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후유증

jelsomina 2001.07.07 17:02:22
날이 참 덮다
상가까지 한 몇백 미터 걸어가야 되는데 귀찮아서 차를 가져갔다 왔다
이가 아파서 진통제 사러 갔다가 담배도 사고 비디오도 빌려왔다

왓 위민 원트.. 크림슨 리버. 60 세컨즈..- (안제리나 졸리 볼려고)

...

원래 하늘은 저런걸꺼야 싶던 정선 어느 오지마을에서의 하늘이
생각난다
바로 어제 일인데 ...

한치(정선의 어느 마을 이름) 동네 가운데 1000년 된 느릅나무 밑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우리 제작부장님이 걸어왔다

촬영 올 때부터 서 있던 파란색 트럭이 하나 있었다
그 뒤에 조명 셋팅을 해놓았었는데 ..

그 주인 할아버지가 벌써 한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다는거다
내 생각엔 당장이라도 촬영중단하고 차를 빼주고 싶었지만 ...

다음컷 준비할때 차를 빼가시는 할아버지 뭐라고 싫은소리 한마디 하지 않으신다

촬영이 끝나고 차를 가지고 나가려는데
내가 차를 세워두었던 집 아주머니께서 ..쓰레기 좀 치워가 달라고
부탁을 하신다
돌아보니 ... 정말 사방에 쓰레기다
다 우리가 버려놓은 ..  


"이따가 제작부가 치워갈꺼예요 .. "

아주머니 내 한마디에 그냥 알았다는 웃음을 보이신다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기를 ...

그 마을에는 큰 나무가 많았다

1000 년 생 그 옆에 660년 생
출연하셨던 할아버지 할머니 집 옆에 500년 생

500년 생이랑 660년 생 짜리는 1000년 된 나무에 비해서 아직 애덜이다 . 딱 눈에 보기에도 그렇다 ..
다 느릅나무 이다

예전에 아라리 부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찾아 갔다가 만난 분들인데 ..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1번째 컷은 .. 마을로 들어서는 상우차 .
길을 가시는 할아버지에게 길을 묻는다

은수 : *** 할아버지 댁 아세요 ?

보나 마나 계속 NG
뙤약볕에 기다리시는 할아버지에게 시원한거 드리러 갔는데
음료수 좀 드릴까요 했더니 "난 소주밖에 안먹어" 하셨단다

하루종일 똑같은 아라리를 수십번도 더 부르시며 기압 단단히 받는다고 웃던 할아버지 .
할아버지가 워낙 술을 좋아하셔서 옆에 앉은 할머니 계속 술 그만 드리라고 ..그만 드리라고 ..

서산에 지는해는 지고 싶어 지겠나
날 떠나는 우리님은 가고 싶어 가겠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씬이 바뀌어서 나무밑 촬영.
집에서 할까 ..나무밑에서 할까 고민하시다가
여름이 더 잘보이니까 .. 나무밑으로 결정 ..
1 2 3번째 컷을 다 찍고 1번째 컷을 다시 찍어보자신다

그 말씀을 드렸더니 김치 가져오는거 또 해야 되냐고
벌써부터 긴장하시는 할머니

상우랑 은수랑 아라리 할아버지를 만나서 동네 나무밑에서 아라리 노래해 달라고 조르는 장면

할아버지는 예전엔 누가 가정주부들이랑 노래를 하냐고
요새야 세상이 변해서 그렇지 ..옛날엔 안그랫다고
색시 집에 가야 부른다고 .. 소주를 드시는데

그럴때 김치를 가져 오시는 할머니
화면 EDGE로 빠지시면 안된다고 얘기해 드렸더니
조심스레 걸어오신다

걸어와서 무뚝뚝하게 달랑 김치 한 종지를 할아버지에게 쑥 내밀고
가만히 서서 ..
상우 은수 두 사람을  살펴 보다가 둘이 오누이냐고 묻는 장면

벌서 몇번의 NG가 나고 ..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보자고 해서
모두들 조마조마 ...
그렇게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해는 자꾸 지고
산 위로 한 10쎈티 정도 박에 남지 않은 상황..

해가 워낙 낮아서 나무 그림자가 더이상 생기지 않고
4(?)명의 배우가 해를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

조명팀은 부지런히 나뭇잎으로 위장 하고 ..카메라도 나뭇잎으로 잔뜩 위장을 했다
모니터 왼쪽 아래 작은 손그림자가 하나 들어와서 까닥까닥 장난을 치고 있다
모두들 저거 "누구야 누구야 누구 손이야 손치워 .." 하는데  
알고 보니 위장된 카메라 옆에 선 김형구 촬영 감독님의 손
말 없이 여기 비니까 위장을 더 하라는 수 신호  
나중에 영화 보실때 ..잘 찾아보면 나뭇이으로 위장한 카메라와
촬영감독님의 그림자를 찾으실수 있을겁니다. ^^
나중에 는 카메라를 옮겼지만 ..혹시 그 전의 take가 편집에 쓰인다면 잘 찾아보세요 ...화면안의 숨은그림찾기

슛 사인이 나고 .. 준비 !
하나 둘 딱딱이 치고 .. 셋 ..
나무 뒤에 숨은 덕희가 할머니에게 수신호로 출발 신호를 주고
엣지로 빠지지 않으려고 나무 밑 시멘트 (-.-) 언저리 옆으로
조심스레 걸어와서는 ... 김치는 잘 전해 주었는데 ..
옆에 앉으셔서는 계속 배우들 얼굴만 보고 계신다
쭈볏주볏 .. 말할 틈을 못찾고 .. 몇번을 그렇게 보시던지 ..
기어이 카메라를 보고야 마시는  할머니 " 나 어떡해 " 하는 표정

스텝들 모두 웃고 .. 다시 ..
해는 이제 8센티 ..^^

빨리 ~ 빨리 ..!  - 이런적 진짜 드문데 ..

이번엔 둘이 남매야 ... 잘 하시고는 본인도 만족하신듯 ..
카메라 보고 웃으신다 ...NG !

다시 ..부랴부랴 서둘러서 ..

왜냐면 계속 해가 넘어가니까 요..
조명팀은 조금식 수정을 해야 하고 ..
이번엔 할머니가 걸어오시는 길목으로 해가 정통으로 닿길래
나도 뛰어다니고 그 자리에 서서 .. 자자 여기여기 ..
얼굴에 위장 그늘이 쳐지고 ..

진짜 마지막 ..
긴장 긴장 ..

김치 드리고 이번엔 서서 말하는게 아니고 할아버지 옆에 그냥 앉으셔서 ..
잠시 있다가 .. 상우 은수를 힐끔 보고는  ..

할머니 : 둘이 남매야 ?
은수 : 얘 ?
할머니 : 둘이 남매냐고 ...이쪽이 누나 같은데 ..

상우 은수 웃고 ..

자 이제 카메라만 안보시면 되는데 ..
혹시나 카메라를 볼까 본인 스스로 고개를 먼산 쪽으로 팍 돌리신다

약간 아주 조금은 이상하긴 하지만 ..

모니터 앞 에 지키고 선 스텝들은 슬며시 웃고 감독님도 소리없이
웃고 ..

할아버지 마지막 대사 하시고

컷 오케이..
해가 서산에 꼴딱 ..

어디 가시면 안되다고 했더니 하루종일 붙박이 처럼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시는 할아버지.

"기압 단단히 받는구만 "

할머니도 화장실 다녀온것 한번 김치 가지러 두번 가신것 빼곤
내내 우리 옆에 계셨습니다.

아라리 소리를 녹음하는 상우와 은수의 투샷을 찍는데
시선을 받아 주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상우 은수 두 배우 앞에 앉아 꼼작도 안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왠지 부끄러우신지 시선은 멀리 두고 ..

나중엔 할아버지 대본에도 없는 에드리 대사까지 줄줄줄 ... ^^

대밭 할머니도 그랬고 아라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랬고 ..
정말 ..
사람이 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싶네요..

촬영 다 끝나고 인사드리러 집에 갔더니 ..
손을 붙잡고 내내 놔주지 않으시네요
담에 꼭 놀러오라구  ..

담에 놀러 오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
그렇게 약속해놓고 못가는곳이 한군데 있어서 ..
그 분들 생각이 더 나네요

정선 북동이라는 곳에 가면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할머니 두분이 같이 사시지요 ..
첨 뵜을때 집앞 시냇가에서 약초를 씻고 계시던 할머니 두분 ..
잘 일어나지도 못하시는데..
해가 지도록 ..두분은 서로  별 말씀도 없으시고
방에 들어가 봤자 뭐 그러니 ..
그냥 그렇게 해가 지도록 ..일을 하시는 겁니다

나중에 좀 친해지고 .. 많은 얘기를 듣고 ..그랬는데
같이 간 다른 조감독들은 울었죠 ..

나도 기분이 울적해서 밖에 나왔는데 ..
밖은 어둡고  ..안에서 들려오는 도란도란 얘기소리들
호롱불빛 흔들리는 방안의 풍경과 ..
그리고 흘러나오는 아라리 가락에
오줌을 누다말고 찔금찔금 울었다는 ..

그 분들 한테 가서 라면 얻어먹고 온 얘기 했다가
엄마한테 등짝을 두드려 맞았죠 ..

우리엄마 : "이그 철없는 것들 .."

어머니 말씀이 다시 그 곳에 촬영가면 꼭 라면 한박스 사가지고 찾아가라고 했는데 대답만 해놓고 .. -.- ;

그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해 드릴께요

보충이 잡혀서 .. 다시 가 본 그 대밭 옆집은 허물어져 버렸답니다
어디 가시더라도 그분들 잘 사시겠죠


촬영 후유증 ..
심하게 앓고 있음.
답답한 서울 변두리 어느 아파트 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