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없이 죽고싶은 여자
sadsong
2009.03.02 22:13:16
1.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단 한명의 예외 없이 겪게되는 일이면서도
또한 세상 어느 누구도 알 지 못하는 것.
죽음, 그 순간의 느낌. 고통.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것을 실행하고 경험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남겨진 우리에게 그 순간의 고통에 대해 말해주진 않는다. 못한다.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라지만,
이 것은 해보았어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는 것은,
몸이 지면에 닿기 이전에 이미 정신을 잃거나 심장마비로 숨이 멎기 때문에
오히려 직접적인 충격에 의한 고통은 없다거나,
목을 매는 것은,
잠이 오듯 서서히 숨이 멎어가기 때문에,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라거나,
손목을 긋는 것 역시,
급격한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출혈의 지속과 함께 서서히 부드럽게 눈을 감게 된다거나,
총으로 머리에 구멍을 내는 것은,
찰나에 상황이 종료되기 때문에 애초에 고통을 느낄 새가 없다거나...
이런 여러가지 이야기들.
하지만, 웃기지들 말라고 하자.
어디까지나 그럴듯해보이는 논리일 뿐
이론과 실제는 늘 다르기 마련이니까.
2.
[고통없이 죽고싶은 여자 장미라 54* - 19**]
강남역 뒤편에 자리잡고 있던 어느 도서관 책상위에 선명하게 적혀있던 이 짧은 낙서가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쯤의 일이다.
여학생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설레던
여리고 슬픈 시절.
더군다나 나의 죽음에 대해 좀 더 선명한 생각들을 쌓아가기 시작했던 그 때,
머리속에 나와 비슷한 무엇을 가졌을 것만 같은 그녀의 낙서는
단번에 내 깊은 곳으로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그 것이 장난스러운 글이 아닐 거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나에겐 가득했고
정말 죽으려는 거라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 속에서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한 나는
전화를 걸었다가 몇 번의 신호 뒤에 끊어버리기를 몇 번.
그 후로 몇 달, 어쩌면 일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
그 낙서를 옮겨 적어놓았던 쪽지를 다시 꺼내 용기를 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이번엔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들려온다.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어쨌든 그것은 우리 사이의 완전한 이별을 뜻했다.
3.
'... 129일 동안 농성을 벌이던 35m 높이의 85호 크레인 위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는
어떤 안타까운 기사를 보면서
129일을 버텨낸 그 마지막 순간, 스스로의 몸을 허공에 매달때의 고통이란 것을... 감히 떠올려보다가
죽음의 고통에 대해 말하던 17년 전의 그 여학생이, 그 낙서가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등학생 때 쓰던, 서랍 깊숙이 박혀있던 필통을 꺼내본다.
그리고 그 안에 아직 그대로 놓여있는, 그녀의 낙서를 옮겨 적었던 쪽지를 발견한다.
[고통없이 죽고싶은 여자 장미라 54* - 19**]
4.
그 옛날 그 때처럼 다시 전화 번호를 하나하나 눌러본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한다.
혹시라도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면,
"장미라씨라는 분 계신가요."라고, 이번엔 꼭 묻겠다고.
(한 번 사라진 전화번호가 다시 부활하는 경우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신호가 간다.
그 사이에도 수많은 생각이 오간다.
이렇게 몇 번 신호가 가다가 역시나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나올까.
그렇지 않고 정말 누군가 전화를 받게 된다면...
그녀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일 수도
혹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집 전화번호쯤 몇십 년 그대로인 경우는 많으니까.
...
중년의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하지만, 내 생각도 이미 결론을 내고 있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문제될 것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가족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17년 전 쯤에 그녀의 낙서를 본 사람입니다." 라고 내가 입을 떼는 순간,
전화기 너머의 상대가 받게될 극심한 혼란은 너무나 뻔한 것 아닌가.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온 낯선 남자가
이미 결혼해 잘 살고 있는, 혹은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닌
내 딸 혹은 누이 혹은 아내의 이름을 거론하며 찾는 셈이니...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스스로 시도했던 17년만의 전화는 그렇게 싱겁게 스스로의 의지로 마무리되고 만다.
어쩌면 나는
처음 전화를 걸면서부터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나오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sadsong / 4444 / ㅈㅎㄷ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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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없이 죽는 방법을 결국 알아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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