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도계 이야기
iyagiya
2004.09.21 00:43:30
도계시사회를 가던 날 아침, 몰래 빠져 나오려 했는데 아이도 아내도 깨우고 말았습니다.
이제 17개월 된 딸아이는 아빠가 한번 강원도에 가면 오래 걸린다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 챘는지 계속 매달리며 칭얼거립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아파트 1층 현관 앞까지 데리고 나와 이별의 시간을 늘렸습니다.
“아빠, 하루만 자고 금방 올 거야.”
말을 알아들은 건지 졸린 건지, 그제야 아이가 “빠이빠이” 하며 손을 흔듭니다.
안심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당신도 그 영화랑 빠이빠이 잘하고 와!”
도계 시사회는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40년만에 영화를 다시 봤다는 노인들부터,
‘12세 미만 관람불가’에도 불구하고 젊은 엄마 아빠 손잡고 온,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영화란 걸 보게 된 아이들까지...
영화 상영후 도계 부흥에 대해 말씀하시던 할아버지부터,
두 번이나 보고 가면서 서울 어느 극장에서 상영하느냐며 자식들에게 꼭 보게 하겠다며 총총히 사라지시던 아주머니까지...
한 회에 약 500명씩, 3회 상영이니까 대략 1500명의 주민들이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도계 인구가 만오천명이라니까 도계 주민 십분의 일이 영화를 본 셈이지요.
그간 우리가 촬영 중에 받은 도움에 비하면 너무 작은 성의였지만,
도계 시사회는 또다시 주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났습니다.
마지막 상영 후 스탭들은, 해지는 도계중학교를 배경으로 관악부 아이들과 선생님과 아쉬운 기념촬영을 하고 또 하고...
셋으로 나뉜 스탭들 중 우리 일행-감독님과 그의 연희, 조감독님과 그의 수연(?), 편집실 ㄱ양과 연출부 ㄱ군, 그리고 저까지 일곱-은 현우와 수연, 현우와 경수가 만나던 바닷가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습니다.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꽃봄> 대사 패러디를 해가며 허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오징어잡이 불빛이 빛나는 밤바다를 보며 남몰래 감상에 젖기도 하고...
다음날 굽이굽이 고갯길을 타고 도계와 다시 일별한 후, 태백 들러 영월 지나 봉평 거쳐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사북 지나 어디쯤에선가 맑은 가을햇살 속에 코스모스 피어있고 벼이삭 누렇게 익은 창밖을 보며 잠시 생각합니다.
‘안녕 도계, 빠이빠이 꽃봄’
여독 때문인지 늦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딸아이는 제가 현관 쪽으로만 가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안깁니다.
“아빠 어디 안 가. 이제 백수야!”
아이를 안고 어르고 놀아주다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고 장성한 관악부 아이들도 보이고...
잠결에 아내와 딸아이의 환호성이 들립니다.
딸아이가 드디어 유아용 변기에 쉬를 한 것입니다.
아빠가 백수 됐다는 말에 기저귀 값이라도 아껴보려는 우리 딸, 참 효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