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의 추억

tudery 2004.06.25 11:35:45
이긍.. 이거 풍년에 올린 글인데...
여기도 저으 탄신일에 대한 노도와도 같은 축하의 메세지가 물결치고 있으니(ㅡ,.ㅡ;;)
올립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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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생일을 챙기는 편이 아니다.
내 생일만 챙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남의 생일도 잘 챙기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 환갑 날짜도 까먹고 있다가 매형에게 욕을 한바가지 얻어 먹고서야 부랴부랴 제주도로 향하는 놈이다.

지금이야 그럭저럭 먹고살만은 하지만
어렸을 적 찢어지게(진부하지만 적절한 표현이다) 가난했던 집안에 막내였었터라 생일잔치는 아침 밥상의 미역국이 전부였다.
원래 미역국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아침 밥상의 미역국은 으례 하루 종일 메뉴로 올라오니 그닥 탐탁치 않은 어린맘에 생일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생일선물에대한 본격적인 기억은 국민학교 삼학년때부터다.
국민학교 3학년때의 담임선생님은 좀 특이한 사람이었다.
분필 지우개로 양 뺨을 연타하던 권투선수 출신의 1학년 담임과
집이 가난하니까 넌 반장하지 말고 부반장을 하라던 2학년 담임을 거쳤던 나로서는
첫날부터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양팔을 저어대며 노래를 가르치던 그 선생님이 정상으로 보일린 없었다.

뜰안에 반짝이는 햇살같이
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가사 까먹은 부분이다)
반짝이는 마음들이 모여 삽니다.
오손도손 속삭이며 살아갑니다
비바람이 불어도 꽃은 피듯이
어려움 속에서도 꿈은 있지요
라라라 라라라라 3학년 7반
라라라 라라라라 3학년 7반

(이 노래가 예전에 유행하던 드라마의 주제곡이었다는 걸 알게 된건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후였다)
첫 수업을 다 까먹으며 '반가'라고 노래를 가르쳐 주던 고순원이라는 이 선생님은 이후로도 당시로는 혁신적인 교육방법을 채택하며 어린 동심에 혁명적 사고를 심어주는데 일조를 하셨다. 그 중에,

아침 조회시간은 생일축하의 시간이었다.
손바닥만한 수첩과 연필 두자루를 손수 준비하시고는 그 날 생일을 맞은 아이를 모두가 일어서서 축하해 주고
그 날이 생일인 아이는 교단에 올라가 일년동안 어떤 목표를 꼭 이루겠다는 약속을 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가 산수를 못하는게 절대 머리가 나빠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수첩 첫장에는 선생님의 볼펜글씨로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득 적혀 있었다.
불행히도 난 그 때의 내 수첩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쨋든.

첨에는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며 쑥스러워 하던 아이들도 일년에 한번밖에 돌아오지 않을 그 날을 위해
대 국민(?)담화문을 미리 작성해 연습하는 열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선생님의 의도든 아니든
뜰안에 반짝이는 햇살같은 마음을 가지기 시작한 아이들이 모여사는
우리반은 미화경연, 포스터경연, 글짓기 경연등등 거의 모든 교내 행사를 휩쓰는 앙팡테리블한 반이 되어갔다.

그 해 6월 25일.
내가 일년동안 정진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어떤 감동만빵의 말로 선생님과 아이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갈까하는 생각으로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이제 몇 분뒤면 색깔도 이쁜 수첩과 HS라는 한국 공업규격에 빛나는 연필 두자루를 들고 고순원선생님은 저 앞쪽문을 통해 나타나실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제 부터 1박2일간 연습한 앞으로 일년간의 나의 각오를 저 교단위에 서서 멋있게 말을 할 것이었다.

'아...아... 전교생에게 알립니다. 지금부터 육이오 규탄대회를 거행하니 전교생은 빠짐없이 운동장으로 모이기 바랍니다. 주번중에 한사람만 교실에 남고 빠짐없이 운동장으로 모이기 바랍니다'

이것이 무슨 괴뢰군 탱크 터지는 소린가.
아이들은 내 생일은 역사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김일성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교실문을 나섰고
그 날 아침 나의 앞으로의 일년간의 각오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남선생님의 구호를 따라 외치며
'김일성이 너 나한티 잡히면 국물도 없다'라는 다짐으로 변해버렸다.

물론 선물은 받았다.
그 날 오후 종례후에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선물을 건네주셨고 난 수첩과 연필을 가방이 아닌 주머니에 넣고 쪼물락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오며 김일성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조금 삭히기는 했다.


그 후로도 누구에게 선물을 주어본 기억은 거의 없는 거 같다.
생일이라며 축하해 주는 친구들에게 선물을 받기는 했지만 그 친구의 생일이라고 선물을 주어본 적은 없는 거 같다.
어렸을 적에는 공책이니 연필이니를 선물할려면 돈이 필요해서, 선물을 줄래야 줄 수도 없었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생일이라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지? 하는 딴에는 시니컬한 개똥철학도 한몫했는 듯 싶다.
나 같이 것멋든 놈은 아무 때도 아닌 때에 '너를 생각하는 게 이만큼이야, 지금 당장은...' 하며 건네는 선물이 더 멋있게 보였을게다.

돌려 생각해 보면 마음을 잘 표시할 줄 모르는 놈이 그나마 구실 만들어 내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이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린 아이들에게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누구에게도 차별없이 (아, 지금 생각해 보면 생일날 공책한권 못 받는 아이들도 분명 있었을 거다) 다 선물을 나눠 줬던 선생님의 마음이
그런 거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구실이란 건 만들기 나름이고 행사라는 건 그 구실이 아닌가.

반공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른 아이 가릴거 없이 운동장에 나와 '민족의 원수의 각을 뜨자'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어야 했고
그러자면 날을 잡어야 했고.
어떻게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해, 아이 쑥스... 하는 불쌍한 청춘을 위해서는 쪼꼬렛 데이라는 구실을 만들어 놓고
그렇게 날을 잡고.
궂이 냉소할 일은 아니다.
날은 날이니까. 묻어 뒀던 마음이 있으면 핑계삼아 전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태어났니? 라는 개도 안 뜯을 인생의 고뇌를 꼭 생일날까지 물고 있을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