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을 꿈꾸며.... 네번째 이야기

kineman 2008.01.13 10:41:56
2004년 전남 보성에 있는 작은 사찰로 들어갈때의 신체조건은 거의 시체에 가까웠다.
작은 물건도 제대로 들지 못하며 평지를 열발자국도 겇지 못하고 그마져도 힘이 들어 헥헥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 쉬는등 영화고 나발이고 이러다 죽는다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나라는 인간이 참 간사한 동물인게 점차 건강을 되찾으면서 하루하루가 심심해지기 시작하는거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생각에 대부분의 짐을 가지고 들어왔다.
비디오카메라등 촬영 장비와 컴퓨터등주로 사용하던 물건들과 비디오페잎들, 약간의 옷가지들이 1.5톤의 차에 가득했다.
전생이 거지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내게 들어온 물건들은 잘 버리지 못하는게 그 이유다.
아직도 고향에 가면 중학교때 리어카에서 산카셋테잎들이 그대로 있다.
올해 40이 되었으니 중학생이면 벌써 몇년전인가....
성질이 드러워서 내 물건이 없어졌다싶으면 화를 내서 아예 가족들은 내 물건이라면 그냥 고스라니 두기 때문이다.
암튼 가지고 온촬영장비를 이용해 계절에 의해 변해가는 절의 모습도 찍고 스님들도 찍고 나무도 찍고 하늘도 찍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한 작업들로 인해 살린 왼쪽 눈의상태를 보다 정확히 알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망막박리라는것은 마치 오래된 벽지가들고일어나는 것처럼안구내에 있는 망막이 떨어지는 것이다.
울퉁불퉁하고 군데 군데 떨어진 스크린에 영화를 영사하는 것과 같다.
요즘에 비유하자면 LCD모니터에 불량화소가 생기는 것이라고 보면 비슷하겠다.
일상에서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전신주처럼곧게 뻗은 직선들이 중간에 살짝 요철 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정도였다. 의
근데 사진을 트리밍하는 과정에서 이게 똑바른 건지삐뚤어진건지 전혀 감이 안오는거다.
집중을 해서 보려면 바로 눈물이 나오면서 안구 자체가 아프기 시작해 포토샾 작업을 오래 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하루종일 불법속에 살앗다
낮에는 합법적인 불법이요. 밤에는 거시기한 불법이니 세상이 온통 불법이였다.
입맛도 점점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밤에 열심히 불법을 자행하다보니 늦잠을 자게되고 늦잠을 자니 아침 공양을 거르게 되고 눈치가 보여 후원엔 못들어가고 읍내로 차를 몰고나와 음식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낮의 지루하고 심심한 불법보단 밤의 블법이 훨씬 자극적인것 처럼 읍내 음식은 참으로 참을수 없는 유혹이였다.
나의 읍내 외출은 가끔 서울에서 내려와 건강을 살피는 한의사님과절에 계시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자주는 아니였지만 아마도 보름달이 뜰 간격이 아니였나 싶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2005년을 맞이하면서 나의 한밤중의 불법이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눙이 쌓여 운동하기가 힘들다는 핑계로 운동을 삼가했다.
더더욱 인터넷에 심취했고 죄를 짓 다는 생각은 그럴수도 있지로 바뀌어갔다.
봄이 되여서도 계속되는 만행에 부처님이 혼을 내셨을까 멀쩡한 길에서 마치 누가 뒤에서 퐉하고 민듯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병원에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니 다리에 실금이 가서 반깁스를 했다.
슬슬 검은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젠 편안히 방에서 밥을 받아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인터넷에 매달렸다.
마치 그동안 못 본것에 대한 아쉬움이였을까 아님 앞으로 두 눈을 멀게되어 다시는 접할수 없다는 막연한 두려움에서였을까
{안과에서 녹내장이 진행되고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했었다. 시기가문제이지 실명하게 된다고...}.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머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반깊스를 풀무렵부터 몸이 띵띵 붓기 시작하는거다.
병원에 가는게 좀 귀찮아서 사나흘을 기다려 서울에서 내려온 한의사님을 찾았다.
나를 보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지며 진맥을 하더니 얼른 병원에 가란다. 큰병원으로 가랜다.
2시간넘게걸려 다녔던 병원응급실에 가니 이것저것을 검사하고 몇시간이 흘렀을까 신장내과 담당 선생들이 왔다.
그 뒤부터 신장내과애 입원해서 조치를 취하자 몸의 붓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눈의경우처럼 신장이라는 장기도 회복이라는게 없단다.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면 최대한으로 안나빠지게 하는게 가장 최선의 방법이란다.
전에 눈 수술 뿐만이 아니라 그전부터 내분비내과등 다양한 입원경력으로 인해 익숙한 공간이라 나름 마음이 편했다.
병원식사는 만성신부전식이라는 아주 무척이나 엄청 굉장히 너무나도 심심하게 나오는거다.
콩팥에 무리를 주면 안되기때문에 자극적인건 피해야한단다.
이런된장! 이렇게 어떻게 먹고 살아?란 생각이 들었다.
한 사나흘 버티다가 그냥 일반식으로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의사쌤이 ㅓ디 가만히 있는가? 조정을 통해 일반식과 치료식 중간 단계의 식사를 할수 있었다.
혈액투석을 위한 동맥과 정맥을 연결하는 수술을 한뒤 보성으로 내려갔다.
투석을 할려면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최대한 자극적인 음식을 자제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디 그렇게 되는가?
나름 조심해서 먹다가도 한번에 조리가 된 음식들을 먹고....
수술한지3~4주가 되었는데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투석의 세;게로 접어들 시기가 온것이다.
팔에 만든 혈관은 아직 사용 할수가 없어 목쪽에 임시로 투석을 할수 있도록 동맥과 정맥 혈관을 밖으로 연장해 놓았다.
이때도 위기를 나름 편안히 넘길수 있었던 것은 빠른 포기심이 아니였나 싶다.
투석을 하기전 구역질을 할때 정말 괴로웠다.
시도때도 없이나오는 구역질로 인해 병원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참고로 그 병동은 6층이다.
바로 투석을 하자는데 내가 좀 버텼다.
이미 팔에 만들어 놓은 혈관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조금만 참으면팔에 투석을 받을수 있는데 좀 참지 뭐....
ㅎㅎㅎ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였고 결국 임시로 만든 혈관으로 투석을 받기 시작했다.
마치 애 선것처럼 시도때도 없이 해대던 구역질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샤워하기가 좀 불편하고 투석을 받는 4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 말고는 모든게 좋았다.
시간이 흘러 직접 팔에다 주사바늘을 찔러 투석을 받기 시작했다.
나름 주사바늘을 찌를때마다 고통스러웠지만 구역질에 대한기억이 남아있어 그래도 구역질보단 주사바늘이 낳다는 생각에 나름 큰 문제없이지냈다.
약간의 우울증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았고 약을 처방 받았다.
한 1주일 쯤 먹었나? 약을 끊기로 결심했다.
뭐... 약에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이 되지말자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약이 너무 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정신과 상담을 하게된 이유는 전에 구역질을 할때 한간호사에게 농담처럼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말을한게 기록이 되었고 팔에 투석을 시작하고 잠깐의 우울증에 말이 없어지자 아무래도 의료진들이 좀 긴장을 했던것 갗다.
내가 정신과를 찾은 이유는 한번도 가보지 모소한곳이기 때문이다.
길다란 복도를 지나 따로 떨어진 병동의 그곳은 일부러 찾아가기 힘든 곳이였다.
조금은 지겨웠던 병원생활에 지친 나는 새로운 경험에 살짝 흥분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흥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신과 병동 입구에 있는 간호사실 너머에 있는 한 환자를 발견했다
ㅠ리창 너머 일반 병동쪽을 보고있던 그 여인은 나를 보고 약간의 괴성과 울음을 터트렸다.
간호사실에 있던 사람들은 전혀 미동도 없이 자신들의 일을 계속 하고있었다.
나는 괜히 뻘쭘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과 그래도 저사람보단 내가 행복하단 생각이들었다.
상담실에서 의사쌤과 이야길 나누었다.
주로 전에 어떤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별로 살고 싶지않다는 답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병실로 돌아왔다.
간호사를통해 약을 처방해도 괜찮겠냐는 질문에 그러라고 했는데 그 달디 단 약이 처방된 것이다.
사실 약보다는 나를 향해 울던 여인 에대한 충격으로인해 우울증이 치료가 된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본격적인투석시대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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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