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369 개

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어른이 된다는것...

JEDI JEDI
2000년 04월 28일 16시 10분 29초 2861
나는 전세집에 살고있다.
5월 말이면 전세 기간이 끝난다.

오늘, 집주인의 동생이라는 여자가 왔다.
나보고 '내용증명' 이라는걸 쓰란다.
5월 25일..계약 만료일이 되면 두말않고 짐싸들고 나가겠다는,
일종의 각서처럼 보였다.

우리 부부는 이미 한달전부터 온 동네 복덕방을 다 뒤지며 집을 구하고있다.
요즘 은행 금리가 낮은 이유로 전제십이 별로 없다.
집주인들이 다 들 월세로 집을 내놓기 때문이다.
때문에 월세를 낼 능력이 없는 우리같은 경우는 집 구하는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뭐 막무가내로 않나가고 버티겠다는것도 아니고,
열심히..할일도 못하면서 집을 구하러 다니고 있는데,
내가 왜 그런 서류에 또 도장을 찍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다.

내 도장은 영화 계약할때 쓰라고 울 엄마가 비싼돈 주고 파주신 도장이다.
..도저히 그 도장은 쓰기가 싫어서 도장 없다고 지장을 찍기는 했지만..
역시 기분이 참으로 더럽다.

난 내용증명이라는게 뭔지도 모르고..
이 망할놈의 나라의 법이 어떻게 되있는지도 모른다.
난 정말 상식대로 생각했고 상식대로 살았다.
5월 달에 계약이 끝나니까 그전에 나가야 겠구나..
집구하러 다녀야 겠다.
그러다가..마땅한 집 구해서 나가면 그만 아닌가..

왜 그렇게 하루라도 빨리 내쫒지 못해서 지랄발광을 하는걸까..
왜 내가 각서를 쓰고..그걸 쓰기 위해서..생전 가보지도 못한
사법소서라나..뭐라나 하는 사무실에 들락거려야 하나..
그 여자는 왜 우리집 소파에 앉아서 소리를 질러대고..
나보고 '젊은 사람이 왜 세상을 그렇게 사냐' 니...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데..
불쌍한 우리 마누라 등쳐먹는거 외에는 하늘 우러러 별로 부끄러운 일 없이 산다.
길에 휴지를 버리지도 않고..
교통법규도 잘 지키고..
누구한테 거짓말하지도 않고..
술먹고 꼬장을 부리지도 않고..
근데, 세상을 왜 그렇게 사냐니...
내가 왜 여자한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명색이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나는 지난 몇달간 집에 돈을 단돈 1원도 갔다주지 못했다.
2년을 준비하고 매달려온 영화가 얼마전에 엎어졌다.
촬영한지 3년이나 지난 내 단편 영화의 후반작업을  지원해주려던 곳에서는 돈많이 든다고 없던 일로 하잖다.
장인,장모님은 왜 아이를 안 가지냐고 걱정이시다.
아이를 가지면 아내가 일을 못할꺼고..그럼 우린 그냥 굶어야한다.
아내가 일을 안하면 굶어야 한다......하하하.

하루라도 빨리 또 일을 시작해야 겠다고?
그 영화 역시 2년을 끌다 엎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는가...
엎어지지 않고 잘 진행이 되면?
거기서 받은 돈으로 우리 부부가 생활할수나 있는건가?

...도대체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무슨 방법이 없다.

지장을 찍고 돌아오는 길에 정말 '맥이 풀린다'는 말을 실감했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발걸음 하나 하나가 너무 무거운...

걷는것이 힘들어 놀이터 벤취에 앉았다.
하늘을 보니..하늘은 너무나 푸르고..
어린시절 올려다보던 그 하늘과 너무나 닮아있다.

"나 돌아갈래.."
정말 누구처럼 외치고 싶다.




이전
69 / 69
게시판 설정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