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cinema 2003.07.04 14:45:28
이런 메일이 날아 왔네요.
설득력 있는 글입니다.


▶철모르고 지은 죄에 대한 반성문

"미국 대중 문화의 군림으로 전세계 관중들의 감성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빠른 리듬, 액션 만점, 특별 효과 취향에 더  적응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미국 영화는 지금 프랑스 시장의 65%, 이탈리아 시장의 85%, 독일 시장의 90%, 영국 시장의 거의 전부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것도 모자랍니까?"
"그러니 미국 영화 상영에 쿼터를?"
"유감이지만 미국 영화의 완전 점령을 제한하는 조처가 필요합니다. 당신들은 일본 차 수입에 여러 제한 규정들을 만들었습니다. 차보다 훨씬 더 중요한 대상, 즉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이 그토록 해로운 것입니까?"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직후 그리스 출신의 프랑스 영화 감독 코스타-가브라스는 한 미국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반문했다. 결국 '유럽판 스크린 쿼터'의 필요를 역설한 것이다. 거꾸로 국내에서는 지금 스크린 쿼터 축소 논란이 한창이다. 관객한테서 선택의 자유를 빼앗는 제도라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작은 이익을 취하려다가 큰 것을 잃는다는 경고도 있다. 자동차 수입처럼 영화 수입과 상영도 자유 방임하라는 문화 개방 확신범(!)은 어떻게 말릴 도리가 없다. 그러나 소탐대실(小貪大失) 설교에는 의문이 있다.
여기 소탐은 스크린 쿼터 유지이고, 대실이란 한국과 미국의 쌍무투자협정(BIT) 표류이다.
한미투자협정이 지금 그토록 절박한 현안인가? 미국과 투자 협정을 맺은 상대는 주로 동유럽의 체제 전환국들과 제삼세계의 최빈국(最貧國)들로서 우리가 눈여겨볼 제법 변변한 나라가 거의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는 한 나라도 없으며, 막말로 "나중에 얼마를 뜯어가도 좋으니 먼저 돈만 가져오라"고 매달리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그 명단을 훑어보면서 거기 들어가기보다 차라리 빠지고 싶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저쪽에서 재촉해도 생각해보자면서 뭉그적거려야 정상인데, 이쪽에서 먼저 초싹댄 것은 분명 김대중 정부의 실책이었다. 당시의 외환 위기가 변명일 수 없는 것은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도 미국과의 투자 협정 없이 위기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협정 체결로 40억달러의 투자 유치 효과가 생긴다는 산술도 희한하지만, 지금 우리
경제의 덜미를 잡는 화상은 외자 부족이 아니다. 증시와 투기판을 멋대로 치고 빠지는 380조원―3000억달러―의 부유(浮游) 자금을 밀어놓고 외자 타령만 하는 것이 어쩐지 내게는 정책 당국의 무능 아니면 직무 유기로 보인다.
투자 협정과 스크린 쿼터는 전혀 별개 사안이다. 투자 협정에 스크린 쿼터를 끌어들일 이유가 없다. 다만 미국이 만든 소위 투자 협정 표준안에 '의무 이행 강제'에 대한 금지 조항이 있는데, 스크린 쿼터의 의무 이행이 여기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일방적 제안이므로 협상 과정에서 우리의 이해도 관철해야 한다. 국내의 영화 배급과 제작에 진출할
외국 자본은 물론 스크린 쿼터의 이해 득실을 꼼꼼히 따질 것이다. 그러나 외국 은행이나 자동차 회사는 한국의 스크린 쿼터를 보고 투자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미 수출 330억달러와 미국 영화의 국내 수입 2억달러 중에 어떤 이익이 더 크냐는 어느 관리의 질문은 그야말로 망발 수준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그 2억달러 때문에 230억달러짜리 한국 시장을 버리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영화 생산의 경제학이 있다. 현행 146일의 스크린 쿼터를 절반으로 줄이라는 미국의 압력에 굴할 때, 단순히 방화(邦畵) 상영 일수만 그만큼 주는 것이 아니다. 배급이 반으로 줄면 군소 영화사의 줄초상으로 제작은 몇 곱으로 줄며, 그 악순환에서 국내 영화 산업은 조종을 울리고 헐리우드 제작자들은 만세를 부르리라. 서푼짜리 애국심으로 우리 영화만 보고, 스크린 쿼터
장벽으로 무조건 국산을 보호하자는 말이 아니다. 섣부른 경제 계산으로 문화의 장래를 요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1998년에도 정부의 스크린 쿼터 감축 기도에 맞선 영화계의 사수 투쟁이 있었다. 그때도 한국 영화가 죽는다고 악을 썼지만 지금 멀쩡하지 않느냐는 야유조 반론을 보노라면 그가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기가 막힌다. 한국 영화는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리니 패면 팰수록 발전할 것 아니냐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한국 경제의 장래도 단 하나에 달린 셈이다. 외국에서 두들겨 패는 것이고, 세게 팰수록 발전도 빠를 것이다. 이렇게 얼뜬 주장으로 쿼터 축소에 팔매질을 하고 있으니··· .
게리 쿠퍼나 존 웨인이 열연하는 '서부 사나이'는 어린 시절 우리의 우상이었다. 백인의 인디언 사냥은 정의였고, 영토와 생존을 지키려는 인디언의 저항은 악행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역사와 의식도 수출했다. 경제 문제를 끼적이는 내가 분수없이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이렇게 철모를 때 지은 죄(?)에 대한 후회와 반성(!) 때문이다. 미국 영화의 세계적 공세를 염두에 두고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문화가 무역에 굴복하면 안된다"면서 영상 분야의 '문화적 예외'를 거듭 강조했다. 코스타-가브라스 역시 정신은 판매 대상이 아니고(not for sale), 문화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not for negotiation)고 했다. 맞습니다, 맞고요! 교역의 예외적 특성으로 세계무역기구가 허용하는 비교역적 관심(NTC)은 쌀 시장 개방 못지 않게 극장 개방에도 절실하다.
鄭雲暎 (중앙일보 논설위원)

<2003/07/02 중앙일보>
▶난 미국영화를 사랑하지만 …

미국 영화 만세!
영화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는 어릴 적부터 영화 보기를 무척
좋아했다. TV '주말의 명화'에서 만났던 유럽 영화의 오묘한 매력이나 '특선
방화'에서 훔쳐본 정감어린 한국 영화도 좋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 시절
나를 사로잡은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들이었다.
스티브 매퀸에게 홀딱 반해 손에 땀을 쥐고 보던 '대탈주'와 '빠삐용',
여름방학 때마다 납량 특집으로 방송되던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들,
그리고 감독이 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나를 사로잡는 마틴 스코시즈나 토드
솔론즈의 영화들까지….
이렇듯 폭넓고 깊이 있는 미국 영화의 위대한 전통과 저력을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비록 최근 미국 영화들 중엔 덩치만 큰 쓰레기
블록버스터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할리우드 영화가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전세계
영화시장의 무려 80% 이상을 휩쓸고 있는 데는 다 이런 내공과 저력이
밑받침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요즘 미국이 …이토록 거대한 영화종주국 미국께서 우리에게
영화시장 개방 압력을 넣고 계시다. 또다시 우리의 스크린쿼터 제도에 시비를
걸면서 말이다.
세계시장의 구석구석까지, 우리나라 같은 조그만 시장까지도 완전히
집어삼켜야 직성이 풀리는 그 놀라운 프로정신! 누군가는 말한다. "이제
한국영화산업도 충분히 발전했다. 국내 시장 점유율도 50%를 넘었고. 이젠 자생력이
있으니 스크린쿼터를 없애야 한다"라고. 한국 영화가 발전했다고 평가해
주시니 일단은 참 감사하다.
그러나 발전했다고 해서 한국 영화의 법적 보호장치를 꼭 없애야만 하나? 한
부모가 자식에게 좋은 공부방을 하나 마련해주었다. 아늑한 공부방에서
열심히 공부한 아이는 반에서 일등을 한다.
그러자 부모는 '너 성적 올랐으니 이제 공부방 필요없지?'라면서 그 방을
다시 빼앗아 전교 일등 하는 옆집 학생한테 내준다. 정말이지 말이 안 된다.
성적이 올랐으면 더 좋은 책상, 더 많은 참고서를 사주면서 더더욱
지원해줘야지 성적 오른 게 무슨 죄라고 공부방을 다시 빼앗는가. 스크린쿼터를
포기했다가 자국 영화산업이 폭삭 무너져내린 멕시코 같은 나라들을 잊지 말자.
누군가는 또 말한다. "스크린쿼터가 한.미 투자협정의 걸림돌이다. 경제가
어려우니 투자협정을 위해서는 쿼터를 희생하자…." 도대체 한.미
투자협정이란 게 뭘까. 그것이 우리나라 경제의 어떤 구세주라도 되는가.
감히 경제학을 논할 주제는 못 되지만 누구든 약간의 상식과 냉철함만
있다면 한.미 투자협정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짚어낸 장하준
교수(英케임브리지大.경제학)의 글(문화일보 6월 25일자)에 동감할 것이다.
그 옛날 심청이도 공양미 삼백석을 확보해놓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거늘,
불확실한 투자협정 때문에 그 나라 문화의 총아인 영화산업이 시커먼 바닷물에
몸을 던져야만 하나.
사실 스크린쿼터는 최소한의 보호장치일 뿐 자유경쟁을 가로막는 배타적인
제도가 아니다. 자유경쟁을 위협하는 것은 오히려 전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미국 영화다.
쿼터제는 단지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보자는 작은 노력에 불과한 것이다. 난
미국 영화를 사랑한다. 단지 미국 영화가 전세계 관객들을 독점하는 것이
싫을 뿐이다.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나라들의 풍요로운 영화 메뉴가 펼쳐져야
한다고 믿을 뿐이다.
봉준호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