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 플라워
ty6646
2008.03.24 06:56:58
세월이 흘러 일년반이 지나 한국에 한번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 그 카페를 찾아보았다. 설마
그때의 내 꽃이 드라이플라워가 되어 벽에 걸려있을리는 없겠지만,
그냥 혼자서 조용히 그때 그 테이블에 앉아 내 마음안에 있는 수영이를 추억하며
그날의 일부로 되돌아가는 차한잔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런데 카페가 보이지 않는다.
두 바퀴를 돈 다음에야 없어졌다라는 것을 알았다.
마음에 퀭하니 구멍이 뚫린 듯 찬바람이 불어온다.
그리움에 목마를 때 한번씩 뒤적여보며 메마른 마음을 적셔갔던
첫사랑의 페이지가 없어져버린 듯한 쓸쓸한 기분이 마음안에 넘칠듯 쌓여갔다.
카페가 없어진 것이 쓸쓸했는지, 꽃다발을 못봐서 서운했는지,
아니면 그녀를 기다렸던 그 세시간이라는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
추억마저 되지 못한채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슬픔때문이었는지.
그냥 아무렇게나 휘청거리듯 기울어진 가슴을 안고서 돌아오는 길에,
비로서 그 카페를 찾아간 것을 후회했다.
친구의 카페에 들렀다. 아는 여자라고 소개시켜 주었는데,
첫마디에 내가 물었던 것은 사귀는 사람이냐라는 것이었다.
그냥 아는 사이라는 대답에 왜 나는 은밀한 안도의 마음을 가졌었더랬는가.
그날 우린 처음 만났었고 친구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러 갔었다.
파전을 찢어주던 그 아이는 날 오빠라고 불러주었다.
오빠, 오빠, 오빠......(^^) 소름돋을 만큼 간지럽고도 기분좋은 말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맞장구를 쳐주었고, 촉촉히 젖어가던 입술로 날 불러주었다.
그날처럼 술이 맛있었던 기억이 또 있을까. 부드럽게 넘어가던 막걸리의 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참 이상했다. 늘 여자에 대해서 이리 재어보고 저리 살펴보던 나였는데 그날만은 조금 달랐다.
은은하게 흔들리던 불빛 속에서 주위의 소란한 잡담들은 음악처럼 들려왔고
그녀를 바라보던 내 눈은 거울처럼 깨끗하게 그녀를 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내 되물어 오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비밀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이 아이를 좋아하는가?
새벽까지 술을 기울이던 우리들은 찬바람이 불어오던 거리로 나왔고,
친구를 먼저 보내버린 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은은한 푸른 빛이 감도는 새벽길, 지나는 이 아무도 없던 그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난 택시를 타지도 않은채 그렇게 한 30분을 벌벌 떨었을까.
갑자기 내게로 다가온 그녀가 날 껴안아버렸다.
따뜻해
그녀의 입김이 내 얼굴에 와 닿았고,
그것은 술맛보다 달콤하던 두근거리던 내 젊은 심장소리였으리라.
잠시 후 돌아가려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되물었다.
한번만 더 안아봐도 돼?
그냥 웃기만 하던 그녀의 표정을 내 어깨너머로 넘기며
그녀의 긴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냄새에 그렇게 한 십분을 취해갔다.
새벽공기만큼 신선하고 상큼한 미소가 내 얼굴에서도 그녀의 입가에서도 굴러떨어진다.
그러나 친구를 사이에 둔 그녀와 난 한참을 어정쩡한 친구처럼 지낼 수 밖에 없었고
그녀도 나도 서로에게 큰 욕심을 가지지는 않았었다.
순수한 마음을 다하면 좋은 일이 있을거라는 그런 믿음이 그때의 내겐 있었더랬다.
그녀의 일과는 상관없이 일본에 가게 되었다. 만나고 싶었고 약속을 정했다.
그녀의 집앞에 있던 어느 카페에서...... 꽃집에 갔다. 태어나서 처음 사보는 꽃이다.
이런 쓸데없는 물건을 왜들 사는가 싶었는데 그때만큼은 쓰잘데 없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전해줄때의 뿌듯함, 꽃을 받아들고 좋아라할 그녀의 미소,
그리고 그 꽃들만큼이나 진한 향기를 뿌려줄 그녀와 나만의 시간들,
그런 것들에 대한 기분좋은 설레임이 꽃값을 깎지도 않게 만들었다(^^)
두번 전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번 정한 약속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녀인데.....
난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그녀가 문을 열고 활짝 웃는 모습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렀다. 시계를 보았고, 주위엔 손님들이 아무도 없음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꽃은 의자밑으로 내려져갔고,
정문을 바라보는 내 눈엔 그녀가 활짝 웃는 얼굴로 헐레벌떡 나타나는 모습이 환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문닫을 시간이 되자 주인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한마디 한다.
누군지 꽤 늦으시네요
그 주인은 영업을 마칠 시간이 되었음에도 문 닫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던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도 그 주인 여자분에게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었던 것이.
의자 밑에 둔 꽃을 그냥 두고 나가려니 그녀가 나를 부른다.
이 꽃은 안가져 가시나요?
주인이 오질 않네요. 그냥 버리세요
아깝쟎아요. 드리아플라워로 만들어서 걸어놓아도 되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한번 보러 오실 겁니까? 이 꽃....
글쎄요. 당분간은 어렵겠는데요
카페문을 열고 나오니 한겨울 밤의 찬바람이 내 목을 파고들어온다.
움츠려지는 어깨를 한번 부르르 떨고는 그녀가 사는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나는 두번 전화하지는 않았다. 곧 나오겠다라고 약속한 그녀가
세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은 이유를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만날 인연이 아니겠지라고만 생각하고 그렇게 그 카페를 뒤로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내 마음도 뒤에 두고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가고 말았다.
일년반이 지나 그 길을 지나치는 일이 있었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 난 차에서 내려 두리번 거리며 카페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세상은 내 마음같지 않았고, 내 마음처럼 남아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기억속의 카페로 그대로 두는건데 굳이 확인할려고 했다가
내 마음속의 은밀한 카페마저 비명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가끔씩 수영이가 그립다.
한겨울의 새벽공기안에서 나를 안아주었던 그 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있게 느껴졌던 막걸리가 목젖을 축이던 그녀와의 술자리,
내 인생에서 단한번 달콤했던 그날의 술맛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시간의 배를 타고 멀고 먼 우주속으로 흘러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