리오를 위해 변명을 했다. 그것은 피를 토하는 과정이었고 작가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성난 군중은 그의 논리와 그의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무기명 투표에 의해 그 작가는 독배를 마시는 운명에 처했다.
민중의 대다수가 심판을 요구하는데 그의 어떤 변명이 필요가 있었겠는가? 단 한번의 실수가 그처럼 유능한 작가에게 독배를 들렸지만 그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뱉으며 35년 난닝구 인생을 마감했다.
난닝구에 빤스걸친 스트리킹에대한 그의 집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2박 3일간의 난닝구,빤스 광장 퍼포먼스를 훗날 영화인들은 이 시대 작가주의의 죽음이라 칭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글로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폐쇄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꽉막힌 엘리트 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당사자가 들으면 펄쩍 뛸 노릇이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들은 혼자서 사고하고 혼자서 결단을 내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온연하게 그만의 특성일수도 있겠으나 그가 하는 직업이 가져다주는 일종의 직업병이라는 가정도 가능하다.
그들은 성가시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결론 내리며 그 결론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해한다.
그들에게 토론은 성가신 열등주의자들의 변명을 위한 장일 뿐이고, 자신에 대한 비판은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서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혹은 자신의 우수성을 깍아내려 세상을 하향 평준화하기위한 시시껄렁한 음모이론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에게 있어 시끄러운 것은 귀찮은 일인것이다.
술자리에서 스치듯이 취중에 알게된 선배가 있었다.
그와 나와는 혈연은 물론 학연도 지연도 없었으니 뭐가 선배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배가 나보다 위여서 선배라 불렀다. 딱히 달리 부를 호칭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무슨 씨하고 부르기에는 너무 사사로운 자리에서 맺어진 인연이었다.
서로 명함 주고받고 술잔을 서너배 돌렸던 거 같다. 참 말도 없고 낯을 가리는 사람이라고만 기억되고 잊었다. 그로부터 몇일 뒤 그 선배에게서 메일이 날라왔다. 시나리오 한편을 동봉하고. 그제서야 난 내 소개를 하면서 나의 연출부 명함을 건넸고 그는 자기를 소개하면서 시나리오 작가라고 말한 기억이 살아났다. 액션물이었다.
몇마디 듣기 좋지도 그렇다고 날카로운 비판도 아닌 글을 그에게 적어보내고 나서 잊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그 선배를 인터넷 게시판에서 만났다. 인터넷이 요즘 같은 때는 아니어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소통하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그 선배는 참으로 악착같이 자신의 시나리오의 우수성을 외치고 있었다.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의 주장이 너무 측은해서 주의깊게 글을 읽다가 그가 그토록 우수성을 목메이게 외치던 시나리오가 내가 일전에 읽었던 그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그 시나리오가 언제껀데...'
그 선배는 일년이 넘도록 그 시나리오를 쥐고 악을 써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놀라게 할 시나리오가 있으니 이재에 밝은 영화사는 어서 빨리 사가라고 독촉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의 작태에 대해서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독찬 험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다시한번 그 선배가 측은해졌다. 그는 너무 힘든 수행의 길을 택한 것이 아닐까.
그러던 그가 법률적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선배의 시나리오를 읽은지 약 3년여가 지난뒤였다. 당시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국형 블록 버스터라는 영화가 흥행에 신기원을 이뤄냈고 온 영화계가 그 일로 떠들썩할 무렵이었다. 그 선배의 요지는 하나였다.
'내 글을 도둑맞았다.'
어이가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선배의 시나리오와 한국형 블록버스터와의 연관성은 총을 쏜다는 것과 남과북의 대립이라는 거 뿐이었다. 무엇이 그를 저렇게 몰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엉뚱한 것이 굴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4년동안 오직 그 한편만 쓴 것일까.
종종 공모전에 응모하는 것이 괜찮은가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공모전에 내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내 글을 상금도 안주고 거저 베껴먹을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일때가 대다수다. 하아, 작가로서의 진출이 공모전 밖에 없다니. 하는 한숨과 더불어 구데기 끓까봐 장 못담그는 그네의 소심함이 마음을 짖누른다. 그래, 아궁이를 땐 놈들이 있으니 굴뚝에서 연기가 솟겠지.
내 대답은 간결하다. 안 그러면 당신의 시나리오를 알릴 수 있는 길이 뭔데? 참 한심스런 답변이고 한심스런 영화계의 유통구조다. 영화이 근간이 된다는 시나리오를 구하는, 아니 정확하게는 시나리오 작가를 구하는 길이. 시나리오 작가가 현실 영화에 접근하는 길이 공모전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도 목마르는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다.
그러면 베끼는 것은? 거기에도 대답은 간결하다. 베끼라 그래라. 베껴서 돈벌어 쳐먹은 놈들은 그거 하나로 차사고 술사고 음주가무에 짓눌리는 행복을 맛볼지 모르지만 그건 한 때다. 베낀 놈이 어디 창작할 능력이나 있겠는가, 베껴서 살아가는 놈은 또 베껴 먹을 구실이나 찾으면서 배고픈 똥개마냥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다 개장수한테 잡혀가면서 생을 마감할 뿐이다. 맘껏 베끼라 그래라. 능력 좋은 당신은 다시금 새로운 작품을 긁어낼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작가가 아니냐. 혹시라도 베끼는 놈이 있으면 그놈 관등성명 적어두고 이박 삼일만 배아파하다가 잊어라.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충분히 상대할 만큼 자랐다고 느꼈을 때 콱 된장을 발라버려라.
사회인으로, 정당한 보수를 받으며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회인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초보작가가 메달릴 일이 공모전 밖에 없다는 것은 참 한심스런 일이다. 그 한심스러움은 작가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이놈의 대한민국 영화산업이라는 우스운 산업이 만들어 나가는 폐쇄성의 결론이기도 하다. 세번이나 이런 구조를 언급하는 것은 산업의 이런 폐쇄성에 걸맞게 작가들 자신도 그에못지 않은 폐쇄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작가의 폐쇄성을 생각해보자. 무엇을 그들의 폐쇄성이라 하는가.
우선 창작물에 대한 자가당착을 들 수 있다.
하늘아래 완전한 창작물이란 없다는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정말로 하늘아래 완전한 창작물이란 없는 것일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그것에대한 증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선 자신의 작품에대해서는 그렇다고 생각해버리자. 손해날 거 별로 없다. 왜?
현재 한국영화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작가중에 하나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우선 원고지가 무릎정도쌓일 때까지 써라. 그리고 나서 자신의 작품을 처음보터 논하라'
감동 만빵의 말씀이다. 그 분의 의견에 따르면 무릎높이까지 자신의 작품을 써보지 않는 한, 즉 그런 습작의 기간을 거치지 않는한 본인의 작품마저도 논할 가치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그 전에 책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면벽수도하면서 생각한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박박 우기는 인간들이 달랑 하나 써논 작품가지고 남이 도용했다느니, 자신을 몰라준다느니 하면서 지랄하는 거다. 그게 맞다. 그럼 어쩌라고?
폐쇄성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동지가 없다. 자신의 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뒤져줄 수도 있는데, 나 대신 죽어줄 동지는 커녕 내가 앞서 대신 뒤져줄 동지마져 없다. 그저 꽁꽁 숨어들기에만 바빴으니 동지가 어디 있겠는가? 동지를 찾아보자.
자, 이제 폐쇄성을 깰 차례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지를 찾을 때다. 방법은 딱 하나다. 자신을 알려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라. 방법이 없다면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확성기에 대고 떠들어라.
내 생각을 밝히지 않는데 어느 누가 나에게 자기의 내면을 털어 놓겠는가? 내 생각을 도둑질해 갈 놈인가 아닌가를 살피다 날 새는데 누가 나의 글을 알아주겠는가? 세상에는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작가들이 너무도 많고 세상에는 자신을 알아줄 인재드리 너무도 많고 세상에는 나의 재능을 인정해줄 인간들이 드글대고 있다. 단지 문제는 당신이 거기 그 자리에 쳐박혀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갔다. 나의 잘못을 가지고 민중이 들고 일어나 국민투표를 해서 골로 보내버리는 시대가 아니다.
슬그머니 꺼내놓고 탄핵 맞을 거 같으면 아님말고해도 된다. 아무도 뭐라 안 그런다. 시나리오 작가가 국회의원은 아니지 않는가?
이글은 시나리오 작가집단 '풍년상회'에도 동시에 올라와 있습니다.
회원들이 쓴 글을 그냥 버릴수도 없고 잘 뒤져보면 묻히기 아까운 좋은 글들도 있고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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