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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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그녀의 눈물

purnnaru
2001년 11월 09일 12시 50분 20초 1123 5 1
어느 결혼식장이었다.
예식장 피로연에서 미지근한 갈비탕이나 맛없는 잡채를 먹는 것이 딱 질색이었던 나는, 한 선배의 손에 이끌려 어기적 어기적 그곳에 들어서고 있었다.
사용할 줄 아는 화장품이라곤 사무실 세면대에 놓인 존슨즈 베이비 로션 하나 뿐인 줄 알았던 그 선배는, 그날 아침 놀라운 솜씨를 발휘하여 마스카라에 볼터치까지 하고 나타나 종일 직원들의 야유와 감탄사를 감내해야 했다.
- 가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 보여줄께.
선배는 단호하게 내 손목을 잡고 차에 태워 그곳에 데려갔다.
처음보는 핸드백에 낯선 정장, 참으로 신기한 차림새의 그 선배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다가 따라나선 참이었다.
부조 봉투를 건네고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신부 대기실에 들어가 사진도 찍고 신랑에게 덕담을 건네고...가끔 보던 익숙한 풍경대로 선배는 차근차근 식전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마침내 사회자가 마이크를 켰다.
웅성웅성하던 실내는 다소 조용해지고 웨딩마치가 울렸다.
두리번거리며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던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 근데, 선배,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대체 어디 있어?
그런 질문을 하면서도 나는 그 선배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걸 믿지 않았던 거 같다.
그랬다.
서른을 넘긴 그 선배는 주위에서 소개팅이라도 주선할라 치면, 어허~ 그 한마디만 던지고 복도에 나가 담배를 폈다. 술자리에서도 야근할 때도 좀체 꺼내지 않던 담배는, 누군가 그 선배에게 '결혼에 관심없어? 애인 없어? 왜 그렇게 살아?'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건넬 때 마다 서랍 속에서 건져올려졌다. 나는 가끔 조용히 따라나가 그녀의 담뱃불을 붙여주곤 했다.  
우리는 그닥 긴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으나 어쩐지 나는 그 선배가, 그녀가 좋았다. 일하다 말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옆 얼굴, 모두 쏟아져 나간  점심시간의 빈 사무실에서 쩌렁쩌렁 틀어주던 빌리 할러데이나 밥 말리, 밤을 새고 나면 우유를 끓여서 달콤하게 타주던 커피 한잔...그래서 아마 그 날도 툴툴거리지 않고 그 먼 곳까지 따라갔겠지.
그런데...
내 질문을 듣고도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던 그녀는,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주는 장면이 연출되자 핸드백을 더듬었다.
그녀의 손은...떨렸던가.
핸드백이 툭 떨어지면서 담배갑이 튀어나왔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아가며 핸드백을 수습하기 위해 허리를 숙인 그녀는 얼른 일어서지 못했다.
흩어진 물건을 주워주려고 같이 쪼그려 앉던 나는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못본 척 일어나 결혼식의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았다.
신랑이 신부측 부모에게 큰절을 올리고 친지들과 사진을 찍고 부케를 던지고...신부가 드레스를 걷어올리고 폐백실로 걸어올라가는 모습까지. 마치 선배 대신 하나도 놓치지 않고 봐야만 한다는 듯이.
하객들이 식장을 빠져나갈 무렵, 나는 그녀가 없어진 걸 알았다.
라이터를 켰다 껐다...하릴없이 로비를 지키고 선 내 앞에 다시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피로연장에 들르지 않고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시동을 걸어놓고 그녀는 담배를 물었다.
나는 그 담배를 뺏어물고 불을 피운 다음 다시 건넸다.
- 이제 담배 안펴도 돼. 니가 펴.
나는 선배와 눈이 마주칠까봐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그리고 우리는 양수리로 달렸던가...춘천으로 갔던가.
말없이 해지는 것을 바라보고 돌아온 밤.
나는 오랫동안 참았던 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 선배, 사실은 나...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 우리, 그냥 친구처럼 지내자, 헤어지지 말고.
그녀는 단호하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말갛게 웃던 그 얼굴.
잘 살고 있을까.
어제는 내 세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sandman
2001.11.09 16:30
... @~~~ (-;-)_-)-_-)_-)(-_ㅠ)
vincent
2001.11.09 22:45
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어할까요. 하필 누군가한테.
purnnaru
글쓴이
2001.11.10 12:52
저...이런 이야기...영화로 하기엔...좀 진부하겠죠?...^^;;;
Profile
sandman
2001.11.10 14:32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차이입니다. 항상 영화들을 살펴보면 진부라는 그 단어가 기본으로 깔려 있지요... 아닌가요?
purnnaru
글쓴이
2001.11.10 19:24
그렇겠죠...코멘트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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