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파헤쳐지기 시작한건 벌써 한달전의 일이다.
처음엔 조림사업을 한다고 그래서 그런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수십년 넘은 나무들이 무참히 베어진 자리에서 속살을 드러낸 땅을 불도저와 포크레인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는 예전에 노루를 봤었다.
몇천평의 숲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개발의 논리로 인해서 파괴되어 가는 자연을 누가 위로할 것이며 위로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모순이 내 앞에 있다.
입고 있는 옷, 먹는 음식, 교통 수단등 공업화 이후 전 지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생산의 기계적 그물망에서 나는 그 무엇 하나 자유로울 수가 없다. 자연파괴에 직간접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는 내 생존의 방식에 대해서 혁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위자연의 삶을 실천하는 것일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렇듯 해답이 간단하고 단순한가? 이상할 정도다. 그런데 왜 그걸 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주 사소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바로 다음을 행할때 야기되는 소외를 견딜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걸어다녀라. 육식을 하지 말고 그나마 소식을 할 것이며 농사를 지어라. 정말로?
그리고, 그 밖에도 아주 많을 것이다. 물론 많겠지. 세상에는 전문가가 많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난 많은 것을 잃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청년이 처한 사회적 현실은 부르조아들과 달리 문화소비의 적극적 주체가 될 수 없기에 언제나 불리한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다는 부르디외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나마 이 소유와 분배가 불평등한 세상에서 우울을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온, 음습한 마약이었던 인터넷조차 끊어버려야 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대자본가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 목숨 하나와 설령 백년된 나무 한그루를 지킨다고 해도 그것과 내 자신을 맞바꾼다고해도 무엇인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달라지려면 죽은 이후에도 계속될지 모를 비교 평가의 우열의 집착을 완전히 끊어버려야만 할 것이다. 나는 나고 저것은 저것이고가 아니라 나는 이것으로 끝이다라고...
무엇을 위해서 희생했다는 식의 얘기는 더욱 더 사라져야할 것이다.
회원들이 쓴 글을 그냥 버릴수도 없고 잘 뒤져보면 묻히기 아까운 좋은 글들도 있고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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