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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그 여자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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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20일 00시 16분 26초 5545 3
안녕하세요.

김용택 시인은 전라북도 진안에서 분교(전에는 초등학교였지만) 선생님을 하면서
시를 쓰는 분인데요,
시인의 <그 여자네 집>(1998, 창비시선 173, 창작과 비평사) 이라는 시집을 권해드리고 싶어서요.
눈 많이 오고 안개 짙은 강도 있는 시골에 살면서 쓴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의 시가 있어서
요즈음 가방에 넣어두고 천천히 읽고 다니다보면
어쩌다가는 아아, 하고 계절을 느낄 수도 있거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역시 <그 여자네 집>인데요
자판으로 옮겨써보는 것이 살짝 아까워서
여기에다는,  또 좋아하는
<쓰잘데기없는 내 생각>이라고 하는
아저씨의 귀여운 시를 써봤습니다.



    쓰잘데기없는 내 생각
                                                  김용택
    
      구름 한점 없는 가을날
      지리산 피아골 가는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피아골 골짜
    기에서 흘러오는 도랑물 건너  왼쪽에 아주 작은 대숲 마을
    이 하나 산 중턱에 있습니다 혹 그 마을을 눈여겨보신 적이
    있는지요 그 마을을 보고 있노라면 오만가지  생각 중에, 정
    말 오만가지 생각들 중에  아, 저기 저 마을에다가  이 세상
    에서 나만 아는 한 여자를 감추어두고  살았으면 '거 을매나
    좋을꼬' 하는 생각이 바람 없는 날  저녁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혹 댁도 그런 생각을 해보셨
    는지요 어디까지나 이것은 '혹'이지만 말입니다 나도 이따금
    저 마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쓸쓸하고도  달콤한, 그
    러나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나 혼자 할 때가 다 있답니다 아
    내가 이 글을 보면 틀림없이 느긋한 얼굴로 "그래요 그러면
    잘해보세요"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 마을에  지금 가을이 한창이고  지금은 산그늘이 간이
    다 서늘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저 마을로 올라가는 이 세상
    에서 내가 본 길  중에서 가장 신비한 꼬불꼬불한 외길에도
    산그늘이 내리면서 희미하게 길이 묻히려 합니다 그 가늘디
    가는 길 왼쪽에는 지금  산비탈을 따라 작은 논다랑지 벼들
    이 노란 병아리처럼 층층이  마을을 따라 올라가며 물이 들
    었습니다 노란색 중에서 나는 저 벼 익어가는 노란 색을 제
    일 좋아합니다 초가을이면 저  노란 벼들을 보며 이루 헤아
    릴 수 없는 오만가지 생각들 중에서 나는 한가지 생각도 건
    지지 못하고 벼가  다 넘어지도록 설레기만  하다 맙니다만,
    그나저나 옛날에 저 흰 실밥 같은 외길에서 새로 시집온 새
    색시가 외간 남자와 딱  마주쳤을 때는 어떻게 서로 비껴갔
    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그  실밥 같은
    외길에도 숨쉴 곳은 있습니다 그 외길 중간쯤에는 감나무가
    한그루 있는데요 그 감나무 밑에는 용케도 커다란 바윗덩이
    가 하나 있어  그 바윗덩이 옆에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까지 발걸음을  잘 맞추었겠거니, 거기에다가  사람들은
    숨을 쉬었겠거니 하는 생각이 내 생각입니다
    
      경제도 어려운데 이런 생각이 그 얼마나 쓰잘데기없는 생
    각인지요
    
      여기까지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는지 우리 어머
    님이 이불 꿰매다 검은 머리에 얹어둔 실밥 같은 외길이 가
    물가물 깜박깜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쓰잘데기없
    는 내  생각도 여기에서 가물가물  사라지려 합니다 그러나
    발걸음이 요량대로 잘못  맞추어졌을 때는 어떻게 하였을까
    당최 생각이 안나능만요 또  다만입니다만 그럴 때 딱 마주
    서서는 어떤 남정네는 해  넘어가는 지리산 그 어떤 산날망
    을 킁킁하며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 어떤 새색시는 눈을 내
    리깔고는 그 가늘디가는  길바닥을 내려다보며 안절부절 몸
    둘 데를 몰라 했는지  모르지요 아무튼 해는 져서 어두우니
    그들을 그냥  거기다가 세워두고 나는  갈랑만요 내가 가는
    길이야 얼마든지 비낄 수  있는 길이니까요 허지만 가기 전
    에 그 감나무 아래 아주 좁은 공터에다가 크게 숨이나 한번
    푹 쉬고 갈라요
    
      지리산 피아골 가는 길 초꺼듬 왼쪽 도랑물 건너 산 중턱
    에 있는 아주 작은  대숲 마을을 보셨는지요 보셨다면은 그
    마을이 소생에게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게 한 마을
    이구나 하며 그냥 흘긋 스치십시오
      거길 누구랑 갔냐구요
      이 세상에서 절대 그냥 비낄 수 없는 사람이랑 같이 갔구
    만요
    



오랫만에 책을 꺼내서 열어보니까 맨 뒤 힌 종이에는
99년 10월 9일이라고, 날짜가 써있고요
꼭 한장씩 들어있는 독서회원카아-드에는

보내는 사람 이택경
주소 서울시
-----------
구입하신 책의 이름은? 그 여자네 집
이름:이택경 나이:24

라고 써있는데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어느 서점에서 읽다가
구석에 서있는채로 고만,
찡하실지도 모르지만요.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vincent
2001.10.20 05:37
<그 여자네 집> 읽고 시인처럼 덩달아 마음 졸이고 있을 때, 막 MBC에서 드라마 <그 여자네 집>이 시작해서 김용택시인 얘긴줄 알았다니깐요. --;;
mee4004
2001.10.24 15:25
음...박완서님이 따왔다는 소설 제목 <그 여자네 집>...소설책 보면서 시 한번 봐야하는데...했었는데..
Profile
game04
2001.12.24 20:44
제가 젤 좋아하는 시인이지요..^^
특히 그 분의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를 제일 좋아
합니다..^^;;
안녕하세요?! 아주 오랜만에 글을 보니,
반갑더군요~ 잘 지내시는지 궁금해지는걸요..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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