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달.
얼마전에 시골계신 할아버지께서
서울 우리집에 며칠 계시다 가셨습니다.
마침 오신 김에 그때 일이 기억 날까 싶어 혹시나 해서 여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제 연로하셔서 피부에 가는 떨림이 있으십니다.
그때 나는 국민학교 오학년인가 그랬었습니다.
이름은 이제 기억이 안나는데요, 그냥 소녀라고 할께요.
그 소녀는 나랑 동갑이었었고 우리 집 앞의 연립주택에서 살았습니다.
되게 예뻤습니다.
전에 내가 살던집은 지금 목동 아파트 13단지 쯤일겁니다.
전에 거긴 김포 평야 시작쯤 되는 데였습니다. 논, 밭.
되게 더운 날 성냥하고 소금 한 봉지 사들고
아이들하고 논에 가서 개구리 잡아와서 구워먹습니다.
고소하고 쫄깃합니다.
여자아이들이 침을 삼키며 닝닝한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개구리를 구워먹는다는 거, 동네관례상 도무지 여자 아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여자애들 앞에서 나는 나를 이상적인 소년의 모습이라고 상상합니다.
그 소녀도 그런 나를 보고 있습니다.
골목에서 짬뽕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이상적인 소년은 통통한 주먹으로 고무공을 정말 멀리까지 치고 빨리도 달립니다.
그 때도 그 여자아이는 그런 나를 쳐다봅니다. 웃기도 합니다.
롤라 스케이트도 잘 타고 구슬도 많이 땁니다.
술래잡기를 할 때도 술래가 울때까지 걸리지 않습니다.
그 여자애는 나를 정말 이상적인 소년으로 만듭니다.
나는 구멍가게에 롤라를 신은 체로 미끌미끌 들어갑니다.
그 여자애가 뭔가를 사고 돌아섭니다.
나는 좋아한다고 지금 말하고 싶습니다.
근데 그 소녀랑 눈이 마주쳐서 갑자기 아무 생각이 안납니다.
사실 이런적이 한두번이 넘습니다.
일요일 아침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깨웁니다.
그리고 나랑 할아버지는 길에서 배드민턴을 칩니다.
할아버지는 젊으실 적에 배드민턴 선수였었습니다.
읍대표까지 했다고 들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은 상당히 상쾌한 느낌을 줍니다.
아마 동네 아줌마들이 층계부터 골목까지 물청소를 하니까 그런거 갔습니다.
한참을 신나게 배드민턴을 치는데 태권도장있는 큰길쪽에서
소방차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우리 쪽으로 옵니다.
할아버지께서 두리번 거리십니다.
앞 연립 이층 어느 집 배란다 창문에서 검은 연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다시 할아버지께서 츄리닝 웃도리를 벗으시고 하늘로 휘휘 저어 소방차를 부릅니다.
소리도 치십니다.
동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입니다.
불 난 집 앞에 소방차가 서고 소방수들이 사다리를 올리고 창문을 깨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밖에서는 계속 그 창문으로 물을 쏩니다.
근데 나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걱정하며 보고 있는 그 집은.
배란다 창문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고, 사다리가 올라가고, 소방수들이 유리창을 깨고
마스크를 쓰고 들어간 그 집은 바로 그 소녀의 집입니다.
배란다 연기속에서 소방수가 불에 그을린 소녀의 동생을 안고 나옵니다.
소녀의 동생은 축져져서 힘이 없습니다.
삔을 꽂은 머리카락도 많이 탓습니다.
흰 잠옷도 검게 탔습니다.
또 다른 소방수가 이제 소녀를 안고 나옵니다.
안움직이고 축 쳐져있습니다.
피부색깔이 이상합니다.
난 구역집이 납니다.
그게 미안합니다.
할아버지께서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저 주무실것 같아 방에서 나왔습니다.
나중에 그 일이 신문에 났었습니다.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그 아이는 동생하고 엄마하고 셋이 거기 살았답니다.
밤에 그 아이 엄마가 자매가 자는 방에 기름을 붓고 자기몸에도 붓고
불을 붙였다고 합니다. 무책임합니다.
난 요즘도 김수희씨가 부른 '멍에' 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마지막에 어디선가 그 노래가 막 들렸거든요.
후회두 되구.
구멍가게에서
그 일요일 전날 구멍가게에서
좋아한다고 말이나 했으면 덜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