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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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사랑해서 미안하다

ty6646
2008년 05월 16일 00시 36분 40초 1659 1
*'사랑해서 미안하다' 라는 타이틀은 탤런트 김수미씨의 수필집 타이틀에서 가져온 것






이등병의 편지를 듣는다.
마음속으로 흐르는 오래전 그리움이 어디론가 새지도 않고
그대로 내 몸안에 차곡차곡 쌓인다. 넘쳐 흘러내릴 듯 하면서도
한방울도 어디론가 가지도 않은채 그렇게 출렁이고만 있다.

그립다 그립다 그립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가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어디론가로 달려간다.
잠시 망설이던 나도 곧 그녀를 따라 내려 뒤쫓아 달린다.
한참을 숨이 차도록 달린 끝에 굳게 잠긴 어느 가게앞 기둥옆에 기대어 선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그녀도 나도 숨을 고르고, 발로는 땅을 고른다.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어준다.
그녀가 손을 떼려고 하지만 그녀 손을 잡은 내 손은 여전히 굳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다.
그제서야 그 굵고 맑은 눈을 들어올려 나를 바라본다.


『니 담배를 숨긴 것 미안해. 여자들이 담배 피우는 것 이해한다고 말해놓고
이제와서 숨긴 것은 니 말대로 김영삼정권처럼 한 입으로 두말 한 셈이다』


그제서야 그녀는 피식 웃어보여준다. 그리고 손을 빼려고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잡은 내 손은 그녀를 놓치 않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내 눈앞에서 참 맑고 환하게 달처럼 떠 있다.


『그러나 난 니가 담배를 피우던 그렇지 않던 전혀 개의치않는
다른 여자들하고는 다르게 보여. 몸에 안좋다는 담배를 피운다니 걱정스럽기도 하고,
담배를 피워야만 하는 니 근심걱정이 내 마음을 아프게도 한다』


그녀는 일어나 획 돌아서 다시 달려간다. 내 말이 그녀에겐 부담처럼 다가선 모양이다.
내 말이 그녀에겐 심란한 정국보다 더 심란한 모양새로 비춰졌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세게 달려서 내 곁에서 멀어져간다. 그러나 그녀가 지쳐서 주저앉은 그 뒤로는
거친 숨을 고르며 다가서 주저앉는 내가 있다. 나를 보며 무서운 얼굴을 한 그녀는 소리친다.


『돌아가. 이제 오빤 필요없어』

『할말이 있어』

『싫어 듣기 싫어. 몰라 오빠 ? 내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있다구.
그래도 몰라 ? 오빠는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구』

『그래 좋아 하지만, 니가 좋든 싫든 난 할말은 해야겠다. 오늘 여기서 이 시간에
이 말을 뱉어내지 못하면 십수년 뒤에 나 홀로 가슴아프게 되돌아 봐야 할 것만 같단 말야.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내 안에서 곪아 갈지도 몰라. 넌 이대로 돌아서 가면 돼.
니 말대로 나 같은거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니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게아냐.
그냥 그냥 내 안에서 부딪치며 혼자서 멍들어 갈 한마디 말만 뱉어내고 싶어서 그런 것 뿐이야.
넌 이대로 돌아가서 예쁘고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지만, 오늘 이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서는
난 오래오래 힘들고 그리워하고 후회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


입을 다문 그녀는 내가 말하기를 기다려준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앞에두고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나? 한 5미터, 아니 3미터만 떨어졌어도 좋았을런지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빨리 하고 돌아가』
『뭔데 빨리해 벌써 새벽이란 말이야』
『뭔데 이렇게 끌고 그래. 나 시간 없단 말야』



『.................』







오늘 이등병의 편지가 내게 들려준다.
그때 택시에서 내려 달려가는 그녀를 쫓아 나도 달려갔어야 했다는 것을,
그리고 뿌리치는 그녀를 돌려세워 한마디만, 딱 한마디만 뱉어냈어야 했다라는 것을,

아, 이런 젠장,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왜 그녀를 내일도 모래도 만날 수 있을거란 착각을 했을까,
왜 이런 감정따윈 자고일어나면 불꺼진 양초처럼 사늘하게 식어버릴 거라고만 생각했을까.
이렇게도 오랜 세월동안 내 안에서 지쳐가는 이 마음을, 이 가슴엉어리를 왜 그때 뱉어내지 못했던가....



오늘 이런저런 한국음악을 듣는 중에 갑자기 이등병의 편지가 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아득히 먼곳에 두고왔던 그리움에서 불꽃이 일고, 그녀 생각이 내 마음안에 불을 지펴놓는다.
이등병의 편지가 나대신 그녀에게 들려주길 바란다. 그냥 한마디만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지금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 10여년 전의 그녀에게로 가서
나 대신 한마디만 그녀에게 속삭여 주었으면 참 좋겠다.




미안하다... 라고,











월급날 그녀와 동료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다.
그때 그녀가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인지라 따라부를 수가 없어 그냥 가사만 보고 있자니
군대 간 애인넘을 생각하는 노래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나를 생각하며 저런 표정으로 노래불러줄 그녀의 모습을
이 세상에선 찾을 수가 없다라는 것을 알게된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남는 것은 그녀도 아니고, 노래방 카운트의 이쁜이도 아니고..-.-;;
이등병의 편지가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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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man
2008.06.03 22:51
한 때 그녀 없이는 못 살것 같았던 세월이 있었죠..

그런데..
그녀의 이름도 생각이 나질 않는 어느 날...

이게 뭔가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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