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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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독수리

hyulran
2003년 12월 20일 15시 30분 53초 1078 1
해마다 겨울이 되면 중부 시베리아와 몽골 지방의 독수리들이 먹을 것을 찾아 만주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무리지어 이동을 한다고 한다.

몇년 전에 tv에서 보니까 우리나라는 파주가 중간 경유지 역할을 하면서 오랫만에 나타난 독수리를 보호하기 위해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닭과 돼지를 비롯한 먹을 것을 제공해주며 독수리들을 밀렵꾼의 마수가 닿지 않도록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당시 내 눈에 비친 화면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정말 엄청나게 큰 검은 독수리들이 트렌치 코트를 입은 채 잔뜩 목을 움츠리고 있는 독일병정과 같은 자세로 쓸쓸한 논둑에 일렬로 주욱 늘어서서는 벼베기가 끝난 논바닥을 굽어 보며 가끔씩 날개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먹을 것을 실은 트럭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나는 다소 기묘하게 보이던 그 공생관계에 대해서 신기함을 너머 신비감까지 느꼈다. 게다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두푼도 아닌 거액의 예산을 자기 일처럼 십시일반해서 추렴해가며 보호하는 마을 사람들의 독수리에 대한 애정이었다.

그들은 한눈에 봐도 넉넉한 살림 살이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취재를 하던 사람이 왜 독수리 보호에 돈을 쏟아 붓느냐고 하자 착하게 생긴 아저씨는 진솔한 몇마디를 했고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독수리는 해마다 늘어 이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첫해에는 불과 몇십마리였던 것이 지금은 몇백마리로 불어났다니 정말 엄
청난 급증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독수리들끼리도 겨울을 나기에는 파주만한데가 없다고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곳이 포화 상태가 되자 후발주자로 뒤늦게 가세해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된 독수리들이 방향을 틀어 이번에는 철원을 새로운 둥지로 삼아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프로그램을 얼마 전에 볼 수 있었다. 3년 전부터 날아오기 시작한 독수리들은 해마다 50 % 이상씩 늘어나 이제는 그곳의 독수리만 해도 250여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군청과 환경보호연합회 회원들 그리고 관련 공무기관에서 그나마 예산을 보조해 주어 그들의 먹이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소식은 그간의 세월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뒷산에 올라갔다가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에서 나는 눈을 의심하는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독수리 한마리가 내 머리위에서 빙글빙글 회전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처음에는 까마귀나 매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엄청나게 큰 날개를 쫙 펴고는 느긋하게 위 아래로 공중에서 부유를 하며 먹을 것을 찾는 녀석은 틀림없는 독수리였던 것이다. 그것도 한마리가 아니라 4마리씩이나!

동물원에서나 본 적이 있는 독수리를 자연 상태에서 목격하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어쩌랴, 사실인 것을.
나는 그 녀석들이 파주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철원에서 온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지리적 위치상 아마도 파주 보다는 철원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독립심 강한, 미래의 독수리계를 이끌어갈 젊은이들 같았다. 녀석들은 인간이 마련한 먹이에 길들여진 나머지 천연기념물이라는 것 하나만을 믿고 거만한 인상을 주던 파주나 철원의 살찐 독수리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어쨌거나 애초의 목적을 망각하고 한참동안 그것들을 쳐다보다가 나는 산을 내려왔다. 다시 또 언제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날 나는 그 독수리들이 잠시 이곳에 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포식한 닭과 돼지를 소화 시킬 겸 잠시 외출을 한 것이리라 믿으며, 그런데 아니었다.

오늘 낮에 잠시 옥상에 올라갔다가 그림같은 철마산의 정상을 보는데 독수리 두마리가 유유히 날개짓을 하며 공중을 선회하고 있었다. 반가웠다. 그러나 다른 두마리는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쉽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동료들이 우글거리는 세계로 돌아갔거나 아니면 인적이 드문 곳에 따뜻한 둥지를 틀고 있으리라.

파주나 철원에서와 달리 제 힘으로 먹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은 아마도 올 겨울을 이곳에서 나지 않을까 싶다. 자신들의 야성을 유지한채로 말이다.

그들을 만난 것이 내게는 무슨 선물같이 여겨진다.

조금 더 편하고 쉽게 가지 못하더라도 내 자신을 시험하고 인내하도록 부추기라는 하늘의 메세지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날씨가 너무 좋다.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hyulran
글쓴이
2003.12.22 22:15
저도 사실 조금 무서워서 나무 밑에 숨어서 봤습니다. ^^,
정말 크기는 엄청 크더군요.
덕분에 좋은 경험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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