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진 010.6893.7533
에덴
#1
제주도 서귀포 남쪽 바닷가에 차가운 바람이 파도를 일으켜 세우고 파도는 해안가 검은 돌들을 쓰다듬고 있다.
바닷가에 지은 지가 좀 오래되어 보이는 작은 슬라브 집에는 거실에서 저만치 파도가 치는게 보인다.
밖에 추운 날씨에 거실 큰 유리창에는 이슬이 맺혔다.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는 거실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린다.
쌀쌀한 날씨에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커피 머그잔을 옆에 두고 한 모금 건조한 입을 적신다.
노트북을 한참이나 두드리던 남자는 눈을 비비고는 창가에 서서 저만치에 바다를 바라본다.
얼굴은 갸름한데 다듬지 않은 머리가 조금 덮수룩 하다.
“후…….”
담배 한 개비 불을 붙이며 깊게 한번 숨을 내쉬어 보고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정민은 공항에서 비행기표를 들고 두리번 거리고 있다.
얼굴은 곱상한데 요새 젊은 친구들 답지않게 겉멋이 없는 그냥 편안한 옷차림이다.
정민은 한동안은 쓰던 소설을 한참이나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단편소설과 습작 몇 개나 썼던지.
최근 한참 쓰던 소설은 마치지 못했다.
소설가나 작가라고 자칭하기에는 너무나 어색했던 정민이다.
추워진 날씨가 소설 배경과 비슷해서인지 최근에는 글이 잘 써져서 이제 결말이 보이는 듯 했다.
정민은 자기가 쓴 글이 아닌듯 처음부터 되돌아보려한다.
늘 글을 쓰던 방이 아닌 새로운 곳에 가서 글을 다시 돌아보며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민은 안가본 곳에 가서 글을 써보려 한다.
한 시간이면 비행기로 갈 수 있는 제주도지만 정민은 가깝고도 멀게 느껴졌다.
특별히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것 같지 않다.
제주도에 굳이 갈 일도 없었다.
문득 제주도 바다를 보고 싶었다.
집에 혼자 계신 엄마가 마음에 걸렸지만 엄마는 그런 아들 마음을 아는지 먼저 다녀오라고 하신다.
“어디 가까운 곳 여행이라도 가보지 그러니. 머리도 식히고 바람도 좀 쐬구. 그러면 글도 더 잘 써지지 않을까?”
정민은 이번엔 한번 마음먹은 듯,
“제주도에 다녀올까 해요.”
“제주도?”
엄마는 어디 여행을 다니지도 않던 정민의 제주도 얘기에 의아한 듯 했다.
“제주도는 너무 멀지 않을까?”
본인도 평소 먼 곳에 가는걸 좋아하지 않던 엄마에게 제주도는 조금 멀게 느껴진 듯 했다.
“그냥 안 가본 곳에 가보고 싶어서요.”
건장한 청년이지만 곱상한 정민이가 엄마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태연한척 잘 다녀오라고 한다.
잠깐이지만 익숙지 않은 비행에 정민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아버린다.
비행 중 눈을 뜨자 구름 밑으로 바다가 보인다.
이번 소설 집필을 마치고 엄마에게 보여줄 생각과 제주도에 가는 설렘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소설을 내놓아서 독자들의 반응이야 어떻든 간에 이름있는 작가도 아니고 부담이 적어서 좋다.
제주 공항에서 관광안내소에 책자들을 이것저것 훑어본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제주도 햇볕이 서울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차갑지만 바람 냄새도 다른것 같다.
이게 제주도 냄새인가 싶다.
서울에서 멀리 남쪽으로 왔지만 정민은 더 남쪽 바다로 가고 싶다.
정민은 서귀포로 가는 버스에 올라 창밖을 구경한다.
#2
어디가나 사람사는 모습은 다 똑같은듯 싶다.
하지만 지금은 버스 안 사람들이나 창밖 풍경이 정민에게는 여유로워 보인다.
버스는 한라산 언저리를 한참이나 넘어간다.
정민은 서귀포에 내려 해안도로를 걷는다.
서귀포 관광단지 면세점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지혜는 계산대에서 동료 가영이와 손님들을 맞는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신분증 확인 부탁드립니다."
"네. 담배는 한 보루만 구입 가능하시구요."
계절에 관계없이 서귀포 관광단지는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해안가를 걷는 정민은 검은 돌에 파란 바닷물이 이국적이고 재미있게 보인다.
바닷바람을 쐬다보니 따뜻한 커피가 생각난다.
정민은 멀리 보이는 관광단지 건물로 향한다.
관광단지에 차들도 많고 건물 안에 사람들도 많다.
커피숍에서 따뜻한 카라멜 마끼아또를 한잔 사들고 옆에 쇼핑몰로 가본다,
화장품, 귀금속, 술 여러가지 코너에서 손님들이 상품을 보고 있다.
정민에게는 비싸기도 하지만 관심가는 상품들도 아니었다.
지금 정민은 손에든 따뜻한 카라멜 마끼아또 한잔보다 더 좋아보이는게 없다.
쇼핑몰을 나서려다 정민은 계산대에 열심히 손님들을 대하는 직원들을 본다.
그곳에 키는 좀 작고 영리해 보이는 눈빛으로 손님을 대하는 여자가 익숙하게 일처리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머리는 깔끔이 뒤로 모아 묶었고 화장을 진하게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오목조목 자리잡은 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정민은 멀찌감치 서서 잠시 그녀를 바라본다.
정민은 다시 주류 코너로 가서 술을 골라본다.
"고객님 찾으시는 브랜드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조그만거……."
"이건 어떠세요? 지금 10% 할인 행사 상품인데요."
"얼마에요?"
보기보다 비싸지 않은 가격에 정민은 그걸 받아들고 계산대에 가서 그녀 앞에 내민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신분증 확인 가능할까요?"
정민은 그녀가 말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고객님? 신분증 좀 확인 가능할까요?"
"네? 신분증요? 저 성인인데요. 미성년자 아니구……."
"고객님 이건 면세상품이라 신분증이랑 항공권이나 승선권 확인이 필요합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올게요."
정민은 술을 다시 주류코너에 주고 나오며 그녀를 또 훔쳐본다.
지혜가 정민의 시선을 의식한 듯 정민을 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정민은 눈을 피하고 쇼핑몰을 나간다.
계산대에서 그녀와 마주 대한 몇 초.
정민은 그녀와 더 대화를 하고 싶다.
대화할 기회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니 그냥 머리가 깜깜해 진다.
그녀를 가까이에서 더 보고 싶은건지,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다.
어떤 남자를 좋아할까, 어떤 커피를 좋아할까.
정민은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영화처럼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는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은 마치 영화처럼 백마 탄 왕자가 어느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길 기대하고, 남자들은 우연히 마주친 여자를 자기 여자로 만들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사는 것 같았다.
기회는 그냥 주어지는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정민이다.
“푸흡.”
자기가 그녀를 보고 겨우 한다는게 위스키 한병 사들고 계산대에 가서 마주했다는게 스스로도 우스웠다.
지혜는 위스키를 사가지 못한 사람이 계산대 쪽을 보다가 그냥 나가는게 마음에 걸린다.
'면세품을 처음 사보는 것 같은데……. 좀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는데……. 불러서 알려줄 걸 그랬나?'
매일 많은 사람들을 스쳐 대하는 지혜지만 왠지 아까 그 남자의 아쉬워하는 듯 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정민은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있다.
핸드폰으로 호텔을 검색하다가 적당한 곳을 찾았다.
서귀포 시내에 주변에 재래시장도 있는 호텔이다.
타고 갈 버스도 검색한다.
#3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정민은 노트북을 꺼내 논다.
아까 보았던 푸른 바다를 글로 옮겨본다.
피곤해서 곧 침대에 눕는다.
쇼핑몰 그녀 얼굴도 떠오른다.
푹신한 침대에 몸이 편해지고 스르르 잠이 든다.
"지혜야 오늘 직원들 몇 명 같이 저녁 먹자던데 같이 안갈래?"
퇴근시간이 되어가고 가영이는 지혜와 같이 가고 싶은 눈치다.
"나는 다음에. 미안. 맛있게 먹고가."
"치. 집에 남친이라도 숨겨놨니?"
"그럴지도 모르지."
지혜가 놀리듯 가영이에게 얘기하고 서로 웃는다.
직원들이 싫지 않지만 그냥 술자리를 자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술에 취해 뜻밖의 모습들 때문에 당황한 적이 여러번이다.
지혜는 술을 마시고 들어가면 감기 몸살처럼 몸이 힘들고 잠을 편히 자지 못해서 싫었다.
오늘도 집에서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퇴근을 한다.
지혜는 거리의 부대끼는 사람들, 지나가는 수많은 차들을 보면 생각한다.
'다들 뭐가 저리 바쁘고 어디를 가는 걸까?'
다들 다양하고 복잡하게 사는 것 같은데, 지혜는 단조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지혜는 바쁘고 복잡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 의지대로 살고 있는 것이고, 내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게 싫을 뿐이다.
호텔 침대에서 누워서 정민은 깜빡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을 잤을까.
공항에서 햄버거 하나 먹었을 뿐.
'나가서 따뜻한 국밥이라도 먹어야겠다.'
호텔을 나와 잠시 휴대폰으로 주변 검색을 해본다.
건너편 커피점에서는 그윽한 커피향이 새어 나온다.
상가 쪽으로 가려는데 저만치 낮에 본 그녀가 걸어온다.
지금은 머리를 풀었지만 작은 키에 또렷한 눈 그녀가 확실하다.
"저기요. 아까 쇼핑몰에서 만났었는데요."
정민은 대뜸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뭐야? 무섭게.'
지혜는 놀란채 정민을 올려다본다.
"혹시 기억 안나세요? 제가 저녁을 먹으려는데 초행이라."
지혜는 자리를 피하려는데,
"Excuse me, where to go to Olle Market?"
길을 지나던 외국인 남자가 지혜와 정민에게 길을 묻는다.
"Go over there and you'll find it easily."
지혜가 뒤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외국인을 상대하는 지혜다.
"Oh, thank you."
정민은 잠시 보고만 있다.
"올레시장은 저쪽이에요."
지혜는 정민에게도 한 마디하고는 돌아선다.
"맛집은요. 맛집은 없나요?"
지혜는 낮에 위스키를 못사고 나갔던 그 남자가 생각났다.
지혜가 슬쩍 뒤돌아보자,
"배 안고프세요?"
정민이 싱긋 웃으며 묻고 있다.
"같이 저녁 드실래요?"
"제가 왜요?"
"혼자 여행 와서요. 날씨도 춥고……. 정중히 한번 부탁드리죠."
'뭐야 이 남자. 낮엔 어리바리 하더니, 내가 만만해 보이나?'
"뭐 드실건데요?"
호텔에서도 멀지않은 올레시장 근처 제주 흑돼지 구이집에 지혜와 정민이 마주 앉았다.
정민은 고기를 구우며,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또 뵐 줄 몰랐네요. 이제 집에 가시는 길이었나봐요?"
정민이 말이 많아진다.
"제주도에 처음 왔는데요. 바다도 예쁘고 이렇게 친절하신 분을 ……."
"여기 소주 한병 주세요."
지혜가 정민의 얘기는 듣는둥 마는둥하다 소주를 한병 주문한다.
정민이 고기를 굽고는,
"맛있겠네요. 드시죠."
“…….”
"와 진짜 맛있네요."
정민은 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한점 먹어보고 지혜에게도 건낸다.
"제가 만만하나요?"
지혜는 소주잔을 채우며 정민에게 묻는다.
"네? 그럴리가요."
지혜가 소주를 한잔 비우더니,
"맛있게 드세요."
지혜는 고깃집을 나온다.
"아니 왜 그냥 가세요?"
정민은 당황한채 따라나온다.
"맛집 안내까지 해드렸잖아요."
지혜는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린다.
"하. 참……."
정민은 혼자 신났다가 제대로 한방 먹은 듯 했다.
지혜는 당연히 무시했을 상황이었지만 한번 묻고 싶었다.
자기가 만만해 보였는지.
괜한짓을 했다는 생각도 든다.
정민은 혼자 남아 소주를 한잔 비운다.
'특이한 아가씨네. 여기 고기가 맛있긴 하네.'
혼잣말을 하고는 피식 웃는다.
#4
지혜는 아무도 없는 작은 아파트에 돌아왔다.
작은 집이지만 단촐한 살림살이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영어 공부를 하려고 책을 펴고 앉았지만 그 남자와의 일이 신경 쓰인다.
'왜 나한테 그랬을까? 괜히 상대를 해줬어. 멀쩡히 생겨가지구.'
'뭐 하는 사람일까?'
의심스럽기도 하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미안하기도 하다.
정민은 호텔에 돌아가 노트북을 두드린다.
떠오르는 대로 글자를 채워간다.
오늘 이동 중에 생각했던 내용을 옮기다보니 손이 바빠진다.
'잘 들어갔겠지? 내일도 가면 볼 수 있겠지? 날 보고 모른 척 하려나?'
그런 상황에 침착했던 그 여자가 대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고 가느란 외모는 귀여운 아가씨 같지만 똑부러진 면이 있었다.
정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도 이럴까 저럴까 고민할 때도 많고, 어떨 때는 매우 즉흥적으로 행동하거나 결정을 해버린다.
무척 관심이 가던 것도 어느 순간 싫증이 나기도 했다.
무엇이든 쉽게 단정짓는건 옳지 않다고 느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표현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항상 변하는 사람의 심리를 어설프게 예측한다는 건 어리석어 보였다.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과 기대감, 어떤 일이든 가능성이 있다는 걸 간과하지 않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 하더라도 자신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영은 오늘 조금 피곤한 듯 한 모습이다.
"어제 술 많이 마셨어?"
"밥 먹으면서 소주 좀 먹구, 호프집 가서 맥주 마셨어."
"차 한잔 마시구 쉬고와. 오늘 평일인데."
지혜는 단발의 가영이의 옷에서 머리카락을 떼어준다.
"어제 해화는 또 술 마시고 울고 불고 ……."
둘은 어제 술자리 이야기를 하며 서로 웃고 있다.
정민이가 커피를 들고 매장에 들어온다.
커피 두 잔을 들고 와서는 지혜 앞에 내려놓고서 그냥 가버렸다.
"누구야?"
가영이가 눈이 동그래졌다.
지혜는 마치 올 줄 알았던 것처럼 별 말이 없다.
"아는 사람이야? 말도 없이 뭐야? 너 설마?"
"그런거 아니야."
가영이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지혜의 눈치를 살핀다.
"읽어봐."
가영이는 커피 케리어에 들어있는 쪽지를 가리킨다.
'어제 고마웠습니다.'
지혜는 싱겁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이다.
"뭐야? 어제? 지혜 너 어제 저 남자 만났어?"
"그런거 아니야."
"근데 잘 생겼다. 누구 닮은 것 같기두 하구."
"잘 생기긴."
정민은 어제 고맙다는 얘길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다.
다시 볼 일이 없겠지만 성의라도 보이고 싶었다.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나지 않는건 사실이다.
커피를 전하며 지혜의 명찰에서 이름은 눈에 담았다.
#5
거멍 돌이 보여 주지 않던가
파란 바닷물은 멈추지 않는다고
노리가 얘기를 해주었지
겨울을 나고 나면 파릇파릇 싹이 움터 오른다고
물질하는 할망은 바람 잘 날 없었다데
뭍에 나가도 섬이 아련하니
섬은 여기에 지긋이 있었다네
불구덩이 용암물이 솟을 때부터
섬은 오롯이 여기에 있었다네
정민이 쓰던 작품은 미뤄두고 종이 노트에 글귀를 끄적인다.
이번 작품에 정민은 자신의 경험이나 주관을 반영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소설이 작가를 항상 닮는 것인가.
그러면 배우는 항상 비슷한 배역만 연기할 것인가.
하지만 정민은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모습을 담고있다는걸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정민은 자신의 글이지만 자신을 담지 않는 글을 쓰려 한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이든 전지적 작가 시점이든 글을 쓰는 것은 작가다.
작가의 색이 묻어나지 않는 글이 가능할까.
정민은 소설 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기라도 할 것처럼 자주적인 글로 만들고 싶었다.
#6
"당뇨 질환 때문에 시력이 좀 떨어지신 것 같습니다. 약물 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보고 수술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정민의 엄마는 안과에서 당뇨망막병증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당뇨가 오래되었는데 요새 시력이 많이 흐려진것 같았다.
정민 엄마는 추운 날씨에 바깥 외출이 더 줄었다.
정민 엄마뿐만 아니라 주위 또래의 친구들도 무기력하거나 잦은 심경 변화를 겪는 것 같다.
어떤 친구들은 여행이나 골프나 일부러 활동을 하고 거기에서 나이 먹음에 대해 위안을 삼는 것 같다.
흥미를 느끼지 못한 정민 엄마는 아무곳이나 쉽게 다니지 않는다.
수면유도제도 먹지만 기본 생활 패턴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정민이가 엄마의 건강에 대해 신경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벌써 퇴근시간 되가네. 지혜야 나 화장 좀 떠 보이지?"
"괜찮은데. 왜 또?"
"해화랑 시내 쇼핑 나가려는데 좀 초췌한가?"
"괜찮은데. 팩트 좀 할래?"
쇼핑몰 계산대에서 지혜와 가영기가 조금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혜야."
"홍준씨 왔어요?"
가영이가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말쑥한 차림에 홍준이가 두 사람을 보고 웃는다.
깔끔한 금빛 안경태에 단정한 머리로 서류가방을 메고 있다.
"서점에 갔다가 들렸어. 끝나고 저녁이나 먹자."
"아니야. 기다리지 말구 들어가."
지혜는 다시 손님을 맞고 계산을 도와준다.
홍준은 옆으로 비켜서서 바라보고 있다.
"미안해. 선약 있어. 추운데 얼른 들어가. 알았지?"
"그래. 그럼 연락할게."
홍준은 아쉬운 듯 매장을 나선다.
"오늘 찾아오는 남자도 많구. 수상해."
"치. 부럽니?"
지혜와 가영이 웃는다.
정민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호텔 로비에 내려온다.
등산복 차림에 사람들이 있다.
'한라산을 올라가 볼까?'
하루정도 백록담 등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다.
호텔 앞 카페에서 새어나오는 은은한 원두향이 좋았다.
카페에 가서 따뜻한 라테를 한잔 주문하고 앉는다.
창가에 앉아 종이 노트를 긁적인다.
정민은 인간의 무한한 창조력을 존경한다.
동굴벽화에 그림을 그리던 원시인류부터 신분이나 남녀노소를 떠나 인류의 창조물은 경악할 정도로 시대를 앞서나가는 산물을 내어놓았다.
인공지능이 발달하였으나 이 또한 인간의 창조물이며 더 진화된다 해도 인간의 도구일 뿐일 것이다.
기나긴 역사 동안 인류는 경계가 없는 과정의 고차원적인 문명을 이루며 살아간다.
경험과 이성적 사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고 예술적 가치를 창조는 것이다.
정민은 창밖을 보고 있다.
지혜라는 그녀가 어제 이때쯤 이 길을 지났었다.
'또 지나가면 좋겠다. 얼굴이라도 한번 더 봤으면…….'
정민은 은근히 그녀를 기다리는 듯 하다.
기대와 달리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정민의 종이 노트에 지혜를 닮은 여자 얼굴이 스케치 되고 있다.
#7
홍준이 거리를 걸으며 생각한다.
'그래. 서두를 필요 없지.'
홍준은 원하는 바를 꼭 이루고야 마는 성격이다.
초등학교 교사가 된 것도 지혜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이든 생각했던 계획대로 일처리가 되어야 직성이 풀렸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간도 항상 많은 준비를 해서 학생들을 이끌어 가는 홍준이었다.
꼼꼼하지만 아이들에게 다정한 홍준을 학생들도 잘 따랐다.
언젠가 수업 중 학생들과 장래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경찰, 소방관, 의사, 화가 아직 어린 아이들이지만 저마다 많은 꿈을 갖고 있다.
"선생님은 꿈이 뭐에요?"
한 아이가 홍준에게 반문을 했다.
예상치 못한 반문에 홍준은 순간 대답이 망설여졌다.
"선생님은, 선생님은 꿈이 선생님이어서 지금처럼 너희들을 가르치게 되었어. 너희들도 언제나 희망을 갖고 있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단다."
"저도 선생님할래요."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럼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못한 홍준의 꿈은 아직 이루지 못한것 같다.
왜 교사가 되었던가.
교육대학을 마치고 교사 임용고시를 볼 때까지의 시간이 결코 쉽지 않았다.
묵묵하게 하루하루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온 홍준이다.
한참 걷던 홍준은 시내에 새 아파트 공사 현장 앞에 섰다.
아직 아파트 부지 기초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이다.
한낮이지만 정민은 호텔 방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그러다 외출 준비를 하고는 호텔을 나선다.
지혜가 일하는 쇼핑몰 앞이다.
관광객들인지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붐비는 모습니다.
멀찌감치 지혜가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정민은 그냥 다시 돌아서 온다.
거리를 걷다 공원 벤치에 앉는다.
운동을 하는 노인, 강아지와 산책하는 여자, 교복을 입고 두셋이서 하교하는 아이들.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서로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각자 공간을 채우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영향력과 에너지를 주고 있다.
정민은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실과 같은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저녁이 되어 정민은 호텔 앞 카페에 커피를 한잔 들고 앉았다.
올때마다 다른 테이블에도 손님들이 있어 더 마음이 편한것 같다.
은은한 원두향도 좋다.
정민은 종이 노트를 끄적인다.
창밖을 내다보니 그녀가 걷고 있다.
#8
혹시나 그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창밖을 보던 정민은,
지혜를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퇴근 하시나요?"
금세 밖으로 나가서 지혜에게 인사를 건낸다.
지혜는 무시하려 생각했지만 괜스레 신경이 쓰인다.
"왜 이러시는 거죠?"
"커피 한잔 마시고 있었어요. 추운데 같이 차 한잔 하시죠."
정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카페를 가리키며 같이 차를 마실 것을 권한다.
'뭐하는 사람인지. 이번에 확실히 해줘야겠어.'
"그러시죠."
지혜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함께 카페에 앉는다.
"저는 라떼 마시고 있었는데. 따뜻한 라떼 한잔 어떠세요?"
"네."
'주문도 자기 맘데루네. 참나.'
"용건이 뭔가요?"
"일단 시간을 내줘서 감사해요. 사실 이곳에 처음 온 날 그쪽을 매장에서 봤거든요. 이름이 지혜씨죠? 명찰에서 봤습니다."
정민은 자기가 제주도에 온 것부터 묻지 않은 내용을 열심히 얘기한다.
지혜는 한 마디 확실히 해주고 가려고 했는데, 마주 앉아 얘기를 듣다보니 나쁜 의도는 없는것 같다.
가까이 보다보니 잘 생긴것 같기도 하고 호감이 가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저녁마다 여기서 저를 기다리셨어요?"
"나도 모르게 여기 앉아서 혹시나 지나갈까 하고 있었네요. 하하."
지혜가 엉뚱하다는 듯이 피식 웃는다.
"책을 내셨거나 다른 작품은 혹시 있으세요?"
"습작들만 있고 이번 작품이 완성되면 출판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다음에 단편 써놓은거 몇개 보여드릴께요."
"글 쓰는게 재밌으세요?"
"네. 아직 이름도 없는 작가지만. 지금 제가 좋아하고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지혜씨는 책이나 영화 뭐 좋아하시는거 있으세요?"
"영화 봤었는데. 그 뭐더라.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네? 아……. 그 에니메이션이죠. 사실 그 영화도 원작은 소설이죠."
"그랬나요? 그건 몰랐네요. 그냥 재밌게 봤어요."
"네. 저도 재밌게 봤죠."
왠지 제멋대로인 남자 같지만 지혜는 단순한 대화가 싫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지혜는 시간이 한참 지난걸 느꼈다.
"저 이만 가볼께요."
"제가 너무 떠들었나요? 하하. 혹시 담에 식사라도 같이 하고 싶은데. 제가 여기 혼자 와있어서. 연락처라도……."
정민은 종이 노트를 슬쩍 내민다.
지혜는 조금 망설였지만 혼자라는 말에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고 일어선다.
#9
정민은 지혜가 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서 있다.
함께 차 한잔 마셨을 뿐이지만 여기에 와서 마음 설레는 여자와 알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언제 또 애길 할까. 같이 뭘 먹을까.'
정민은 혼자 앞서 고민하며 호텔에 들어간다.
씻고 거울을 보던 지혜는 정민이 했던 얘기들이 생각난다.
'어제도 날 기다렸나. 날 매장에서 보고 반했나.'
괜히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본다.
마주 대했을때 그 남자는 차분한 목소리에 꾸밈이 없어 보였다.
지혜는 정민이 쓴 글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지혜는 볼이 붉어짐을 느낀다.
그대가 보이네요
낙엽진 산책길 노란빛 발하는 털머위 꽃처럼
그대가 듣고 싶어요
당신의 목소리를 종이 위에 그려 봅니다
그대는 이 연극에 주인공인가요
기꺼이 저도 그 무대에 오르지요
그대는 아실까요
당신 옷자락 스침까지 제가 기억한답니다
그대는 느끼시나요
먼발치에서도 그대의 향기가 보인답니다
이 겨울 남쪽 항 가까이 고래가 들어옴에
그대와 나 마중나가 바라봄이 어떨런지요
정민은 호텔에서 종이 노트에 글을 옮겨본다.
조용한 밤.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것 같다.
창밖의 불빛들이 촛불을 켜놓은 것처럼 아련히 빛나고 있다.
#10
정민 엄마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아들이 제주도에서 편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고 있다.
하지만 정민 엄마는 잊고 있던, 아니 자신의 고통에 일부러 기억에서 지우고 살았던 때가 떠오른다.
20여 년 전 국가부도 위기가 온 시기 정민 엄마에게 너무 끔찍한 시간들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게 한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터지며 정민 엄마는 인생에 가장 혹독한 경험을 해야 했다.
정민 엄마가 수면유도제를 삼키며 다시 잠을 청한다.
호텔에서 나온 정민이 지혜에게 어제 받은 연락처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본다.
'혹시 퇴근하시면 차 한잔 하고 가실래요?'
정민은 카페에 앉아 카라멜 마키아또를 한 잔 시켜 창가에 앉는다.
휴대폰 메시지에 답장은 없다.
얼마지나 창밖에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정민은 기쁜 마음에 카페를 나가 지혜에게 간다.
"지혜씨. 문자메시지 보냈었는데. 하하."
"아. 그러셨어요."
지혜가 모른척하고 휴대폰을 뒤진다.
"괜찮으시면 차 한잔 하고 가시죠."
정민은 카라멜 마끼아또를 주문해 지혜에게 건넨다.
"오늘 일은 어떠셨어요? 손님 항상 많던데요."
"오늘은 보통이었어요."
"저번에 영어도 잘 하시구. 외국인 손님들도 많겠네요."
"그래서 외국어 공부는 조금씩 하고 있어요."
"일하는 것도 힘드실텐데 지혜씨가 무지 부지런하시구나."
"아니에요."
둘은 웃으며 대화한다.
정민은 뭐가 그리 궁금한게 많은지 하루 종일 지혜만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지혜는 남자와 단둘이 이런 자리에 있는게 없었던 것 같다.
도도하고 콧대가 높다며 가영이나 다른 사람들이 놀리듯 얘기하기도 했다.
지혜도 동화나 티비에 나오는 평범한 만남과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해보았었다.
대부분 평범한 가정인데 엄마 아빠 아이가 있는 그런 평범한 가정.
지혜는 왠지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지혜는 그렇게 맺어진 가족이란 말이 따뜻하게 느껴졌었다.
"우리 동갑이네요. 하하."
"그러네요."
한참 이야기를 하던 지혜는 볼이 화끈해지는 듯 했다.
"저 이만 가볼게요."
"아. 그래요. 지혜씨 쉬는 날은 언제에요? 저번에 식사하기로 했는데."
"내일 쉬는 날이에요. 근데 볼 일이 있어서."
"아. 그러세요. 어디 가시나요?"
정민이 아쉬운 표정으로 지혜를 바라본다.
"보육원에 가요."
"보육원이요? 아... 지혜씨 봉사활동 뭐 이런거 하시는구나."
"……."
"저도 갈게요. 같이 가면 안될까요?"
"정민씨가 왜요?"
"제가 헌혈도 많이 하고. 봉사활동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한번 데려가 주세요."
지혜는 막무가내인 남자다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커피도 자기 맘데로 골라서 가져왔다.
"그래요."
정민은 호텔에 가벼운 마음으로 호텔에 들어온다.
엄마에게 안부 전화도 하고 노트북을 두드린다.
내일 지혜가 쉬는날에 어딜 가든 함께 만나게 되어 더 셀렌다.
'지혜씨는 쉬는날에 보육원 봉사활동도 하고. 대단하다. 내가 봉사활동을 언제 가봤었나? 가서 뭘하지?‘
#11
지혜는 작은 아파트에서 아침부터 분주하다.
갖가지 재료를 두고 도시락을 싸고 있다.
손은 바쁘지만 지혜는 즐거운 모습이다.
“지혜씨!”
지혜가 호텔 앞에 모습을 보이자마자 나와서 기다리던 정민이 부른다.
“어유. 이게 다 뭐에요.”
정민은 지혜의 짐을 뺏어 든다.
“도시락이에요.”
“와. 이렇게 많이 드세요? 하하.”
“나눠 먹어야죠.”
함께 버스를 타고 빈자리에 앉는다.
정민은 버스에 나란히 앉은 지혜의 은은한 향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버스에 내려 조금 걷다 보니 둘은 바다가 보이는 어느 작은 보육원 앞에 도착했다.
“지혜 왔구나.”
중년의 여자분이 밖에서 빨래를 걷다가 지혜를 반긴다.
“최선생님 잘 계셨죠.”
“아이구 지혜 왔구나.”
“네 원장님.”
나이가 지긋한 원장님이 나와 지혜를 반긴다.
“힘든데 좀 쉬지. 어서 들어가자.”
“이 총각은 누구시나?”
“네. 짐 들어주구 봉사활동 하신데요.”
“오호 그래? 어서와요.”
지혜와 최선생님이 마주보며 웃는다.
원장실에 지혜와 정민이 함께 앉았다.
“우리 지혜가 여길 나간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구나.”
원장이 주전자에서 따뜻한 차를 따라 건넨다.
“너나 홍준이는 이렇게 보고 사니 더할 나위가 없는데 소식이 없는 녀석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이구나.”
원장은 요새는 보기 힘든 오래된 담배 파이프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 한 모금 담배 연기를 뿜는다.
“너무 걱정마세요 원장님. 다들 잘 지내고 있을거에요.”
“그래. 그래야지. 무소식의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으니.”
원장의 주름진 얼굴에 근심이 묻어 나온다.
원장은 원래 산 속 절에 스님이었다고 한다.
IMF 국가경제위기 시절 늘어나는 고아들을 돌보아야겠다는 신념을 갖고 하산해서 불자들의 한푼 두푼 도움을 받아 보육원을 만들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복지예산을 받아 운영을 하고 있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밖에서 두세명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교하는 아이들이 하나둘 보육원으로 돌아오는 듯하다.
“와. 지혜 누나다.”
“왔어? 애들아 누나가 간식 싸 왔지.”
최선생과 지혜가 아이들에게 지혜가 손수 싸온 김밥을 나눠준다.
최선생은 원장이 절에 스님으로 있을 때부터 충실한 불교 신자였으나 젊은 아들을 사고로 여의고 이곳에서 보육교사로 봉사를 하고 있다.
“이 아저씨는 누구에요?”
“음. 누나 친구야. 오늘 너희들 숙제 도와주러 오셨어.”
“저 수학 숙제 도와주세요.”
“저두요.”
“그래그래. 너희들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다. 형이야.”
아이들이 싱긋싱긋 웃는다.
정민은 아이들과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해맑은 아이들 모습에 정민은 뭔가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12
지혜는 이곳 보육원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안계시지만 원장님과 최선생님이 그 자리를 대신 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사연으로 이곳으로 왔지만 대부분 부모님을 알지 못할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집에서 사는게 당연하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도 그걸 잘 알고 있었고 불평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아이들의 기억에는 엄마, 아빠와 집에서 살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초등학생 나이에 가족을 잃고 보육원에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 가정 생활을 알기에 적응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웠다.
지혜는 너무나 어린 나이부터 보육원에 자라며 지혜에게는 이곳이 집이고 가정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나이면 국가에서 몇 백만원쯤 정착 초기비용을 받고 떠나야 하지만 성인이 사회에 나가 홀로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지혜와 같이 사회에 적응해 나가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두운 생활을 하게 된다.
‘지혜씨도 어렸을 때 이 아이들처럼 여기서 함께 살았겠구나.’
정민은 안타까우면서 지혜가 많은걸 감당하고 살아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민은 보육원에 처음 왔다.
괜히 눈앞의 아이들에게 미안해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서로 떠들며 정민에게 이것저것 재잘거린다.
지혜는 아이들 사이에 진땀 빼는 정민을 보니 재밌다.
“지혜야 남자친구 생긴거야? 훤칠하니 잘 생겼네.”
최선생님이 지혜에게 소곤소곤 얘기 한다.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여기 잠시 여행 왔어요.”
저녁 시간이 되어 최선생을 도와 지혜와 정민도 아이들 식사 배식을 한다.
스무명 남짓 되는 아이들.
제법 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도 보인다.
조촐한 식단이지만 누구하나 불평불만 하는 아이가 없다.
조그만 아이들도 각자 식판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식사를 하고서는 식기를 모으는 곳에 잘 옮겨 놓는다.
정민은 생소한 광경에 아무 말이 없다.
“아이구 홍준이 왔구나.”
“네. 원장님. 최선생님 잘 계셨죠?”
원장과 최선생은 지혜가 왔을 때처럼 홍준을 반긴다.
“지혜야. 언제 왔니? 매일 바쁜척 하더니.”
홍준은 지혜를 보고 이내 지혜 옆에서 배식을 돕는다.
그리고 사들고온 과자를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13
아이들 배식을 하고 원장과 최선생 오늘 온 손님들도 함께 같은 식사를 한다.
“홍준이 넌 얼굴이 왜 핼쑥하니? 살 좀 쪄야겠어. 학교 일도 만만치 않지?”
“괜찮아요.”
“요새 애들이 보통 까탈스러워야 말이지. 학부모들도 여간 오지랖 하고.”
“그래도 홍준이 넌 누구보다 잘 할게야.”
원장은 어릴때부터 돌봐온 홍준이나 지혜 성격까지 잘 알고 있기에 신경이 쓰이는 듯 하다.
“그럼요 원장님. 홍준이가 보통 야무진 아이인가요?”
최선생도 홍준을 보면 믿음직스럽다.
“누구야 저 사람은?”
설거지를 하며 식기 정리를 하며 홍준이 지혜에게 조용히 묻는다.
“아는 사람이야.”
지혜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릇들만 정리한다.
정민은 서툰 모습이지만 설거지에 열중이다.
‘지혜씨가 여기서 살았구나. 왜 전혀 몰랐지? 얘기도 안했구.’
정민은 지혜가 봉사활동을 하러 오는걸로 생각했다가 사실을 알고 약간은 충격적이었다.
‘정말 대단해. 그래도 저렇게 예쁘고 당당하게 지내잖아.’
정민은 어색한 티를 안내야겠다고 생각한다.
“와. 벌써 다 했네요?”
지혜가 정리를 끝내고 정민에게 웃으며 말한다.
“그럼요. 제가 설거지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하하.”
“정민씨. 얼굴에 거품 묻었어요.”
지혜가 정민의 얼굴에 묻은 세제 거품을 손으로 닦아준다.
“하하. 거품이 튀었네.”
정민은 웃는 지혜 얼굴을 바라본다.
사실 설거지를 제대로 해본적도 별로 없는 정민은 밝은 모습의 지혜에게 조금은 부끄러워진다.
“탕!”
“에잇! 바퀴벌레가 있네.”
홍준이 바퀴벌레 타령하며 파리채를 식탁에 휘두른다.
“깜짝이야.”
지혜는 소리에 놀라고 홍준은 별것도 아닌척 나가버린다.
“피곤할텐데 고생들 했어. 어서들 가거라.”
원장과 최선생이 셋을 배웅한다.
“또 올게요. 원장님. 최선생님 건강하시구요.”
“너희도 어두운데 조심히 가.”
“안녕히 계세요.”
정민도 인사를 하고 나온다.
“지혜야 태워다줄게. 가자.”
“괜찮아. 우린 요 앞에서 버스 타고 갈게. 얼른 들어가 홍준아.”
“할 얘기도 좀 있어서 그래.”
홍준은 정민이 신경쓰이는 듯 정민을 힐끗 본다.
“그럼 다음에 만나서 하자. 오늘은 너무 늦었네. 미안. 조심히 가.”
지혜는 버스를 내렸던 곳으로 걸어간다.
정민은 아무말 없이 지혜 뒤를 쫓아간다.
#14
‘우리? 지혜가 저 남자랑 우리라 그랬단 말이야?’
홍준은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대체 남자라고는 만나지 않던 지혜가 처음보는 남자를 데려와서 홍준은 굉장히 찝찝하다.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던 지혜다.
지혜는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고 다른 애들과 싸운 적도 없다.
학생때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의 홍준은 안팎에서 다투길 잘했다.
그럴 때마다 동갑내기인 지혜는 홍준을 다그치곤 했다.
오로지 자기 기분만 우선이던 홍준에게 항상 양보하고 마음을 열어준 지혜가 고마웠다.
지혜는 보육원을 나와 바로 일을 해서 자립했고 홍준은 이를 악물고 교육대학을 졸업해서 바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항상 응원해준 지혜 덕이 컸다.
교사가 된 후에는 지혜는 더 이상 홍준을 응원해주는 사람 같지가 않다.
이제 홍준이 지혜를 도와줄 수 있지만 점점 지혜가 멀어져가는 것만 같다.
‘언제부터 아는 사인거야? 뭐하는 놈이지? 뺀질뺀질 되게 말 안듣게 생겼네.’
홍준은 차를 몰고 두 사람 앞을 세게 밟고 지나간다.
“아 거참 먼지 날리게.”
정민이 홍준의 차를 보며 핀잔이다.
“정민씨. 저기 버스. 뛰어요.”
정민은 지혜를 따라 뛰어가 함께 버스에 오른다.
“기상청은 내일부터 제주도 산간지역에 많은 양의 눈이 내리고 강풍이 불것으로 예보했습니다. 예상 적설량은 제주 산간지역은...”
버스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나오고 있다.
몇 정거장 지나고 아침 일찍부터 음식 준비를 했던 지혜가 피곤해 잠이 든다.
지혜의 머리가 스르르 정민의 어깨에 기대어 온다.
정민도 피곤했지만 눈은 초롱초롱 하다.
지혜의 향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정민은 그대로 몸이 굳은 듯하다.
얼마쯤 지나 버스 브레이크에 흔들린 지혜가 깬다.
“어. 잠들었네. 여기 지금. 지난 것 같은데?”
“정민씨 얼른 내려요.”
“아... 네.”
지혜는 서둘러 벨을 누르고 정민을 데리고 내린다.
“미안해요. 미리 깨울텐데. 어딘지 몰라서.”
“괜찮아요. 한 정거장만 걸어가면 되요.”
“제가 집 앞까지만 바래다 드릴께요.”
“길 잃어버릴려구요?”
“에이. 아니에요. 제가 이 정도도 못찾을까봐요?”
“하하. 그래요. 그럼.”
#15
“오늘 고생했어요.”
집 앞에 도착한 지혜가 정민을 보며 인사한다.
“아니에요. 덕분에 봉사활동도 하고 같이 또 갈게요.”
지혜는 미소만 짓는다.
아이들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어요
아이는 행복하다고 해요
쑥스러워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우리들은 웃지 못하나봐요
나는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나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네요
웃는 아이를 안아봅니다
아이의 온기가 느껴지네요
아이가 나를 안아주어요
아이는 갖고 싶은게 없니
나는 갖고 싶은게 너무 많나보다
아직 나는 어린가봐요
행복은 다시 아이들에게 배워야 하나봐요
아이야 크거든 그냥 행복하거라
그때도 나에게 행복을 알려주겠니
아이야 먼훗날의 너에게 편지를 쓰고
그 편지 받아볼 때 기억하겠니
니가 얼마나 소중한 아이었음을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었음을
호텔에 돌아온 정민은 종이노트를 펜으로 끄적인다.
오늘 보육원 아이들의 얼굴과 지혜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정민은 밤늦도록 노트북 앞에 앉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지혜는 평소와 같이 일찍 출근을 한다.
꼭 호텔 앞을 지나지 않아도 되지만 그 길로 지나간다.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던 정민의 모습이 떠오른다.
호텔에서 아직 자고 있을까 글을 쓰고 있을까 조금은 궁금한 것 같다.
‘어제 버스에서 졸았는데 코 안곯았나. 정민씨가 비웃은거 아닐까.’
휴대폰을 열어 정민의 전화번호를 찾아본다.
지혜는 그냥 전화를 하지 않는다.
정민은 늦게나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한라산이라... 그래 조금만 올라가 보지뭐.’
정민은 버스를 타고 한라산 탐방로에 간다.
입구 주변을 보니 정상에 금방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넓은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이다.
큰 대형버스들도 많다.
사람들은 대부분 등산복에 장갑이나 등산 도구를 들고 있다.
정민은 평소처럼 운동화에 두꺼운 패딩을 입고 왔다.
‘스틱이라도 있어야 할까’
정민은 입구 상가에서 스틱을 한 쌍 사들고 등산 코스 안내판을 본다.
‘어휴. 여기서도 하루 코스네. 조금만 올라가 보자.’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따라 정민도 등산로를 오른다.
정민 엄마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산책을 다녀온다.
날씨가 추워 오래하지는 않았다.
집에 들어와 약을 챙겨 먹는다.
요즘 시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
병원에서 당뇨로 인한 시력 문제를 얘기한게 생각나서 조금 겁이 났다.
정민이가 알게 될까봐 오히려 걱정되기도 했다.
창밖을 보다 순간 눈이 부신 정민 엄마는 그만 물컵을 떨어뜨려 깨지고 만다.
#16
정민은 완만한 등산길을 오른다.
오르는 사람보다 내려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중국인, 일본인 외국 관광객들도 많다.
산을 오를수록 아래와 위쪽 날씨가 다른 것 같다.
바람도 세고 길가에 눈도 쌓여있고 길이 얼었다.
스틱이라도 사오길 잘한 것 같다.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등산화에 아이젠을 착용했다.
별 준비 없이 산에 온 정민은 아차 싶다.
정민은 이만 돌아가려고 올라온 길을 내려간다.
“어이쿠.”
정민은 눈이 얼어있는 걸 밟고 넘어진다.
“조심하세요. 밤새 눈 와서 아이젠 안하면 위험해요.”
내려가던 등산객이 정민에게 얘기해 준다.
“네. 고맙습니다.”
정민은 엉덩이를 털며 다시 내려간다.
발목을 삐끗한 듯 통증이 있다.
원장이 최선생과 보육원 마당 청소를 하고 있다.
“지혜가 데려온 청년이 책을 쓴다고 했던가?”
“네 원장님. 서글서글하니 착해 보이던데요.”
“홍준이 녀석이 어쩔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다 성인인데 잘 하겠지요.”
아이들이 돌아온다.
“원장님. 성훈이 오늘 학교에서 싸웠어요.”
하교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원장에게 얘길 한다.
성훈이란 아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이 없다.
“성훈아 싸웠어? 다친 데는 없구?”
최선생이 걱정스레 묻는다.
“성훈아 이리 들어오렴.”
원장은 성훈이와 원장실에 들어간다.
“어디 보자. 다친 데는 없니?”
원장이 성훈을 감싸 안는다.
원장이 성훈이를 안고 등을 토닥거린다.
“안 다쳤으면 됐다.”
“나쁜 일은 잊어버려라.”
성훈이는 소리 없이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원장은 성훈을 달래어 돌려보내고 학교에 전화를 한다.
“선생님 노고가 많으십니다. 네네…….”
“오늘 저희 집 성훈이가 다퉜다던데 성훈이 친구는 다치지는 않았나요?”
“아. 네네. 다행입니다. 죄송합니다.”
“네네. 들어가십쇼. 선생님.”
원장은 안도의 숨을 쉰다.
자리에 앉자 담배 파이프를 물어 불을 붙인다.
정민은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았지만 발목이 더 아파온다.
호텔에서 가까운 병원을 핸드폰으로 검색해 본다.
#17
“발목 염좌인데, 다행히 심하지는 않네요.”
의사가 정민 발목에 붕대를 감고 처방전을 내려준다.
“날씨도 추우니 너무 무리한 운동은 삼가시구요.”
“네. 감사합니다.”
정민은 한쪽 발은 붕대를 감고 약봉지랑 신발 한 짝을 들고 호텔로 향한다.
지혜는 일을 마치고 다른 직원들과 매장을 나선다.
“지혜야. 홍준씨다.”
가영이가 홍준이 밖에 서있는걸 보고는 먼저 얘기한다.
“홍준씨 안녕하세요. 지혜 만나러 오셨구나?”
“아. 네.”
“지혜야 난 먼저 들어갈게.”
“그래. 내일 봐.”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지혜 니가 바쁜거 같아서. 춥다. 차에 타자.”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차에 앉은 지혜가 홍준에게 묻지만 홍준은 별 대답이 없다.
“어디 가는 거야?”
“요 앞. 가보면 알아.”
시내 쪽으로 차를 몰고 간다.
지혜는 대답이 없는 홍준에게 더 묻지를 않는다.
“여기야.”
시내 새로 아파트를 짓는 공사 현장에 차를 세우고 홍준이 내린다.
지혜도 차에 내려서는,
“여기 아파트 짓나?”
“그래. 여기 아파트 계약했어. 크지는 않지만 우리 시작하기에는 충분할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홍준은 지혜를 바라보며 마주선다.
“우리 결혼하자.”
“홍준아 아파트 계약한 거 정말 축하해. 근데…….”
“고민할 것 없어. 우리 행복하게 살자.”
“홍준아. 우린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살았잖아. 난…….”
“맞아. 난 이제 새 가족을 만든다면 너랑 할 거야. 너도 알잖아.”
“미안해 홍준아. 이건 아닌 것 같아.”
홍준의 돌직구 같은 얘기에 지혜는 난감해 한다.
“그 남자 때문이야?”
“누구?”
“뭐 소설이나 쓰고 산다는 그 남자 말이야.”
“그런거 아니야. 나 집에 먼저 갈게.”
돌아서는 지혜의 팔을 홍준이 잡는다.
“타. 추워. 집에 바래다줄게.”
호텔 앞 카페에 앉아있는 정민은 지혜를 기다린다.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다.
‘오늘은 퇴근이 늦나?’
커피는 식어서 차가워졌다.
전화를 해볼까 생각하다 정민이 불편한 발로 카페를 나선다.
#18
“미안해. 미리 말하려고 했는데…….”
지혜의 집으로 향하며 홍준이 지혜에게 말한다.
“아니야. 하지만 홍준아.”
“…….”
“난 결혼을 생각한 적 없어.”
“지금부터 생각해줘.”
“…….”
홍준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기에 지혜의 머릿속이 복잡하다.
지혜의 집 앞에 차를 세운다.
지혜가 차에서 내리고 지혜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정민.
“지혜씨.”
“어. 정민씨. 이 시간에 여긴 왜……. 발은 왜 그래요? 다쳤어요?”
“그냥 좀 접질렸어요. 하하.”
홍준이 차에서 내린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지혜씨 잠깐 보러 왔어요.”
“참나. 이봐요. 책을 쓰신 다던데. 무슨 책을 썼나요?”
“…….”
“홍준아. 낼 연락하자. 들어가.”
지혜가 홍준을 돌려보내려 한다.
“얘기 들었습니다. 여행 온 것 같은데. 지혜는 저랑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마주치는 거 굉장히 불쾌하네요.”
“결혼이요?”
“네. 지금 같이 살 새 아파트 보고 오는 길이에요.”
정민은 이게 무슨 소린지 싶다.
‘결혼할 사이였다니.’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지혜한테 건네고,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정민이 불편한 발로 돌아서 나온다.
집에 들어온 지혜는 마음이 편치 않다.
‘아니 발목에 붕대 감고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결혼하자고 아파트를 보여준 홍준이 때문에 당황했지만 불편한 발로 뒤돌아 가는 정민이 더 마음 쓰인다.
정민이 건넨 케이크 상자를 열어본다.
동그란 치즈 케이크에서 치즈향이 난다.
정민은 멍하니 걸어간다.
‘아니 결혼할 사이었나? 그렇게 안보이던데. 아 참.’
머리를 긁적인다.
‘지혜씨는 그런 얘기를 왜 안한 거지.’
“에잇.”
정민은 눈앞에 빈 깡통을 걷어찬다.
“아얏!”
발목이 삔걸 깜빡했다.
아까 홍준이 한 말이 생각난다.
‘참나. 이봐요. 책을 쓰신 다던데. 무슨 책을 썼나요? 우린 새 아파트 보고 오는 길이에요.’
‘그래. 홍준이란 남자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랬잖아. 아파트도 샀구나.’
‘여기 집값도 서울처럼 비싸던데.’
무슨 소설을 썼나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난 아직 작가 지망생일뿐…….’
정민도 잘 알고 있지만 막상 지혜와 홍준 앞에서 이런 얘길 들으니 우울하다.
홍준의 말대로 지혜가 성실한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해서 새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을 것이다.
“혼자 쓸데없이 들떠가지군. 하하.”
정민은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씁쓸한 기분이다.
지금은 발목이 아픈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19
지혜는 잠시 고민하다가 치즈 케이크를 다시 싸들고 집을 나선다.
호텔 쪽으로 뛰어간다.
호텔에 거의 왔는데 아까 돌아간 정민이 보이지 않는다.
휴대폰으로 정민에게 전화를 건다.
“정민씨. 정민씨 어디에요?”
“저 지금 호텔 앞인데요. 지혜씨는요?”
지혜가 호텔 앞까지 서둘러 간다.
“지혜씨. 왜…….”
“케이크 같이 먹어요.”
호텔 앞 카페에 지혜와 정민은 마주 앉았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미안해요. 홍준이가 원래 직설적이라…….”
“괜찮아요. 전 결혼할 사이인줄 몰랐죠.”
“결혼을 하기로 한건 아니에요.”
“예?”
“홍준이는 저랑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자랐는데 오늘 결혼을 하자고 해서…….”
“…….”
“저도 좀 당황스러웠어요. 미안해요.”
“근데 발목은 왜 그래요?”
“아. 등산 갔다가 넘어져서. 올라가다보니 길이 얼었더라구요. 난 생각두 못하구…….”
“발목도 아픈데 어떻게 집에 왔어요?”
정민은 자신의 처지에 착잡했는데 지혜와 얘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훨씬 가볍다.
지혜와 계속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준의 일방적인 얘기였다면 정민은 지혜를 못 만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서울은 언제 가세요?”
“글쎄요. 호텔에 계속 지내기도 그렇구.”
“지혜씨 방 하나만 내주세요. 하하.”
“치. 말도 안돼.”
둘은 차와 함께 케이크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호텔에 돌아온 정민은 지혜와 홍준 사이에 자기가 괜히 방해를 하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다음날 정민은 호텔 체크아웃하고 호텔을 나선다.
지혜가 일하는 매장 밖에서 지혜 모습을 바라본다.
정민은 다가가지 않고 문자메시지만 남기고 돌아간다.
정민은 공항에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비행기 시간은 되어가지만 정민의 마음은 아직 서귀포에 있는 듯하다.
지혜는 매장에서 문자메시지를 읽는다.
정민이가 오늘 서울로 올라간다고 한다.
또 보자는 메시지.
기약은 없을 것 같다.
보육원에 함께 있었던 모습과 지혜 앞에서 신나서 떠들던 정민의 모습이 떠오른다.
#20
정민은 비행기를 타지 않고 다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보육원에 갔던 날 가까이에서 보았던 주상절리대 위에 서있다.
겨울 바닷바람이 온 몸을 휘감는다.
거센 파도 해안에 당당하기도 하다
하늘이 세워 놓은 주상절리
사명을 받들어 다하는 듯
적년누월 바람 받으며 버티고 있구나
왜놈들이 임진년 조선 침략에도
이 섬에 발 딛지 않은 것은
주상절리 세운 하늘의 뜻인가 하노라
지혜는 평소와 같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한다.
정민이 휴대폰 문자메시지 달랑 남기고 가버린걸 생각하니 섭섭하기 그지없다.
‘급한 일이 생겼나? 이렇게 갈거면서 왜 그런거야?’
얄밉기도 하고 자꾸 신경이 쓰인다.
휴대폰을 보지만 이후 메시지도 없다.
전화를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차마 걸지 못했다.
날이 추워 입김이 난다.
서운한건지 보고싶은건지 지혜는 애써 잊으려 한다.
지혜는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추운 날씨에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정민씨.”
“지혜씨 왔어요?”
정민이 상기된 얼굴로 앉아서 싱긋 웃고 있다.
“어떻게 된거에요? 서울에 간다고...”
정민은 일어나 지혜를 덥썩 안는다.
“미안해요. 보고 싶어서 왔어요.”
지혜는 그대로 얼어버리고 만다.
정민의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정민의 이마에 손을 짚어본다.
“뭐에요? 열이 불덩이에요.”
“괜찮아요.”
지혜는 정민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방에 쉬도록 한다.
따뜻하게 누워있으니 입이 마르고 몸살 기운에 잠이 온다.
금새 지혜가 약을 사와 정민에게 먹게 한다.
정민은 지혜의 향기가 가득한 자리에서 스르르 잠이 든다.
#21
자는 동안 땀을 많이 흘린 듯 하다.
달그닥 소리에 정민이 눈을 뜬다.
한결 몸이 가벼운 것 같다.
방문을 열어보니 지혜가 음식을 만드는 것 같다.
“깼어요? 좀 괜찮아요?”
걱정스레 지혜가 묻는다.
“출근 안했어요?”
“그냥 하루 휴가 냈어요.”
지혜의 집에서 눈앞에서 요리를 하는 지혜를 보니 꿈만 같다.
“고마워요.”
정민은 지혜를 안는다.
지혜도 정민을 안아준다.
지혜와 정민이 함께 방에 누워있다.
지혜가 부끄러운 듯 옷을 입고 나간다.
잠시 후 죽을 마저 끓인 지혜가 정민을 부른다.
“식사해요.”
“잘 먹을게요.”
정민이 웃으며 죽을 맛있게 먹는다.
“와. 요리도 잘 하네요.”
“치.”
지혜와 정민이 바라보며 웃는다.
둘은 오후에 함께 시내에 나간다.
상가에서 쇼핑도 하고 시장에서 장을 본다.
집에 함께 저녁을 해먹고 정민은 지혜에게 자신이 썼던 글들을 보여준다.
지혜가 한참이나 말없이 글을 읽는다.
“재미없죠?”
정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묻는다.
“아니요. 글이 그냥 정민씨 같아요. 누가봐도 그냥 정민씨가 쓴 글 같아요.”
“하하. 그래요?”
“네. 정민씨는 좋은 작가에요.”
둘은 와인을 음미하며 밤늦도록 서로의 이야기에 끝이 없다.
지혜은 매장에 일을 하러 갔다.
정민은 지혜의 집에 혼자 남아 노트북을 두드린다.
늦은 오후 정민이 장을 보러 나간다.
지혜가 집에 돌아온다.
“지혜씨 내일 또 보육원 간다고 했죠?”
“네. 같이 가게요?”
“그럼요. 짜잔.”
정민은 장을 봐온 김밥 재료를 내민다.
“저도 도시락 만들어야죠.”
“하하. 김밥 잘 만들어요?”
“가르쳐주면. 하하.”
아침 일찍 지혜와 정민은 김밥을 싼다.
정민은 서툰 손으로 김밥 싸보지만 지혜가 만든 김밥이랑 너무 다르다.
“자. 요렇게.”
정민은 오물조물 지혜가 싼 김밥이 예쁘기만 하다.
지혜는 어렵게 자립을 하면서도 이렇게 쉬는 날에 보육원 아이들을 찾아갔을 것이다.
정민은 보통의 학생들이 봉사활동 점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여하고 자원봉사 자체가 금전화 되어가는 모습이 생각났다.
지혜는 아이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며 본인의 어린 시절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민은 스스로 지혜처럼 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정민은 자기가 만 김밥이 못생긴 이유를 왠지 알것만 같았다.
가는 손목 작은 얼굴 풀잎 향기 스며있어
어딜 봐도 여리고도 사랑스러워
하지 못한 할 수 없던 많은 말들 홀로 삼키고
여러 날을 눈물로 베겟잇을 적시었겠지요
당신의 맺힌 아픔 내게 말해 주겠나요
당신 지나온 길까지 불을 밝혀 주겠어요
당신의 두 손 꼬옥 잡고서
말없이 다독이며 곁에 있어 주겠어요
#22
둘이서 탄 버스 창밖으로 흰 눈이 내리고 있다.
정민은 살며시 지혜의 손을 잡는다.
항상 지혜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보육원에 가니 최선생이 둘을 반긴다.
“추운데 어서 들어와.”
“잘 계셨죠? 원장님은 ......”
“감기 기운이 있으셔서 근처 병원에 가셨어.”
“많이 안 좋으세요?”
지혜가 걱정스레 묻는다.
“기침이 심하셔서…….”
정민은 처음 왔을 때 잘 보지 못했던 보육원을 둘러본다.
잘 정돈된 아이들 방과 공부방 낡았지만 단정한 모습이 정감 있다.
복도에 걸린 사진들이 보인다.
지금 여기에 지내는 아이들 사진과 오래된 사진들도 보인다.
“이게 저에요.”
정민의 옆에 다가선 지혜가 오래된 아이들 사진을 가리킨다.
“되게 조그맣죠.”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원장 옆에 서있는 조그만 아이.
동그란 눈에 머리는 모두 뒤로 모아 묶고 원피스에 하얀 구두를 신었다.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리디. 어린 아이지만 한눈에 봐도 지혜 사진 같다.
“정말 귀엽네요.”
“서귀포 시장에서 혼자 울고 있었데요.”
“…….”
‘지혜씨는 어쩌다 저렇게 어릴 때 여기 오게 된 걸까.’
원장이 병원 진료를 받고 돌아온다.
지혜가 원장실에서 함께 들어가 마주 앉는다.
원장이 담배 파이프를 문다.
“원장님 담배 그만 태우세요. 기침도 많이 하신다면서요.”
지혜가 원장에게 걱정스레 묻는다.
“괜찮아. 그냥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그래.”
“지혜 너도 이젠 쉬는 날엔 니 볼일도 보고 여기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어.”
원장이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불어낸다.
“저 친구는 서울이 집이랬나? 선하게 생긴 게 지혜 너랑 참 닮았구나.”
“그래요?”
지혜가 쑥스러운 듯 웃는다.
“지혜야, 난 니가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면 그뿐이다.”
“.......”
함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돕고 저녁이 되어 보육원을 나선다.
버스에 내려 지혜의 집으로 지혜의 손을 잡고 걷는다.
정민이 별 말이 없다.
“정민씨 피곤하죠?”
“아니에요. 그냥…….”
“…….”
“저번처럼 보육원을 다녀오면 그냥 마음이 좀 그래요.”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처럼 언제라도 엄마나 아빠가 있는 곳에 살 수 없을까……. 아이들이 밝아서 좋지만 왠지 뭔가 허전해요. 그냥 제 생각이지만…….”
“누굴 탓하겠어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정민보다 태연한 지혜다.
정민이 지혜를 안는다.
“누가 봐요. 정민씨.”
“잠시만요. 잠시만 이대로 있어줘요.”
정민은 지혜가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럽다.
왠지 오히려 정민이 지혜에게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23
지혜를 기다리던 홍준은 멀리서 다정히 걸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다.
홍준은 설마 했던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두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는 걸 바라만 본다.
홍준은 조용히 돌아서 간다.
항구 주변의 어느 식당에 들어가 소주를 한잔 들이킨다.
홍준은 그 동안 자신에 큰 힘이 되어주던 지혜를 포기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철저히 자신을 관리하며 지금 이 자리까지에 있는 냉철한 홍준이다.
지혜와의 미래를 꿈꿨지만 홍준은 세상사 모든 일이 다 억지로 되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깊은 밤 정민은 악몽을 꾼다.
정민의 엄마가 젊은 시절 모습으로 대성통곡을 한다.
어리고 작은 정민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있다.
엄마는 너무도 서럽게 울고 있다.
정민에게도 그 슬픔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잠에서 깬 정민이 일어나 앉는다.
너무나 꿈이 생생해 서늘한 기분이 든다.
옆에 누어있는 지혜는 쌔근쌔근 곤히 자고 있다.
“지혜씨, 저랑 서울 다녀올까요?”
아침이 되어 정민이 지혜에게 묻는다.
“서울이요?”
“네. 같이 저희 집에도 가보구요.”
“다음 달에 나요. 지금 매장 성수기라 바쁘기도 하구요.”
“그럼 그럴까요?”
정민은 이번에 혼자 서울에 다녀오기로 한다.
지혜가 출근하고 난 후 정민은 비행기 시간을 확인하고 가방을 정리한다.
“정민이 왔구나.”
“별 일 없으셨죠?”
정민 엄마가 정민을 반갑게 맞는다.
“우리 아들 얼굴이 핼쑥해졌네.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닌 거야?”
“그럼요.”
정민 엄마는 혼자 있을 때는 거의 요리를 잘 하지 않았지만 아들이 온다는 얘기에 장을 보고 정민이 좋아하는 반찬들을 해두었다.
정민은 엄마가 차려준 식사를 하고 한참 비워두었던 방에 들어가 노트북부터 꺼내 앉는다.
아직 다하지 못한 작품이지만 원고를 다시 처음 장부터 들여다보며 노트북을 두드린다.
종이 노트를 꺼내 본다.
제주에서 스케치한 노트를 보다보니 지혜가 벌써 보고 싶다.
서울이든 제주든 지혜와 함께 지내는 달콤한 상상에 잠시 빠져본다.
‘지혜씨처럼 부지런하게 글도 쓰고 다른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지혜로 인해 정민은 자립의 각오를 단단히 한다.
정민 엄마는 아들이 집에 와서 든든한 것 같다.
정민에게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아들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 않아 초초해 진다.
다음날 정민 엄마는 혼자서 다시 병원을 찾는다.
“지난번 말씀드린 데로 당뇨성 질환 때문에 망막 손상까지 의심됩니다. 수술을 진행해 볼 수도 있는데 지금 상태에서 시력 회복은 어려울 듯합니다.”
의사는 정민 엄마에게 약물 치료와 함께 수술도 필요하다고 한다.
정민 엄마는 당장 수술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병원 밖을 나서니 눈이 부시다.
‘시력이 너무 나빠지면 어쩌지? 정민이한테 얘기를 해야 할까?’
정민 엄마는 아들을 보기가 더 겁이 난다.
정민 엄마는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주려고 장을 봐서 들어간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음. 시장에 좀 다녀왔어.”
정민 엄마는 다른 내색 없이 주방에 들어간다.
정민은 엄마와 저녁을 먹는다.
엄마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정민은 서울에 왔을 때부터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엄마 제주에 정말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어요.”
“오. 그래?”
“네. 다음에 한번 같이 서울에 올게요.”
“혹시 여자 친구니?”
“네. 하하.”
“그래? 그럼 빨리 한번 보고 싶구나. 우리 아들 여자 친군데.”
엄마가 빨리 보고 싶다는 말에 정민은 환한 얼굴로 지혜를 빨리 데려와서 인사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24
정민은 자기 방에 들어가자 곧바로 지혜에게 전화를 건다.
“지혜씨 잘 있죠? 하하.”
“저 빨리 지혜씨 보고 싶어요.”
“네네. 집에 들어가면 전화해요.”
정민 엄마는 정민이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얘기에 정민의 아빠 생각이 난다.
정민의 아빠는 규모가 큰 철강회사를 운영하며 국내 내로라하는 큰 회사들과 거래 관계에 있었다.
‘그 일만 아이었다면…….’
80년대 후반에 걸쳐 90년대에 우리나라는 높은 경제 성장률을 이루고 있었고 이에 따른 상류층의 사치 문화가 이슈화되기도 했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취업난과 비정규직 차별 대우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취업률도 높고 예술이나 사회 문화를 모두가 누리는 분위기였다.
이후 곧 불어 닥칠 경제의 폭탄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정민 엄마는 남편과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정민을 낳아 정민이 세 살이 되었을 시기 제주도 여행을 갔다.
당시 겨울 바다를 여행가는 유행에 정민 엄마는 남편을 졸라 함께 제주 가족여행을 갔다.
거의 일주일 스케줄로 제주 여행을 하던 중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정민 아빠 회사의 주 거래처들이 하나씩 부도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들이 터져 나왔다.
회사에 직격탄이 될 사건들로 정민 아빠는 가족들을 호텔에 남기고 먼저 한시가 바쁘게 서울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 후로 정민 엄마는 살아있는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정민은 엄마와 거실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정민아."
“정민아 사실은 말이야. 넌 기억 못하겠지만 니가 세살 될 무렵 제주도에 갔을때……."
정민 엄마는 힘들게 얘기를 꺼낸다.
이제라도 정민에게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제주도에 가게 되고 일어난 가슴 아픈 일들을 털어 놓는다.
“아빠가 먼저 서울에 올라가고 너랑 니 동생이랑 셋이 있다 그만 시장 통에서 니 동생을 잃어버렸어. 흑흑흑……."
"엄마……."
“그땐 너무 경황이 없었단다.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아빠라도 있었으면……. 미안하다. 흑흑흑……."
정민은 제주에서 꾼 악몽이 떠오르며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다.
“내 눈이 보이는 동안 지금이라도 니 동생 지영이. 지영이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구나.”
“엄마 눈이 왜요? 눈이 보이지 않다니요!"
정민 엄마는 사진 한 장을 정민 앞에 내민다.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제주 성산 일출봉에서 찍은 네 명의 가족의 사진이다.
엄마가 이 사진을 혼자 얼마나 간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진을 보자마자 정민의 눈에 동그란 눈을 하고 머리를 뒤로 묶고 흰 구두를 신은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보육원 복도에 걸린 오래된 사진에서 봤던 그 아이.
지혜가 자기 사진이라고 했던 그 사진 속 아이.
‘아니 지혜씨가 왜? 이게 어찌된 일이지?’
정민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민 엄마는 병원에서 시력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얘길 털어 놓는다.
"수술하면 괜찮을 거에요. 엄마. 걱정마세요. 네?"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정민 엄마는 참았던 슬픔이 터져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흑흑흑…….’
‘아니야. 뭔가 잘못 된 거야. 이럴 리가……. 가족이라니…….’
정민은 사진을 집어 들고 자기 방에 들어온다.
‘설마……. 아니야.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
정민은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지혜와 했던 얘기들이 떠오른다.
'우리 동갑이네요. 하하.’
‘요 사진 저 아이가 저에요. 서귀포 시장에서 혼자 울고 있었데요.’
‘누굴 탓하겠어요. 보육원에 보내진것두 다 이유가 있었겠죠.’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는 이란성 쌍둥이 지영이.
정민은 자신의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는 게 마치 꿈 같기도 하고 기억에 거의 남은 게 없었다.
사진을 들고 있는 정민의 손이 몹시 떨리고 있다.
정민의 휴대폰이 울린다.
지혜의 전화다.
정민의 심장이 요동을 친다.
지금 정민은 도저히 지혜의 전화를 받을 수가 없다.
아니 받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럴리 없어. 지혜씨가 나와 쌍둥이 남매라니…….’
'뭔가 다른 오해가 있는거야. 분명…….’
#25
지혜는 며칠 동안 정민과 통화가 되지 않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무슨 일 생겼나? 사고라도 났으면 어쩌지?’
금방이라도 지혜를 만나러 달려올 정민이었다.
갑자기 연락이 닿지 않아 답답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서울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금 더 기다리면 연락이 올거야. 무슨 사정이 있겠지.'
지혜는 최근 몸이 이상한 걸 느꼈다.
매달 있던 생리 현상도 없다.
도통 음식도 먹지 못하고 정민이 걱정 때문에 신경써서 그런거라 생각했다.
'설마…….’
지혜는 퇴근하며 약국에 들린다.
혹시나 하는 임신 테스기를 사왔다.
처음으로 혼자서 임신 테스트를 하는 지혜의 얼굴에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설마 했지만 테스트기에 드러나는 선명한 두 줄.
‘어쩌면 좋아.’
지혜는 놀랍기도 하고 미쳐 예상하지 못한 일에 눈물을 글썽인다.
지혜는 정민이 오면 함께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조금 스스로 진정해보며 지혜는 정민에게 다시 전화를 해본다.
정민의 전화는 여전히 꺼져있다.
어떡해야 할지 혼자 고민되고 두렵기도 하다.
당장 정민에게 얘기 해주고 싶다.
'정민씨가 놀라지 않을까? 싫어하지 않을까? 정민씨 어머니도 못뵈었는데…….'
지혜는 온갖 상상이 떠오른다.
정민은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도무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납득할 수 없다.
하지만 정민은 지혜가 너무나 보고 싶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화조차 하기가 겁이 난다.
'지혜씨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지혜씨. 우리 어떡해야 해요.'
정미은 제 정신으로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조용한 술집에 혼자 술을 마신다.
지혜를 만난 날부터 지혜와 함께 한 날들이 영화 장면처럼 머리속을 스친다.
술잔을 비워내도 도무지 취하지 않는것 같다.
"안돼……. 제발…….”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정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정민은 몇번이고 지혜와 통화를 하려 했지만 몇일째 차마 하지 못하고 있다.
정민은 술에 취해 길가 벤치에 걸터 앉는다.
지혜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쯤 얼마나 날 원망하고 있을까.’
'지혜씨에게 얘기 할 수 없어. 그럴순 없어.'
정민은 이 지옥 같은 운명을 지혜와 엄마에게 알게 하고 싶지 않다.
정민은 또 술집에 있다가 나와 꺼두었던 휴대폰을 켠다
그리곤 지혜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정민씨!"
"…….”
"여보세요?"
정민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혜씨……. 지혜씨. 미안해요. 전 돌아가지 못할것 같아요.”
“정민씨. 갑자기 무슨…….”
“돌아가지 않는다구요. 그렇게 알아주세요. 미안해요."
정민은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정민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 구역질을 해댄다.
오늘 저녁에도 집에서 초조하게 정민의 연락을 기다리던 지혜였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정민의 한마디로 통화는 끝이었다.
다시 걸어보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지혜의 눈에 눈물이 맺혀 이내 주르르 흘러 내린다.
'정민씨. 대체 왜 나에게 이러는 거에요.'
너무나 서글프고 외롭다.
지혜는 잠시나마 정민과 오순도순 단란한 가족을 꿈꿔 보았었다.
임신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지혜는 눈물이 멎질 않는다.
곧 목놓아 울어버리고 만다.
여태껏 이렇게 절망적인 적은 없었던것 같다.
이후 몇일이 지나도 정민에게서 더이상 연락조차 없다.
지혜는 임신을 핑계로 정민에게 매달릴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
보육원에 살고 나와서도 꿋꿋이 자립한 지혜다.
지혜에게 자기 안에 새 새명이 있음은 그 어떤 누구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지혜은 마음을 다잡는다.
몇 주나 지났을까.
정민은 핼쑥해진 얼굴로 제주행 비행기에 오른다.
지혜가 잘 지내는지 걱정돼 견딜 수가 없다.
남매로서든 아니 여자로서든 정민에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
멀리서라도 지혜가 지내는 모습을 봐야겠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지혜씨도 날 포기하고 있을거야.'
'날 얼마나 미워하고 있을까.'
정민은 서귀포 관광단지로 향한다.
지혜가 일하는 쇼핑몰 멀리에 서서 지혜를 찾아본다.
두어 시간을 서성이며 지혜를 찾아보지만 지혜가 보이지 않는다.
매장에는 지혜와 함께 일하던 직원만 보인다.
정민은 긴장한 모습으로 가영에게 다가간다.
“혹시 지혜씨 오늘 없나요?"
“지혜 일 그만뒀어요. 갑자기 해외로 가게 되었다고…….”
가영의 말에 정민은 뭔가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네? 언제요? 어디루요?"
"저도 연락이 안돼서…….”
가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정민은 쇼핑몰을 뛰어 나간다.
정민은 서둘러 지혜의 집으로 가보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다.
정민은 해가 지고 나서야 보육원에 도착한다.
보육원에 들어서자 홍준이가 보인다.
“너 이 자식!”
홍준이 정민을 보자마자 멱살을 잡고 흔든다.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어. 너 이 자식! 지혜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
원장과 최선생이 달려 나와 홍준을 뜯어 말린다.
“지혜. 지혜 어디 있습니까!”
“지혜가 편지만 남기고 떠났네.”
“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정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우리도 지혜를 찾고 있었다네."
“지혜를 만나야겠습니다. 제발 알려주세요!"
"이 자식! 너 미쳤어?"
흥분한 홍준이 다시 정민을 잡고 흔든다.
정민에게 지금 홍준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하다.
'지혜야! 어딜 간거니!'
정민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주상절리 해안 절벽 위에 섰다.
어두컴컴한 바다.
시커먼 파도가 무엇이든 집어 삼킬 듯이 바위를 몰아친다.
파도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지혜야……. 지혜야…….'
정민은 마음 속으로 한없이 지혜를 불러본다.
신이시어
에덴을 꾸며주고
선악과는 어찌 만들어 두셨소
신이시어
당신이 놓은 덫에 걸려
내 이 심장에 박히는 고통을 아시겠소
신이시어
저승에 지옥이 괴롭다한들
이승에 이 지독한 괴로움은 무엇이냔 말이오
내 육신 죽어 당신 앞에 가는 날
당신의 에덴이 지옥이었다 하리라
내 당신 앞에 서는 그날
이승에 괴로움을 당신에게 탓하겠소
신이시어
신이시어
정민은 지혜가 얼마나 힘들어할지 마음이 찢어지는 듯 하다.
'대체 어디에 있는거니 지혜야…….'
바다는 아무런 말이 없다.
중년이 된 정민이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정민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집안에도 서귀포 겨울의 바닷바람 소리가 울린다.
그간 몇 권의 책을 쓰고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정민은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오직 글을 쓰는 것 외에는 가혹하게도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키고 있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정민은 담뱃불을 끄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는다.
초겨울의 타이페이는 한국보다 훨씬 따뜻했다.
타이베이 시내 어느 관광회사 사무실.
여전한 모습의 지혜가 사무실 팀원들과 다음 주 단체 관광객들 스케줄을 점검하고 있다.
팀원들에게 이것저것 꼼꼼히 체크를 하는 지혜.
회의를 마치고 지혜는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선다.
익숙한듯 상가에서 식재료를 사들고 그리 멀지 않은 작은 아파트에 들어선다.
“我來了“ (”엄마 왔어.”)
“媽媽!” (“엄마!”)
1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가 나온다.
“你上學好嗎?” (“학교 잘 다녀왔니?”)
지혜는 아이에게 따뜻한 만두를 건넨다.
아이가 지혜에게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린다.
아이를 보는 지혜의 얼굴이 너무나 다정해 보인다.
오늘도 타이페이의 밤이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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