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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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459년전의 시간에서 온 편지

jelsomina jelsomina
2002년 10월 16일 05시 13분 15초 1060 2 1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살라고 나 버리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은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당신께 이렇게 말하고는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엿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하여 그때를 생각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건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는 잊을수가 없고, 서러움 한이 없어요.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하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요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 속에서 당신 말을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당신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내 뱃속의 자식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건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그곳에 가 계신 것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이만 적습니다.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보여 주시며 말해 주세요.

꿈에서 당신을 볼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지만 이만 적습니다.


-병술년(1586) 유월 초 하룻날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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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 박물관에서 공개된...459년전 고성이씨 분묘에서
이응태의 부인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의 전문이랍니다.




젤소미나 입니다.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jelsomina
글쓴이
2002.10.16 05:14
(l)
Profile
hal9000
2002.10.16 15:40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십니까' 이렇게 시작하는 글..
얼마전 놀라운 상태로 발굴된 미이라의 주인공 이응태. 그의 부인이 남기신 글 아닌가요..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줄기로 엮은 미투리를 신고 와서 꿈에서라도 만나뵙기를 바라는 애절한 思夫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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