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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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형식으로 써 본 자작이야기입니다.(상당히 길 수도..)평가 부탁드립니다.

engum
2009년 05월 27일 02시 43분 40초 3486
제목 - 행복한 이야기

어느때와 같이 핸드폰에선 알람이 울린다. 알람을 끄고나면 시간은 아침 7시. 10월이라 날씨가 쌀쌀해선지 이불속에 몸을 웅크리고 '5분만 5분만...'이라고 머릿속에 외쳐댄다.하지만 5분을 이불속에서 달콤하게 낭비했다간 지각이라는 무서운 녀석이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눈을뜨고 화장실로 향한다. 양치질을 하기 위해 칫솔을 잡고 치약을 바른다. 구석구석 깨끗이 닦고 세수에 머리감기... 언젠가 어깨넘어로 이런말을 들은적이 있다. '화장실 거울은 성형거울이다'라는 말인데, 아침에 세면후 화장실 조명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있자니 매우 흡족한 기분을 느낀다. 물론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이 순간 만큼은 내자신이 왕자병에 걸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너무 심취해 있으면 안되기 때문에 다음 할일을 하기위해 서둘러 화장실을 나온다.

아침 밥은 거의 먹지 않는다. 아침밥을 차려 먹을 시간에 조금 더 잠을 자는게 나에겐 오히려 약이된다. 어렸을 때부터 이게 습관이 되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옷장앞으로 발을 옮기게 된다. 검은색 정장을 옷장에서 꺼낸후 주섬주섬 입기시작한다. 검은색 넥타이를 둘러매고 다시한번 옷장 옆 거울을 본다. 역시 화장실 거울이 아니면 얼굴은 안보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넥타이를 고쳐맨다. 시간은 7시 25분을 향해 달리고있다. 나에게 "더 늦으면 곤란하지않아?"라고 말하듯이 시계는 멈춰주지 않는다. 열쇠와 지갑을 챙기고 서둘러 집밖으로 향한다.



이른 아침. 버스를 타기위해 열심히 걷는다. 평소 같으면 나와 같이 걸어가는 사람이 많을테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길바닥에 누워 세상을 다 가진듯한 표정으로 잠을자고 있는사람을 종종 볼 수도 있다. 지금도 전방 10미터앞에 건장한 청년께서 아스팔트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왜 이런사람들이 있을까?

오늘은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꽤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지나가시던 할아버지께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듯 하다. 그런 청년에게서 눈길을 돌린후 내 갈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오늘 같은 일요일엔 출근을 하지 않는다. 오늘은 나에겐 아주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아침, 아니 꼭 이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평소 9시에 일어나던 나에겐 이른아침이다. 어떠한 특별한 날일까? 어떠한 사람은 특별한 날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별것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다. 나에겐 왜 특별한 날일까? 그건 바로 오늘은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날이기에 나에겐 특별한 날이라고 말하겠다. 5분정도 열심히 걸어서 버스정류장 앞에 걸음을 멈췄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담배를 꺼낸다. 아니, 지갑과 열쇠만 챙겼기 때문에 주머니엔 담배가 없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마냥 버스만을 기다린다.

내가 원하는 버스는 얼마되지않아 도착해 주었다. 텅텅비어있는 일요일의 버스는 참 좋다. 그 중에서도 난 맨 뒷좌석을 가장 좋아하는데 오늘은 다른사람이 먼저 선수를친 상태이기에 그냥 뒷문에서 가장 가까운 아무자리에나 앉았다. 원하는 목적지에 가기위해선 30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잠시 눈을 붙여볼까'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목적지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낭패이기 때문에 관두기로했다.

창 밖의 풍경을 보며 시원한 바람이 나의 뺨을 스쳐지나간다. 아침의 상쾌한 공기가 나의 폐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하늘에 구름이 끼어서인지 아니면 가을이라 해가 점점 늦게 뜨는건지 아직 완전한 아침이 온 것 같진 않았다. 평소에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가득한 매연을 담고 거북함을 주던 이 거리도 오늘은 고요함을 내게 안겨준다. 그 고요함과 시야가 흐려질듯한 속도로 엑셀을 열심히 밟아주시는 버스기사 아저씨 덕분에 나의 감수성이 눈을 뜨려고 한다. 눈을 반쯤 감은채로 머릿속에 그녀를 떠올려 본다.





우린 4년전에 대학교에서 만난 평범한 커플이었다.

만나게 된 계기는 그녀가 교내식당에서 밥을 먹기위해 식판에 맛있는 반찬과 국을 올려놓고 걸어가던 도중, 내 몸에 살포시 식판을 안겨주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내 옷은 먹음직스런 색깔을 띄우며 날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내 옷보다는 자신의 점심이 자기뱃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에 실망하였는지 바닥만을 보고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죄송하다는 말도 없이 후다닥 뛰어가던 그녀의 뒷모습을 난 잊을수가 없었다.

결국은 나도 밥은 고사하고 화장실로 뛰어가 화려한 색상을 띄게 된 나의 옷을 원상태로 만들어보려고 노력을 했다. 뭐 실패했지만... 그때가 아마 5월 중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옷을 껴입었었다면 하나를 벗으면되지만, 긴팔 티 한개만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 집에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 옷에 이런 멋진 그림을 그려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진 못했기 때문에 찾을 방법은 없었다. 내 머릿속엔 짜증이라는 단어가 자리잡은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내 걸음은 자연스레 밖의 가까운 벤치로 옮겨갔다.





"칙..칙.."

라이타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아..대학생활 최악의 날이구나..'

머릿속엔 집으로 갈때 날 개그맨보듯이 쳐다봐주는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푸념하고 있을때였다.

"저..."

누군가 내 뒤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난 그게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 옷에 그림을 그려준 그녀였다.

"어!..아까 그 식당.."

난 한손으로는 그녀를 가리키고 다른한손엔 담배를 옆에있는 재털이에 끄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무엇인가 포장이 되어 들려있었는데 뭔지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저 아깐 죄송했어요.이거..."

그녀는 들고있던 포장된 물품을 내쪽으로 내밀었다. 미안해서인지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진 못하고 고개를 숙인채 팔을 앞으로 쑥 내밀고 있었다. 받아야할지 말아야할지 머릿속엔 수없는 갈등이 밀려왔지만 당연히 받기위해 손을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난 포장된물건을 두손으로 공손이 잡으며 물어보았다. 그러자그녀는

"아까 일이 미안해서 주는거에요!"

라고 하곤 후다닥 옆 건물로 들어가버렸다. '아..그래도 미안하긴 했었나보구나' 라고 생각하며 멋쩍은 웃음을 짓고 포장된풀건을 쳐다보았다. 헌데 뭔가 이상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녀가 나의 옷에 그림을 그려준건 불과 10분정도 밖에 되지않았는데 그사이 물건을 포장해서 갖다준다는게 뭔가좀 이상하다 생각했다.

음..역시 물건을 뜯어봐야 답이 나올 것 같아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포장을 뜯어내자 그 안에는 티 한벌과 빨간색 편지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는 다시 밴치에 앉아 편지 봉투부터 뜯기 시작했다. 봉투안에는 4장의 편지가 들어있었는데 편지가 몇장인지 세어보다가 맨 마지막 장의 끝부분에 크게 쓰여진 글씨가 내눈에 확 들어왔다.

"내일 저녁 9시"

다급히 난 그자리에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던 것 같다. 나를 처음보게 된 것은 OT때였다고한다. 그럼 약 3달 전 쯤일것이다. 그때부터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어느날 집에가는 길에 자신과 같은 버스를 타고 집에가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집도 꽤나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했다. 3개월간 내 뒤를 졸졸밟으며 나에대한 조사를 아주 많이 한것 같았다. 난 특별히 어디하나가 빼어나게 멋지다거나 그런건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을 겪게 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좋기도하고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를 몰랐다. 앞의 3장 까지는 그냥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였고 마지막 4장째를 볼때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글씨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내일 저녁 9시, 집앞에 나와계셔줄 수 있나요?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라는 문구와함께 편지는 끝을 맺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편지가 고백을 위한 편지인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볼때엔 별거 아닌 고백의 글이었겠지만 한창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사춘기 시절에 남중 남고를 나온 내게는 여자친구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에 와서도 그다지 신경쓰는일 없이 조용하게 행동하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내 뒷조사를 하던여자가 내옷에 예쁜 그림을 그려주고 고백을 한다는건 정말이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온 내게는 너무나도 고레벨의 충격을 선물해주었다.

'어쩌면..대학생활 최고의 날이구나..'

라고 머릿속에 되뇌이며 편지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번정류장은은 영등포 롯대백화점 앞 입니다. 다음정류장은.."
정신없이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 오게되었다. 서둘러 하차벨을 누르고 내릴 준비를 한다. 시간은 8시 7분. 예상했던 시간과 비슷하게 도착한 것 같았다. 기차표를 끊기 위해 역 안으로 들어갔다. 전광판을 뚫어지게 보며 내가 타야할 새마을호 기차시간을 보았다. 8시35분에 출발하는 XX행 열차가 있었다. 표를 끊으려 창구 앞으로 가서 "XX행 기차표 하나주세요"라고 말하며 지갑을 꺼냈다. 직원아가씨는 졸린지 하품을 하며 나에게 표를 건네주고 나는 표값을 지불했다. 표값을 내고난 후 기차를 타기전에 미리 사두어야 할 것을 생각해냈다. 이른 아침에도 문을 여는 그곳은 내가 작년 이맘때 그녀를 만나러가는도중 영등포역에서 1시간을 헤매이며 찾아낸 곳이었다. 그곳에 찾아가 밖에서 물건을 손보고 있는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낸다.

"안녕하세요."

아저씨는 무뚝뚝한 표정의 얼굴을 나에게 휙 돌리며 점차 미소를 띄우셨다.

"아 젊은총각 또왔네?허허"

"총각이라뇨 아직 스물넷인데.."

"아니 그냥. 요즘 젊은 애들보다 정성이다 싶어서 어른스러워 보였는지 자연스레 총각이란 말이 나오는구만 하하. 작년 그걸로 주면될까?"
라고 말씀하시는 아저씨는 내가 뭘 원하는지 이미 알고 계신듯했다.

"기억하시네요?하핫. 그럼 작년하고 같은걸로 주세요.예쁜걸로 골라주셔야해요~"

라고 말하는 나에게 걱정말라는 손짓을 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신 아저씨는 잠시후 물건을 꺼내오셨다.

"자.24송이!만삼천원 되겠심다~"

"매번 고마워요 아저씨. 내년엔 다시 올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핫 그래.오면 오는거고 아직 젊으니깐, 내년에도 봤으면 좋겠구만!"

"노력해 볼께요.기차시간때문에 이만 가보겠습니다.정말 감사해요."

"그래 또 오라구~"

아저씨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신다. 내가 만삼천원을 주고 구입한 이건은 꽃이다. 이꽃의 이름은 목화꽃이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기 때문에 이렇게 구입하게 되었다. 기차에서 아침겸 점심을 해결해야할 상황인 나에겐 역시 열차안을 돌아다니며 파는 도시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위생상 좋지 않다는 말도 많긴 하지만 이럴떄가 아니면 맛볼수 없기때문에 매뉴는 도시락으로 결정했다.

'남은건..기차에 타는것 뿐이네'

기차를 타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있으면 그녀를 만날수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인지라 하고싶은 말이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막상만나면 잘 할수 없다는걸 2년전에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품지 않기로 했다. 기차에 탑승하자 운좋게도 도시락 아저씨는 내 근처를 맴돌고 계셨다. 도시락을 보자 배가고프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배를 한손으로 어루만져 달래며 도시락을 구입했다.

"냠냠.."

도시락을 먹으며 기차는 출발하기 시작했다. 밖의 날씨는 쾌창했다. 바람도 약하게 부는 것 같았고, 아직 도심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서인지 큰 건물이 나에게 그늘을 만들어주어 어느곳을 봐도 햇빛으로 인한 시야미확보는 되지않았다. 한시라도 조용할 세가 없는 이 서울을 벗어나 그녀를 만나러 간다. 창 밖의 볼품없는 경치를 보며 배부름에 만족한 나의 배는 내 머릿속에 잠 이라는 단어를 쑤셔넣는다. 나의 눈은 조용히 그리고 살포시 감기며 그녀의 모습이 또다시 내 앞에 자리잡는다..



저녁 8시 50분.

난 집앞에 그녀가 준 티를 입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빌라였는데 3층까지 있는 건물로 난 2층 202호에 살고 있었다. 핸드폰의 시계를 계속 들여다 보며 '그녀가 정말 올까?' 라는 생각과 함께 내 마음은 설레이고 있었다.

5분쯤 지났을까? 담 옆으로 누군가 얼굴만 빼꼼히 내미는 것이 나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난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녀라는 확신을 하고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운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기대감으로 부풀어있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모든신경을 그녀의 모습에 쏟아붓고 있었다.

내가 사는 집 앞은 주택인데 그곳 대문 너머엔 개가 한마리 목줄에 매여 살고 있었다. 난 그녀석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 개의 이름은 '개X끼'였다. 개X끼가 무슨 뜻인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이런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이녀석은 낮선사람이든 주인이든 가리지않고 보는사람마다 짖어대는 너무나도 좋은 버릇을 가지고 있기때문이다.몇일 전에는 주인이 밥을주러 나왔다가 이녀석이 주인의 옷을 물어 뜯는바람에 주인아저씨께서 로우킥을 날리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난 이녀석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름을 붙여주고 난 후로는 난 집에 들어갈때마다 나에게 반갑다고 짖어대는 이녀석에게 항상 "이 개X끼야!"라고 한마디 인사를 건네주며 집에 들어가곤 하였었다. 녀석은 내가 붙여준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더욱 크게 짖어대곤 하였다.

"저.."

대문너머의 녀석을 신경쓰다가 그녀가 무슨말을 하려고 하자 난 내가 생각해도 정말 꼴불견일 정도로 행동을 했다.

"네.네?!네네!"(응.뭐?!다시말해줘!)

말까지 더듬어 가며 우스꽝스런 모습을 그녀에게 선사하였다. 그런 내가 웃긴지 그녀는 피식하고 한번 웃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결혼하자."

.

.

.

.

.

순간나는 아주 많은 생각을 했던것 같다. 아마도 그때 무슨생각을 했는지 기억나는게 있다면 '얘가 미쳤나?'라는 것 정도일 것이다. 난 눈알이 계란노른자만하게 커져서 이렇게 대답했었다.

"네?네..네??"(응?그래..엥??")

정말 바보같은 행동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런내가 정말 웃겼는지 그제서야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꽤나 예뻣다. 내가 그녀에게 단 하루만에 관심을 가지게되어 예쁘게 들린건지 원래 목소리가 예쁜건진 나중이 되어서야 알게되었지만 그순간만큼은 정말 예뻣다. 그렇게 그녀가 웃자 낫선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개X끼가 야밤에 미친듯이 짓어대기 시작했다.

"하하왈왈왈왈왈하하왈왈왈왈왈왈왈하왈왈왈왈왈왈하왈왈왈왈왈왈!!!!!!!"

내 평생 가장 후회하는 일이 딱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저녀석의 이름을 개X끼로 지어준 것이고, 두번째는 군대를 자동연기 하지않고 21살에 갔다는 것인데 첫번째 후회의 이유는 이렇다.

그녀는 웃고 옆에선 짓어대는데 난 바짝긴장한채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고, 내 귀는 개X끼의 익숙하고 커다란 소리가 그녀의 웃음소리를 밀어내고 내 귓속으로 비집고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난 그때 시야를 돌리지 않고 혼잣말로 얼굴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했을것이다.

"아 개새끼.."

그녀의 웃음은 멈춰버렸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무표정한 얼굴로 내 얼굴을 아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난 그때 어떻게든 그녀에게 사과를 하던 오해를 풀던 했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가로등에 비춘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던 것이었다.

커다란 눈, 오똑한 코, 달콤한게 반짝이는 입술, 기초화장을 했는지 안했는지 잘은모르지만 살짝 붉은 볼과 깨끗한 피부의 그녀가 너무나도 예뻐보여서 뒤로 고꾸라질 뻔 했다. 이런 생각은 참 길었지만 내머릿속엔 이 긴 생각이 다 3초만에 다 이루어졌었다. 그 뒤 난 정신을 차리고 변명을 하기위해 개X끼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확 째려보고는 뒤도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그 모습이 꼭 내옷에 그림을 그려준 직후 도망가던 그때의 모습과 닮아보였다..

그날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평소 10시에 잠을 자는 나였지만 그날은 새벽 12시에도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껴안고 "이런 등신등신등신!"이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난 그녀의 집과 연락처도 모르는지라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방법이 있다면 학교에 일찍가서 그녀가 등교하기만을 기다리는 방법 뿐인데 그랬다가는 이미 늦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있을때 나의 핸드폰에 문자메세지가 날아왔다. 문자메세지가 날아오듯이 나역시 침대에서 핸드폰이 있는 내방 문 옆까지 단숨에 날아가 핸드폰을 잡았다. 덕분에 양쪽 팔꿈치에 죽음의 고통을 내게 주었지만 1초가 다급한 나에겐 그건 뒤의 문제였다. 문자의 내용은 이러했다.

"니가 더 개새끼야!"

.

.

.

.

.

난 이렇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내가 이 사건의 발단을 만들지 않았다면 집에들어오기전에 알게되었을 테지만 이렇게 내 마음을 위로하기로 했다. 난 그녀에게 모든 것을 거짓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내 표현력이 부족해서인지 문자를 한번에 3통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답장이 없었고 난 뜬눈으로 새벽을 보내야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내게 같은반 누군가가와서 날 깨웠다.

"야 누가 너 앞으로좀 나오라고 하더라"

"누군데..?"

"몰라 여자던데?"

라는 말과 동시에 이미 나는 교실 밖에 나가있었다. 물론 마음만;;

눈을 번쩍뜨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보니 그녀가 찾아와있었다. 난 뻘개진 눈으로 그녀앞에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걸어오자 곁눈으로 살짝 쳐다보고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난 다가가서 부랴부랴 어제일을 설명해대며 새벽에 문자를 보냈었다는 둥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이런말을 했다.

"아 그거 우리아빠 핸드폰으로 문자 보낸거였거든? 우리 아빠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말이 왠 미친X이 자기한테 이상한 문자를 보냈다고 하더라~"

라고하며 약올리듯 웃는 그녀가 참..귀여웠다.

난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넋놓고 쳐다보고 있자 그녀가 웃음을 멈추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오늘로 사귄지 2일째인거 알지?"

라고 하며 또다시 가버리는 그녀..난 이제 항상 가버리는 그녀에게 익숙해져 있던 상태였기에 당황하지않고 자연스레 그녀를 쫒아 달려갔다. 달려가서 그녀의 앞에 멈춰서서 말했다.

"아니 맨날 이렇게 가버리면..이름이라도 알려줘야지.."

라고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자기'라고 부르면 안되?"

라고 하고는 다시 가버렸다. 그때 난 두가지 생각을 하느라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하나는 이 여자가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을 가졌다는 걸 알게되었다는 것과 두번째는 앞으로 정말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행복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오늘은 그녀와 첫 데이트가 있는날. 때빼고 광내가며 한껏 멋을 부려보기도 하고, 괜시리 변할리 없는 얼굴을 계속해서 거울을 통해 쳐다보곤 한다. 평소같으면 부담없이 입었던 옷들이 오늘은 왠지 후줄근 하게 느껴지는건 왜일까.

여차저차 준비를 끝마치고 약속장소로 출발한다. 역시 나도 남자이기에 약속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가 있는게 매너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다. 즐거운지 떨리는지 나도모를 기분으로 집앞 개X끼에게 아침인사를 건네며 약속장소로 향한다. 햇빛은 눈이부시도록 밝고 하늘엔 구름이 천천히 떠다닌다. 바람은 내 옷을 파고들어 몸 곳곳을 시원하게 해주며 머릿속엔 그녀와 오늘 하룻동안 하고싶은 일들을 떠올려 보곤 한다.
약속장소에 10분 일찍 도착한 나는 주변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감상하며 그녀를 기다렸다. 먼저 도착한 것은 나였지만 날 먼저 발견한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나에게 하루하루 놀라움을 주었다. 오늘의 등장 역시 그러했다.
"안녕!"
이라는 힘찬 인삿말과 동시에 내 엉덩이에 전해지는 충격. 길거리 한복판에서 여자가 남자의 엉덩이를 힘껏 손으로 팡팡 거리며 친다는건 나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뭐..다른남자들도 똑같겠지만.
"어엇!"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역시 그날밤 날 첫눈에 반하게했던 모습의 그녀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뭘 그리 놀래고그래~?"
라고 말하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그녀...말이 필요없었다. 나 역시도 그녀를 놀래켜 주기위해 곧바로 그녀의 손을 가로채듯이 잡고 거리를 걷기 시작하였다.
"우리 오늘 뭐할까?"
나의 이런 모습에 그녀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당연히 이런상황이 연출 될 것이라는걸 알고있었다는 듯한 행동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워질 뻔 했다.
"그런건 남자가 알아서 해야하는거 아니야?"

나에겐 약점이 딱 두가지가 있다. 적어도 내생각이지만..첫번째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무서워 하는것이 '풍선'이라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남자니깐' 이라는 말을 들먹이며 행동하는 것 이었다. 잘생각해보면 내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넌 남자니깐 이정도는 해줘야지","남자가 이정도도 못해?" 등등 레이디 퍼스트 라는 지금 사회에 저 말은 나에겐 정말 충격적인 말이다. 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연약한 남자도 있는 법이고, 모든 남자가 다 한결같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때로는 여자가 먼저 리드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거늘 오늘의 그녀는 나의 약점 한가지를 자극하였다. 그렇다. 난 대다수 사람들이 말하는 바로그 소심한 A형 혈액형을 가진 대한민국 남자다. 그래서인지 난 우유부단하고, 두가지중 한가지를 고를때에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하게된다. 그래서 같이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에게 맡겨버리고 정한일에 대충 적응해 나가는 그런 성격이었다.

그 뒤로는 뭐 뻔한 스토리였다. 내가 뭘 먼저 하자고 말도 못해보고 그녀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다녀야만 했다. 나로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쫒아 다니는 것도 아니고 같이 서서 걷는 것도 아닌 그녀의 손에 잡혀 말그대로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웃음꺼리를 선사해 주었다. 그녀는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나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3개월간 나를 관찰한 그녀가 참으로 고마웠다.




"덜컹덜컹..덜컹덜컹"
기차가 터널로 들어가자 소음이 높아졌는지 잠에서 깨어났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들여다 보자 시간은 아직 오전 10시21분 밖에 되어있지 않았다.
'두어시간은 더 가야하는데..너무 일찍 깨어버렸네.'
다시 한번 잠을 청해볼까 했지만 그랬다간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 덜컹거리는 기차가 나의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창문과 박치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그랬다간 나의 머리카락이 멋드러지게 눌려버릴것 같았다. 더이상 자는 것을 포기하고 나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창밖 풍경을 보니 도심을 벗어나 넓은 들판과 논 밭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꿈을 꾸어서 그런지 벌써부터 얼굴이 보고싶어져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갑을 꺼낸다. 지갑엔 그녀의 사진이 들어있었는데 이 사진은 한참 정신없이 연예를 하던 시절, 그녀가 나에게 선물해준 하나밖에 없는 사진이었다. 사진의 그녀는 날 바라보며 정말 너무나도 행복하게 웃고있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며 겨울까지 다가왔다. 그동안 우리는 단 한번도 다투지 않고 너무나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라도 그녀를 못 본다면 잠이 오지 않았고 그녀 또한 그랬는지 데이트비용이 다 떨어져도 우린 집이 가깝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집 중간거리에서 만나 잠시 이야기라도 나누고 헤어지곤 하였다. 나의 그녀를 난 친구들에게 소개하지 않고 그녀도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지 않았었다. 그녀와 내가 사귄다는 것은 둘만이 아는 사실이었고, 우리역시 그러길 원했었다. 내가 그러했던 이유는 소심한 성격으로 '혹시라도 친구에게 그녀를 뺏길까봐' 라는 바보같은 생각 때문이었고, 그녀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와 보낸 나날들을 이곳에 모두 말하자니 장편 소설이 될 것 같아 그만두겠다.
어느 다른 연인들 보다 더욱더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만을 지내던 우리에게도 피할 수 없는 시련이 다가왔다.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돌아 올때쯤 문득 우리집 우편함에 꽂혀있는 편지가 한장 있었다. 대한민국 남자들을 벌벌떨게만드는 그 녀석이 나에게 날아온 것 이었다. 이것은 바로 영장. 나를 군대라는 곳으로 끌고갈 저승사자였다. 그 후로 난 학교를 휴학하고 그녀와 보낼 시간들을 1분1초라도 더욱 많이 만들고 싶었다.

5월 24일. 군대라는 문턱을 넘어가기 하루 전 날, 그리고 우리가 사쉬게 된지 1년이 되는 그날, 나는 그녀와 마지막 술자리에서 그다지 많은 예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색한 침묵만이 흐를뿐..그녀가 날 기다려 줄 거란 보장같은 것 따위는 있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난 그녀에게 먼저 말을건냈다.
"하나 물어볼게 있어.."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날 처음본건 OT때 였는데 왜 그때부터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알고싶어."
난 1년동안 그녀에게 이 말을 세번정도 물어보았었다. 처음엔 사귄지 얼마 되지 않았을때였는데 그때는 "알아서 생각해" 라는 어이없는 답변을 듣게 되었고, 두번째로 물어본건 작년 크리스마스 쯤이었다. 그때 그녀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으며 서있었는데 잠시 후 눈을 뜨고 하는소리가 "지금 마음속으로 기도했으니깐 알아맞춰봐" 라는 역시나 어이없는 답변이었다. 그리고 세번째는 바로 오늘이 었는데 오늘은 명확한 답을 들을수 있을거란 생각을 했다.
"...."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귀찮아 할 것 같아 여태껏 때를 쓰거나 하진 않았지만 오늘은 한번더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듣고싶어..말해줘."
그러자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100일 휴가나오면...그땐 꼭 말해줄께."
난 더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그땐 꼭 들을 수 있도록 그녀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 후 우린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 다가올 때인지라 5월의 밤에도 아직 후덥지근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었다. 난 그녀를 집앞까지 바래다 주기로 하였다. 좁은 골목을 지나 10여분정도 걸어 그녀의 집앞에 도착하기까지 우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잡고있던 손을 아주 꼬옥 잡고있을 뿐,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그녀를 집앞에 두고 말없이 돌아서는 내게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같이가자."
난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자리에 서서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짧은 한마디를 내뱉고 난 집으로 걸어갔다. 1년간 그녀와 지냈던 행복한 나날들이 이제 나에겐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던중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삐 뛰는 발소리는 점점 나에게 다가와 가까워졌을때 그녀의 팔이 뒤에서 부터 나를 와락 안았다.
"우리.....오늘밤은 같이있자..."
나를 끌어안은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역은 XX입니다. 이번역은 XX...."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선 눈물이 한방울 주르륵 하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너무 궁상떨었나."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기차에서 내렸다. 아직도 갈길이 멀기 때문에 부지런히 걸어주어야 할 내 다리를 두세번 토닥여준다.
시간은 12시 15분. 기차에서 먹은 도시락으로 아침겸 점심을 해결하였기 때문에 점심먹을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직원에게 표를 건넨 후 밖으로 나와 버스정류장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곳은 대부분이 산이라 그런지 마을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번화가 라고 해봐야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인데 그다지 먹거리나 볼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었다. 교통편도 그다지 좋은편은 아니어서 운이 없을땐 원하는 버스가 30여분을 기다려도 오지않을때가 종종 있는 그런 곳이었다. 운좋게도 5분정도 지나자 원하는 버스가 도착하고 난 버스에 올라탔다. 역시나 가장 좋아하는 뒷자리엔 이미 다른사람이 앉아있어서 창가쪽 아무곳에나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조금 있으면 그녀를 만나게 될텐데 왠지 내 마음은 설레임 보다는 그리움이 앞서 있었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위해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한결 달래주는 것 같았다.
"곧 갈께...조금만 기다려."

창밖의 경치, 낮선 사람들, 나와같은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들.. 모든 것이 내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단하나..
잠시후면 이별을 해야할 나의 그녀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체우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이든건지 아니면 잠들지 않고 눈을 감고만 있는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어색하게 짧아져 버린 내 머리와 이제는 마음데로 볼 수 없게 될 그녀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자꾸 슬픔이라는 녀석이 자리잡으려 한다. 이제 앞으로 몇시간 후면 그녀는 나와 길고도 짧은, 짧고도 긴 이별을 해야한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안에 내가 그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곤 이별하는 순간엔 웃는 모습으로 그녀를 걱정시키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잠시 후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와 같은 사유로 인해 이곳에 온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정해진 시간까진 약 1시간 정도가 남아있었지만 우리는 미리 연병장에 가있기로 했다.
연병장은 보통 학교들의 운동장을 연상시켰다. 주변엔 울타리가 쳐 있었고,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윤형철조망이 걸려있었다. 사람이 멀쩡히 살아가는 곳이라지만 내 기분은 사람을 감금시켜놓고 혹사시키는 곳이 아닐까 라는 예상을 해보았다. 그럴수록 그녀에게 더더욱 걱정을 끼치지 말아야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난 그녀 앞에서 절대 슬프다거나 괴로운 표정은 짓지 않았다.
"걱정마. 누구나 다 하는건데 나라고 별일 있겠어?"
아무말없이 내손을 꼬옥 붙잡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 무슨생각을 하는지 평소의 그녀답지않았다. 난 그런 그녀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까지 놓치지않고 머릿속에 꼭꼭 세겨두었다.

잠시 후, 입영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연병장 가운데로 발을 옮겼다. 그와중엔 남자친구를 떠나보내 울고있는 여자도 보였고, 친구를 격려하는 사람, 아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건네는 부모님 등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난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잘 다녀와..아프지말고...하루한번씩 편지쓸께"
이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싶진 않았다. '응'이라는 한마디만 남긴 채 나의 뒷모습을 보여준다는게 기분만 우울하게 만들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나 무지무지 기대하고있을꺼야.하늘에 맹세할수 있어?"
나는 잘 지어지지도 않는 어정쩡한 웃음과 바디랭귀지, 바보같은 목소리로 그녀의 기분을 안심시켜주려했다.
"약속할께!"
그녀는 오버하듯 고개를 위아래로 힘차게 끄덕이며 약속을 하였다.
"그럼 내가 100일휴가나올때, 받은 편지만큼 뽀뽀해줄께."
이런 맨트정도면 그녀의 기분에 덮여있는 어둠을 조금이나마 걷히게 할수 있었을까.그녀가 내게 다시 말했다.
"...부지런히 써야겠네."
그런 말을 하던 그녀는 웃고있었다. 억지로 웃음짓는 것도 아니었고, 그 순간만큼은 평소의 우리 모습이었다. 난 그런 그녀를 와락 껴안은체 아직까지 한번도 해주지 못했던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사랑한다'는말. 이말을 해주고 싶었던 때는 너무나도 많이 있었다. 하루에도 수 차례씩 하고 싶었던 이말은 그녀가 도저히 나에게 말을꺼낼 타이밍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참고 아껴가며 오늘에서야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녀를 안은체 말을 하려던 순간..
'팡!팡'
내 엉덩이에 전해지는 감촉. 내 엉덩이를 두드리는 그녀. 순간 난 할말을 잊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내품에서 나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잘 다녀와요 군인아저씨! 첫 휴가때는 단 한시도 떨어져있지 않을꺼야."
라는 말을 남기고 나보다 먼저 돌아서는 그녀였다. 그녀의 얼굴에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언제나 처럼 도도한 모습. 그녀도 내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게 싫었는지 그녀의 방식대로 날 위하여 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늘 느껴왔던 것 이지만 그녀는 알다가도 모를 행동을 참 많이하는편이다. 손에 잡히려 하면 어느새 멀어져가는...그런느낌이랄까? 그녀를 안심시켜주려던 내가 반대로 안심받아 버렸으니 내 얼굴엔 피식 하고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더욱 멀어지기도 전에 난 내가 가야할 곳으로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입소대에 들어와 군복을 받고 여러가지 군생활에 대한 교육과 근무로 3일을 보내고 5일동안은 잡초를 뽑아야 했다. 입소대로는 사회에서 편지를 보내봤자 대기 기간이 짧아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훈련소를 배치받으면 그때서야 다들 편지를 쓰곤한다. 내가 가게 된곳은 논산훈련소 30연대 4대대 12중대 2소대 2분대였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에 빈자리를 만들지 않았고, 다들 잠들어 있을 깊은 밤, 손전등을 키고 모포를 뒤집어 쓴 후 난 그녀에게 보낼 편지를 후다닥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배치받은 부대의 주소를 알려줘야 그녀가 나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난 하루라도 빨리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고싶을 땐 지갑을 들고 늦은밤 화장실에 들어가 지갑 속 그녀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꿈에서라도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주길 바랬지만 그런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에대한 그리움은 더욱 더 커져만 갈 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나흘...일주일이 되었던 그때, 그때까지도 그녀에겐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내가보낸 편지의 발송이 늦어져 그런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그 한주는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또 일주일이 지나자 같은 내무실에 있는 동기들 여럿에겐 벌써부터 편지가 몇십통씩 날아오는 걸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집에서 부모님께 온 편지를 제외하고 그녀의 편지는 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난 아마 불안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3주가 지나고 4주가 지나도 그녀에게선 편지가 오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도 힘든 훈련소 생활이었지만, 그녀의 편지가 없다는 것이 나에겐 훈련소 생활보다 수없이 많은 고통을 주었다. 6주가 지나고 나와 동기들은 훈련소를 퇴소할 때가 되었다. 그때까지 난 그녀의 편지를 받지 못하였고 내 머릿속엔 점점 불안과 의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후반기 교육이라고 하여 4주동안 전라남도 광주 상무대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역시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가장중요한것은 그곳에선 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와 같은 심정의 사람들이 많았기에 전화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엔 항상 사람이 줄을 지어 서있어야했고, 내 차례가 왔을때 난 부모님 보다도 가장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이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번호를 까먹을 내가 아니었고, 다시 몇차례 걸어보아도 없는 번호라는 말을 친절한 아가씨께서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녀의 집엔 집전화가 있었지만 그녀는 외동딸이라 낮시간엔 가족을이 일을 나가고 저녁 늦게나 들어와 전화를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녀의 부모님 전화번호는 내 머리가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할수 없이 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께 안부를 여쭙고 씁쓸해진 마음으로 내무실로 돌아간다. 이곳에서도 편지를 여러장 보냈지만 그녀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4주가 지나가고 난 자대배치를 받기위해 강원도로 가야했다...

내가 자대배치를 받은곳은 강원도 고성에있는 22사단 공병1중대 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영외중대라고하여 외진곳에 따로 떨어져 있는 부대였는데, 외지와의 연락이 드물고 인적없는 곳에 있는지라 탈영을 한다해도 얼마안가 잡히기 딱 좋은 그런 곳이었다. 난 그곳에서도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제는 내 맘속에 그녀가 날 버리고 다른사람과 행복해하고 있을 모습이 떠오르며 난 그 분노를 참지 못하였다. 그녀 생각에 고참들의 말에도 잘 신경을 못썼던 나는 매일 갈굼을 당하기 일쑤였다. 들어보지도 못했던 환상적인 욕설과 구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날로 정도가 심해져갔다. 그런 고통과 내 머릿속을 가득체워버린 그녀는 나에게 정상적인 사람이길 포기하게 될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참아낼 수 있던것은 100일휴가 라는 녀석이 얼마 안되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훈련소와 입소대에서 80일 가량을 보낸 나에겐 자대배치후 1개월 뒤 100일 휴가를 나갈 수 있던 것이다. 난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녀의 사진을 이젠 지갑속이 아닌 앞주머니에 항상 간직하며 생활하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가며 '이제는 그녀가 날 완전하게 떠나버린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해도 단지 '만나야만한다' 라는 생각만으로 참고 견뎌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100휴가를 나가기 바로전날,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편지가 왔다. 아니, 내가 기다린 것은 그녀의 편지였지만 그 편지는 그녀의 아버지가 쓴 편지였다. 난 편지를 들고 아무도 없는 야외 화장실로가 급히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그녀의 아버지가쓴 이 편지는 이걸로 3번째 편지라고 한다. 첫째와 둘째는 내가 훈련소에 있을때, 그리고 후반기 교육을 받으러 상무대에 있을 때인데 아버지께서 편지를 늦게 보내셔서 반송이 되엇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가장 원하던 그녀의 이야기는 편지라는 종이위에 글씨만으로 표현하면 안될 것 같아 나중에 집으로 찾아오게되면 말씀해주겠다는 내용이었고 그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심장이 뛴다. 심박수는 지금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그녀와 처음으로 밤을 지새웠던 그날 밤보다도 더욱 내 가슴속의 불안감이 나의 모든것을 덮어버리려 하고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었다는건 이미 알고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선 잘못된 방향이 다르다고 비명을 질러대고있었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일이 생긴거라면 난 내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단 한번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녀의 불행. 나는 모든것을 그녀가 날 피하는 것 만으로 간주하였었다. 때문에 이런 내 자신이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녀를 믿지 못하고 원망했던 내 자신을 증오하고 멸시하며 내눈엔 눈물이 아른거렸다. 단 한번도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던 그녀...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또 얼마나 원망했던가... 얼마만큼이나 당신을 사랑했었던가...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하면서 난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고 마음을 비우기로했다. 벌써부터 안좋은 쪽으로 단정짓는다는 것은 요 100일간 허튼생각을 해가며 바보같은 짓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내 눈으로 진실을 보게 되기 전까지는 그저 아무 생각도 않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잊기 위해 그날은 미친듯이 작업에 열중하였다. 평소와 다르게 너무나도 열심히 해서인지 아니면 머릿속을 비우는데에 성공을 해서인지 그날은 꽤나 일찍 잠들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휴가의 날 아침이 밝아왔다...





버스에서 내려 크게 기지개를 편 후 주변 경치를 둘러본다. 오랜만에 와보는 이곳, 주변은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쌓여있어 아주 먼 곳 까지의 경치는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한시가 다 되어가고 해는 머리위에 똑바로 뜬 체 이제 완전히 여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열을 내뿜고 있었다. 산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눈앞엔 모기가 나에게 무료헌혈을 강요하고있다. 그런 모기들에게 나는 관대한 사람인마냥 내얼굴에 키스를 하던말던 그녀를 만나기위해 발을 내딛는다.
길가의 옆에 보이는 개울은 밤이되면 개구리가 미친듯이 울어대는 개울이 있다. 아마 한밤중에 사람이 큰소리로 비명을 질러도 개구리 울음소리에 파묻혀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듣지못할 정도로 이곳 개울엔 개구리가 많이 서식하고있다. 그런 개울에 한 꼬마여자아이가 들어가 물장난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난 그자리에 서서 그아이를 보고있자 잠시 후, 그아이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나를향해 달려왔다.
"오빠~정말로왔네??"
이 아이는 내가 작년에 이곳에 왔을때 만났던 아이인데 이곳 지리를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아저씨" 라는 명칭과 함께 친절히 길안내를 해주었던 아이였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내가 불량식품과 과자몇개를 쥐어줬었는데 그때부터 날 "오빠"라고 부르며 다음에 만나게되면 또다시 맛있는 과자를 사주기로 약속했던 아이였다.
"예쁜 꼬맹이 또만났네?"
"나 꼬맹이 아니라니깐!"
꽤나 성깔있는 이 아이는 그 작은키에 손을 번쩍 들어서 날 마구 때린다.
"그래그래 오빠가 잘못했어.그만그만!"
그제서야 폭력을 멈춤 아이는 뾰로퉁한 표정에서 무언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헤에..오빠.나랑 약속한거 안잊어버렸지?헤헤"
"당연.안잊어버렸지.너두 오빠랑 했던 약속 기억하고있지?"
"헤헤.응.그래서~무지무지~많이 생각해봤는데~."
무엇인가를 생각하듯 입을다물고 시선은 위쪽 좌 우 여러곳을 번갈아 보며 '흐음~'하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건 바보같은 짓이라 생각해."
라고 말하며 아이는 내 손을잡고 근처 슈퍼마켓으로 날 질질끌고간다. 난 아이를 데리고 슈퍼에 들어가 먹고싶은 과자를 한 껏 고르게 한뒤 갈증이 나는 목을 적시기 위해 물과 여러가지 물품을 구입한 후 두개의 비닐봉지에 아이것과 내것을 따로 집어넣었다. 꼬마아이는 너무너무 좋은지 계산도 하기전에 집어넣은 봉지에서 곧바로 과자 한개를 꺼내어 포장을 뜯고 마구 입에다가 집어넣는다. 왠지 저 아이의 부모님은 군것질을 시키지 않는 부모님인데 내가 나쁜버릇을 들게 하는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 어찌되었든 한손엔 꽃, 한손엔 비닐봉지를 들고 슈퍼에서나와 꼬마아이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이제 오빠 혼자서도 갈 수 있으니깐, 여기서 헤어지자."
키높이를 맞추려고 무릎을 굽혀 꼬마아이에게 말하자 입속으로 과자를 밀어넣던 손을 멈추고 날 쳐다본다.
"오빠 그럼 다음에도 또 오는거야?"
라고 말하는 꼬마아이. 이아이는 날 만나는 것보다 과자를 제공해 주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슬픔이 아직어린 꼬마에겐 더욱 클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깊지않고 감정에 솔직한 아이들에겐 나도 솔직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오게된다는 약속은 못하지만 오지 않는다는 약속도 하지 않을께."
"그럼 다음에도 또 와라.응? 꼭와야해 꼭. 이쁜언니 혼자두면 심심하자나~"
"그래..그건그렇지만..."
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던 꼬마아이는 무언가 생각하더니 갑자기 내 엉덩이를 팡!하고 때리고는 '메롱~'이라고 혓바닥을 내밀며 나와는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알았어 오빠~.약속은 안할테니깐 다음에 나 과자 사주러 또 와야해?"
라고 하며 꼬마아이는 휙 돌아서서 걸어가며 좀전에 먹던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난 그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한번 고른뒤 꼬마아이를 불렀다.
"꼬맹아!"
"응?"
화를 낼 줄 알았던 아이는 그냥 제자리에 서서 날 돌아보고 있었다.
"그래. 확실히 그건 바보짓인것 같아.고마워!"
그말에 꼬마아이는 다시한번 "메롱~" 이라고 하며 다시 갈길을 나아갔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쉰 후 이제 얼마남지 않은 그녀와의 재회를 앞두고 예전에 왔던 그 길을 머리속에 그려본다. 그다지 복잡한 길은 아니기에 머릿속에 그때의 길이 단번에 떠올랐다. 비닐봉지에서 아까 구입한 물을 꺼내 한모금 마신 뒤 난 다시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한걸음 한검음..가벼워야 할 발걸음이 나에겐 그렇지 못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빨리 재촉하여본다. 5월의 끝이 다가오는...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오는... 한번 죽었던 내 인생이 새롭게 태어날 오늘...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뚜벅 뚜벅 발걸음을 옮긴다...


'타박타박..'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리 상쾌한 것만은 아니다. 봄이 끝나갈 무렵이라 벌래도 많고 어제 저녁 기껏 광을 낸 구두가 흙먼지에 덮여 더러워지기도 한다. 연이여 계속 반복되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또한 나의 체력을 뺏어가기엔 충분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자니 문득 군대시절 생각이 난다.

군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뒷 산으로 훈련을 나갈 때에면 고참들이 구석진 곳으로 날 끌고가 끝없는 갈굼과 구타를 난발했었다. 생명의 위협도 여러번 느낄정도로 나에겐 참으로 잊지못할 일이다. 그때당시엔 갈굼이나 구타에 대한 두려운 생각은 없었다. 그저 막연히 구타와 욕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공포라는 것은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서워서라도 군생활을 더욱 잘 적응해 나아간다던가 또는 소원수리 라는 방법을 사용했을법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는게 없었던 나는 고참이나 후임에게 대접받지 못한 그런 병사였던 것이다.

"후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그녀가 있는곳에 도착했다. 언덕길을 올라오느라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발 한발...그녀에게 다가갈수록 마음은 무거워져만 간다.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죄책감과 두려움이 이제서야 밀려오기 시작한다.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매워져간다. 얼굴은 복잡한 표정으로 일그러져간다. 눈은 또렷하게 한 곳 만을 바라본다. 그녀가 있는곳. 그녀가 잠들어 있는곳. 이제는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차가운 땅속에 갇혀있는 그녀에게 나는 다가간다.

"잘..지냈니?"
그녀의 무덤앞에 멈춰서서 난 인사를 건낸다.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다. 내 인사를 반겨주는 것인지 쌀쌀맞게 외면하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지만 난 그저 내 할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현제 살아가는 내 모습과 여러가지 이야기들. 그녀의 부모님은 건강하시다는 것과 돌아가는 세상이야기. 쓸데없는 자잘한 이야기 부터 시작해서 온갖 잡다한 이야기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들이 내 입에서 술술 나온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살짝 미소를 짓기도하고, 좋지 않은 기억의 이야기를 할때엔 슬픈 표정도 지어가며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무덤에 준비해온 꽃과 비닐봉지에서 소주를 꺼내어 그녀의 앞에 내려놓는다.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고 그녀의 앞에 건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작년에도 올해도 항상 이런 식으로 그녀와의 대면을 하게된다.

"잘 지냈는지 모르겠구나. 혹시 많이 기다렸니? 기다려줬다면 정말 고마워..아니라면 할 수 없지만. 이제 슬슬 여름이 다가와서 그런지 날씨가 많이 더워지는구나. 산에는 네가 싫어하는 벌레도 많은데 참 힘들꺼같네. 그러고보니 일주일전 우리집앞 개x끼가 새끼를 다섯마리나 낳았지뭐야? 난 그녀석이 암컷인줄 몰랐는데 말이야 하핫. 헌데 어느집 개랑 눈이 맞은건진 모르겠는데 새끼들은 전부 털색깔도 알록달록이고 이건 완전 똥개야똥개 하하. 그래도 새끼들이라 그런지 보기보단 귀엽더라.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마리 훔쳐서 데리고 오도록 할께. 밤엔 많이 춥지않니? 그래도 서울에서 떨어진 곳이라 공기도 좋고 밤엔 별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겠구나. 네가 서울에선 하늘이 흐려 별이 안보인다고 투정거리던거 기억나니? 여름에 바닷가에 놀러갔을때 내가 자고있는 틈을 타 내 등짝에 북두칠성을 그려놓고 '이제 평생 볼 수 있겠어!' 라고하던 네 모습이 아직도 내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구나. 밤에는 불꽃놀이를 하다가 피리탄 조준을 잘못하여 옆 텐트안에서 폭발하는 대형사고도 있었고...정말...재미있었는데....이젠....."

잠시 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
난 주머니에 손을넣어 지갑을 꺼낸 후 지갑에서 그녀의 사진을 꺼내어 그녀가 잠들어있는 묘 앞에 세워놓듯 내려놓았다. 그녀가 해맑게 웃고있는 사진. 사진을 보며 또다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휴가당일. 강원도 고성에 있는 간성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탄 후 동서울 터미널까지 3시간 40분을 이동하여 집에가기위해 지하철을 탔다. 기분같아서는 1초라도 빨리 그녀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마음이 급해봐야 손해라는 생각에 차분히 행동하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에 내려 버스로 갈아탄 후 집 근처 정류장에서 하차를 하였다. 정류장에서 집까지 가는길에 그녀의 집을 지나가게 되는데 난 일부러 그녀의 집을 빙 돌아서 내 집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집에 혼자있다면 난 이성을 잃고 차분한 대화를 하지 못할것이 분명하였기에 일부러 그녀의 집을 피해가는 것이고, 그녀가 집에 없다면 그녀의 부모님은 저녁늦게 들어오시니 괜히 들렸다가 상실감만 커질까봐 이런 결정을 내렸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께서 날 맞이해주셨다. 까맣게 탄 내 얼굴과 살이빠진 모습을 보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하지만 곧 이내 눈물을 소매자락으로 닦으신 후 점심을 차리시기 시작하셨다. 점심을 차려주시는 동안 나는 군복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흐트려져 정리되지 않은 내 머리에 얼음같이 차가운 물을 계속해서 뿌려댔다. 앞으로 그녀를 만나면 무엇부터 해야 할 지 머릿속에 하나하나 정리해보았다.
절대 화를 내어선 안된다.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보고 판단해야한다.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자세히 들어봐야한다.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등등...
머릿속엔 복잡한 생각들로 더욱더 가득 쌓여가기 시작했지만 이내 곧 정신을 차리고 주린 배부터 체우기로 결심한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정성스런 점심식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때 시간이 아마 오후 2시30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와의 집까지 거리는 약 10분정도 이지만 그날 만큼은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덕분에 머리를 쥐어짜며 걷다보니 곧 그녀의 집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고 조절이 되지 않는다. 초인종을 눌러야 할지 말아야할지 너무나도 간단하고 심각한 갈등이 날 머뭇거리게 한다. 그녀의 집앞에 멈춰서서 심호흡을 한 후 난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딱 하나,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기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도하며 난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아무 반응이 없었다.
"띵동~띵동~"
...혹시 그녀가 자고있는 것 이라면 깨워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

집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감정을 움츠리며 난 그녀의 집 대문앞에 쪼그리고 앉아버렸다. 그저 묵묵히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더운 여름이었지만 근처 그늘에 몸을 숨겼다가 아차하는 사이 그녀를 놓치기라도 할까봐 햇빛이 내리쬐는 그녀의 집 대문앞에서 묵묵히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두컴컴한 밤이 찾아오고 가로등 밑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춘다. 곧 가을이 다가오려 해서 그런지 여름의 밤인데도 저녁엔 반팔티 하나로 버티기엔 조금씩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 갈 때쯤, 쪼그려 앉아있던 내 앞에 누군가가 발길을 멈추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40대 후반의 아저씨께서 한손엔 열쇠를 손에쥐고 날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렇다.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녀는 끝내 오지 않고 그녀의 아버지께서 먼저 집에 도착하셨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아버지께 꾸벅 하고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십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날 보시더니 아무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곤 나를 지나쳐 대문을 열쇠로 따신 후 내게 말을 건네셨다.
"들어오게나."
난 말없이 그녀의 아버지 뒤를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께선 따라오라는듯 나에게 손짓을 하셨다. 그녀의 아버지를 따라 거실 쇼파에 앉았다. 그녀가 없는 집에 그녀의 아버지와 단 둘이 있다는 생각에 난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쥬스라도 한잔 마시겠나."
그녀의 아버지는 내 왼쪽에 따로 떨어져있는 1인용 쇼파에 몸을 기대어 앉으시며 나에게 말을 건네셨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그 한마디 이후 그녀의 아버지와 나는 아무 이야기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단시간의 침묵끝에 그녀의 아버지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내 딸아이의 소식..전해듣지 못한건가?"
"네 그렇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난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께선
"잠시만 기다려주게." 하고 말씀하시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잠시 후 그녀의 아버지께선 편지를 한장 가져오셨는데 그걸 나에게 건네주셨다. 그 편지의 겉에는 내가 훈련소에 있을 적 주소가 적혀있었으며, 우표옆에는 '반송'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맨 처음 편지를 보내주셨던 것인데 내가 훈련소를 퇴소한 후에 보내신거라 반송이 되었던 편지이다.
난 편지를 뜯어 편지지를 꺼낸 후 천천히 읽기 시작하였다.
'쿵쾅쿵쾅쿵쾅..'
심장의 요동이 멈춰주질 않는다. 너무나도 긴장한 탓인지 내 심장뛰는 소리가 내자신의 귀 바로옆에서 들리는 듯한 착각까지 하게된다. 글을 한줄한줄 읽어내려가며 마음속으로 다시한번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한둘..두줄...글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내 눈은 더욱더 크게 떠지며 어느순간,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눈은 편지지의 중간부분에 멈춰서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턱이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이고 이빨에서 '딱딱'소리를 내며 윗니와 아랫니가 부딫힌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고, 머릿속은 또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난 그녀의 아버지를 천천히 바라보며 말을 하려고 하였지만 내 입에선 하고싶은 말이 제데로 나오질 않았다.
"아..아아..그...."
내 모습을 보시던 아버지 께선 날 말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이..이말이..사.사실..이..입니.."
그녀의 아버지께서 한숨을 '후우..'하고 내쉰후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네. 모두 사실이지. 자네가 입대하던 그날 내 딸은 자네를 따라서 논산 훈련소에 갔었지. 자네를 보내고 난 후 내 딸은 혼자 그곳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영등포역에 내려 버스를 탔다네. 그래...버스를 탔지...자네는 입소대에 있을때일테니 밖의 소식은 들을수가 없었겠지. 뉴스조차 볼 수 없었을 테고 말이야. 그날 내 딸이 타고있던 버스는 사고가 났다네. 4중추돌 사고였지. 내 딸이 타고있던 버스앞에 큰 화물트럭이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버스가 뒤에서 들이받았고, 버스뒤에있던 또다른 화물트럭이 다시 버스의 뒤를 들이 받았지. 그 트럭의 뒤에있던 승용차도 미처 피하지 못해 트럭을 받았고. 그렇게 앞뒤로 충격을 받은 버스는 완전히 찌그러지고, 그안에 있던 내 딸을 포함한 승객과 운전기사 20여명은 대부분 그자리에서 사망했지. 물론 내 딸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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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1 ehdud1145 2009.07.19 5055 0
뒤주 여행.. lhilhi 2009.07.16 5037 0
고등학생 졸업 작품 시나리오 giseokv 2009.06.18 6173 0
제작 진행 중인 단편 [쓴 맛!]입니다. (현재 배우 모집 중~! 011-9098-9570 2 kh5217 2009.06.14 6100 0
늪(시놉) 고수님들의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2 djmini1977 2009.06.13 4350 0
단편 시나리오(치킨맨) 평가 부탁드립니다^^ 3 monored 2009.06.06 6495 0
밑에 글 이어서...(너무 길어서 조금 짤렸네요) 1 engum 2009.05.27 3000 0
단편소설 형식으로 써 본 자작이야기입니다.(상당히 길 수도..)평가 부탁드립니다. engum 2009.05.27 3486 0
드라마극본 공모 내려고 한 이야기.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조언 부탁드립니다. nomang 2009.05.26 398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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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끄적거린거...평가 부탁드려요 2 Plamengo7 2009.05.17 3472 0
처음 쓴 시나리오 입니다... 봐주세요~ ^^ 부탁 1 maus19 2009.05.04 3553 0
'반추' - 시나리오 smooth5531 2009.04.24 3764 0
시놉시스입니당 yjidol92 2009.04.23 3917 0
졸업작품시놉입니다..냉정한 평가 부탁드려요,, hj4858 2009.04.16 3960 0
안녕하세요. 작가 지망생입니다. 냉정한 평가 부탁드립니다.. 2 kcrcool 2009.04.14 3866 0
첫 단편 시나리오 2 como4853 2009.04.04 1061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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