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초의 어느날 가운데서

hyulran 2004.06.24 13:52:37
대대로 이곳에서 100년을 넘게 살아온 조씨는 빌라가 지어질 당시 토지

측량을 잘못해서 자기 땅이 엉뚱하게 도로로 편입되었다며 요즘 건축폐자

재들을 동원해 도로의 구석을 점령해 버렸다. 덕분에 빌라의 여기저기에

살고 있는 뜨내기들은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서로의 눈치를 보는데

열심이다. 갑자기 짜게 나오는 그의 별명은 시커먼스, 얼굴이 워낙 검어

서 우리 아버지가 붙인 별명이다. 생계유지는 농업이 본업이었지만 몇천

평이나 되는 양질의 논을 다 팔아먹고는 요즘 일용직 날품팔이로 서울을

오가며 살고 있다. 그럭저럭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도 그는 건재하다. 토

끼농장을 갖고 있고-조만간 엎고나서 사슴 농장으로 탈바꿈시킬 거라고

말하지만 동네 사람들 아무도 믿지 않는다. 몸보신 하기 위해 차린 토끼

농장도 제대로 운영못했는데, 그 큰 사슴이 어디 그의 말을 듣기나 하겠

는가?-주변에 비록 임야이지만 땅도 몇천평 더 있고 정말 다 쓰러져가는

집이지만 불법주택까지 집이 두어 채 있고 식당을 한다는 아들 역시 아버

지를 닮아서 무면허 운전실력으로 뽑은 소형차까지 있으니, 이곳 사람들

의 평균(?)보다는 나은 것이다. 물론 아무도 그를 존경하지는 않는다. 그

리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아니 못한다. 이곳은 그의 집성촌, 주변에 일가

친척들이 뭉터기로 모여살고 있는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옆집 신혼부부가 훌쩍 소리도 없이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다.

이사를 온지 채 1년도 안됐는데 갑자기, Why, 어째서, 왜? 이유는 한 3

주 전쯤에 도둑이 들어 패물과 카메라를 훔쳐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낮

에 말이다. 하필이면 운명의 손이 도둑으로 하여금 우리집이 아니라 옆집

의 문고리를 잡게 했으니... 아마 그 도둑은 그 날 헛탕치지 않을 운수였

나보다. 서로 인사도 잘 하지 않던 자들이 사라지고 나니 이상하게 섭섭

했다. 원래 그들이 이사오기전 서울로 출퇴근하는 나가요 아가씨가 가끔

씩 문제를 일으키던 곳이라 얌전한 여염집 평민의 출현에 내심 반가워했

는데... 어제는 빌라의 주민들이 모여서 반상회라는 것을 했다. 드디어

가스가 들어온다고 수근덕 거리며 견적서를 제출한 두 업체의 책임자로부

터 설명회를 듣는 그런 자리, 에 나는 처음으로 참석했다. 달변의 이사

와 무식을 가장한 빌라 주민들의 제 몫챙기려는 수싸움이 불꽃튀기며 서

로 얼굴 발개질 정도로 계속된 한시간. 나는 가끔씩 웃기만 했다. 도둑맞

고 이사를 가 버린 옆집의 신혼부부가 어쩌면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게 아

닐까 싶어서였다.





약수물 길어오기, 청소, 빨래, 취사, 기타 잡일. 이런 일을 도맡아 하시

던 아버지는 3월 5일 중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떠나가셨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내 몫이 되었다. 더 열심히 살게 됐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3월,

난생 처음으로 비공개 까페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어느 누구의

초청을 받아서, 앞으로 다 모여봐야 5명, 현재로서는 재미있을지 궁상맞

을지 안개속에서 허방 짚는 격이지만 바로 이곳에 가입하기전 손을 떼버

린 까페에서 심란해하던 내게는 무슨 운명의 오아시스같기도 하다.




그리고




감독제의를 맡은 친구 녀석은 회사의 무관심과 약속불이행으로 그곳과의

관계를 비밀리에 청산하기 위한 모든 작업을 마치고나서 2009 로스트 메

모리즈를 제작했던 영화사의 PD가 독립해서 차린 신생영화사에 어제 조감

독으로 들어갔다. 썩 나쁘지 않은 페이에 자세한 건 만나봐야 알겠지만

부족분에 대한 인센티브제까지 적용할 거라는 계약얘기를 들으며 부러웠

고 내 자신이 조금은 한심, 비참했다. 나는 그와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각

색하고 창작했으며 앞으로 그 협력관계는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러면 기회

가 올까하는 얄팍한 생각도 점점 키워가면서...




마지막으로




지난 주 토요일에는 난생 처음 도둑 장가가는, 일면식도 없는 전혀 모르

는 한 사람을 위해서 하객으로 가장해서 결혼식에 참석, 식이 끝난 후

18500원짜리 갈비탕을 점심으로 얻어 먹었다. 엄밀히 말하면 현금 대신

의 일당이었지만, 정말로 터무니 없는 액수의 갈비탕에 난 식탁 위에 차

려 놓은 여러 가지 음식들을 거의 다 먹느라고 열심히 노력했다. 마음속

에서는 연신 본전을 뽑아야 해라는 격려의 응원이 끊이질 않았다. 아, 본

전이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남자는 재혼이었고 여자는 초혼이었는데

보디가드 두명이 폼 잡고 지키는 식장은 어수선했고 부주금을 낸 사람은

단 둘 뿐이었다. 내가 참석한 결혼식 가운데 제일 별 볼이 없던 헤프닝이

었다. 아는 조감독 선배의 도움 요청에 의해 아침에 잠도 못자고 달려간

그곳에서 본 신부는 키가 무척 작았다는 것이다. 엄청난 높이의 하이힐

을 신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커버되지 않는 중력의 무서움, 혹은 잔인

함! 그래서 그 이유때문에 신랑측 어머니로부터 미움(?)을 받아 결혼승락

을 받아내지 못했다는 사연에 이르러서는 웃음과 함께 칠락팔락하는 인생

살이의 험준도에 새삼 모골이 송연했다. 그런데 나는 문제의 신랑이 소유

하고 있는 한 빌딩에 20일 이후부터 출근(?)을 하게 될 것 같다. 사무실

을 공짜로 빌려주겠다는 제의 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결혼식에 참석

한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기타 등등

의 전업주부의 역할에서 헤어나고 싶은 것 말이다.


- 이때는 컨디션이 괜찮았던 것 같다. 지금은 난데없이 홍반장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너무나 많이 시달리고 있다. 조만간에 조폭들과도 한판 붙어야 할 것 같다. 아, 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