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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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H로부터: 내 이름은 '오른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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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8월 05일 01시 45분 35초 1289 2 16
낮에는 찜통이더니 웬일로 모처럼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밤인데,
그녀가 긴 긴 쪽지를 써보냈다.




삼일동안 잠을 거의 못잤어..
자도 편히 못자겠어. 이번에 맡은 건 붐인데(붐순이)
꿈에서 막 마이크 들고 있고 그래.ㅠㅠ

홉스골얘기 하다말았지?
쓸데없이 등장인물만 잔뜩 말해놓고--;
그 사람들이 필요없는데 말야..-_-;

원래 몽골엔 어딜 둘러봐도 지평선이잖아. 그래서 볼일 보기가 좀 그렇단말야.-_-;
숨을 데도 없고 숲이 있어도 나무들이 다 날씬해.-_-;
그래서 홉스골에 텐트 쳐놓고 티파니와 데이빗이 못보는 지평선 저 너머로 걸어가기 시작했어.-_-;
근데 지평선을 겨우 넘어가면 게르(몽골천막집)가 보이고, 또 넘어가면 또 보이고 자꾸 그러는거야..ㅠㅠ

그냥 해결해볼래도 몽골사람들은 나보다 눈이 좋잖아.
그래서 계속 가고 있는데.-_-;
(정말 힘들었어.-_-; 그냥 초원처럼 보여도 완전 늪지대에 말똥도 많고 벌레도 많고...ㅠㅠ)

갑자기 어떤 게르에서 머리를 산발한 꼬마여자애가 나오더니 나를 졸졸 쫓아오는거야.
얼굴은 새까맣고 볼은 새빨갛고 눈은 똘똘해가지고
나를 막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쫓아오는거야.

내가 그래서 말시켰어.

-'샌베노(안녕)'
-'샌,샌베노(안녕)'

그랬더니 걔가

-'다니 네르?(이름이 뭐야?)'

하는거야. 내가 유일하게 아는 질문이거든. 그래서 '휘라' 했더니,
'아하~' 하더라구. (이 아하하는 말투는 '띵호야~'할때 말투) 그리고

-'미니네르 오른투야 (내 이름은 오른투야)'

하더라고.
다행히 더 이상 어려운 질문 안하고 갑자기 내 손을 덥썩 잡는거야.
그리고 계속 쫓아와.

너무 귀여워서 주머니에서 멘토스를 꺼내서 줬더니 고맙대.
같이 계속 걸어가는데 맨발이야.
와, 근데 맨발로 그 말똥천지를 잘도 피해다니더라고.

계속 걸어가다가 (자꾸 나를 뚫어져라 쳐다봐-_-; 나는 그냥 웃기만 했지)
오른투야만한 꼬마애들이 막 몰려있는 곳에 이르렀어.-_-;
그곳엔 네덜란드 여인 두명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그 꼬마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을 하고 있는거야.-_-;

내가 가니까 걔네가 막 나한테 뛰어오르고 손잡고 난리도 아녔어.
오른투야 친구들이야.-_-;
다들 맨발인데 한명만 양말을 신고 있더라구.
신발없이 양말만-_-; 양말도 대빵 커서 (아빠껀가봐) 쾅쾅 뛰고
양말 내려가면 무릎까지 올리고 다시 쾅쾅 뛰고
애들이 많으니까 나한테 관심 끌라고 다들 별 짓을 다 해.-_-;

계속 애들 앞에서 뻘쭘히 서 있다가 갑자기 화장실이 떠올라서 돌아왔어.
내일 보자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가서 폴라로이드로 사진 찍어주고
내 카메라로 사진 찍어주고 헤어졌지.
나중에 꼭 다시 갈껀데 그 때 찍은 사진 보여줄꺼야.
내가 너 찍었던 사람인데 기억 나냐 하고.-_-;
나중에 걔 사진 보여줄께.^^

별로 재미없지?-_-; 난 재밌었어.--;
미안.졸려서-_-;


그리고 그녀는, 버릇대로 내 작별인사도 듣지않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던지,  내가 보내는 쪽지는 가지않는다.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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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somina
2001.08.05 16:53
부럽다 ...나 별로 부러운게 없는 사람인데 원래 널널해서 ...

"그녀가 긴 긴 쪽지를 써보냈다." (몽골에서 ?)
"내 이름은 오른투야.."

켄로치 감독 영화중에 "내 이름은 죠" 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대요
너무나 좋아할것 같은 영화.
영화를 보지도 않았는데 ...제목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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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220
글쓴이
2001.08.06 02:08
쪽지는 몽골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더 들으니,그 밥먹던 네덜란드 여인들이 꼬마들을 보더니
이 친구더러 '다 니 동생들이냐'고 물었다는군요.
실지, 얼굴모습이 좀 몽골적이긴 합니다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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