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을 꿈꾸며.... 첫번째 이야기
kineman
2007.08.17 08:49:04
에세이페이지가있는줄 모르고 자유케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첨에는제목에 시각장애인이라고 붙였었는데 너무 상업적인 냄새가 나서 뺐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의 편의를 위해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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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 소나 영화감독 한다고 이젠 앞도 못보는 놈까지 설친다는 이야기나
안들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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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덕윤,
<빵아빵아빵아> 이것은 21살이던 1989년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만든 단편이다.
영화는 어린 나의 꿈이었고, 나는 줄곧 영화인이었다.
2007년 6월. 이제 39살의 나는 초자체 출혈 및 망막 박리로 인해 시력을 잃은 1급
시각장애인이다.
그리고 오랜 당뇨와 싸우고 있고, 그 합병증으로 발병한 만성 신부전 때문에
일주일에 세번 혈액투석을 받아야 하는 몸이기도 하다.
우연히 배우게된 컴퓨터로시잗된 제 3의 삶.
나는 다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세상으로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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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인걸로 기억된다.
서울 남산아래 회현시범아파트에 살았었다.
저녁놀이 하늘을 뒤덮는데아파트 앞 공터에 이동 극장 차량이와서 스크린을
설치하는등 부산스러웠다. 자연스럽게 동네주민들이 삼삼오오 몰려들고 날이
어둑해지자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영화제목도 배우들도 기억이 나지않지만 영사기에서 쏟아져 나오던 불빛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임시로만든 스크린 위로
커다랗게 펼쳐진 영상의의 시작점을 찾아가던 눈길 끝에 다다른건
시끄럽게 모타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영사기였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들어가 중고 8미리 필름카메라와 영사기를 구입했다.
작은 영사기였지만 제법 시끄럽게 필름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왜그렇게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좋았었는지....
그 소리가 한사람의 인생을 보기 좋게 만든것 같다.
휴,.... 보기 조~오타!!!
처음 멋도 모르고 카메라 앞에 섰을땐
무지하게 떨렸었다.
몇번의 테스트 후, 슛이 들어가자 오히려 뛰던 가슴은 진정이 됐다.
카메라에서 촤르르르 하며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1987년 고 3때 입시를 위해 등록한 학원에서 현장실습이라고 엑스트라 동원을
시켰었다.
당시100킬로가 넘는 몸무게로 인해 바로 두번째 작품부턴 단역을 했고
그런대로 연기가되자곧이어 대본의 4번째 배역인 조연을 맡기도 했었다.
공부는 못하지만 무지 착한 친구 한덕배역.
말더듬이인 것만 빼고 거의 평상시와 비슷한 캐릭터여서 전혀 연기에 부담이 없었다.
아니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요즘도 가끔씩 말을 더듬을때면그때 몰입했었던 연기의
후유증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미안하다. 오바다.
가뜩이나 공부하기 싫은고 3 ,2학기의 대부분을 현장에서 보냈다.
촬영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지만 원래 잘하지 못하던 공부가 잘 될리 없었다.
당연히 입시에 실패하고 이젠 뭐하나 하는 고민을 하는데 영화사에서 연락이왔다.
영화개봉에 맞추어 부산으로 팬사인회를 가잰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2곳의
극장에서 개봉을 하여서 2팀으로 나누어 하루씩 극장을 바꾸어 가며 나름 팬사인회도
가졌다.
지금처럼 경호원들에 둘려쌓여 간단한 무대 인사를 한게 아니라 영화가 끝나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드리먄 얼굴을 알아보고 싸인을 청하면
싸인을 악수를 청하면 악수를하는 거의 입회 수준의 그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해주시던
한 아주머니가 아직도 인상에 남는다. 10년만에 영화를 봤는데 정말 재미있었다고
두손을 맞잡고 어찌나 즐거워하시던지.......
처음엔 그런 반응들이 부끄러우면서도은근히 기분이 젛았다. 나중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면 서운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팬 사인회를 마치고 재수아닌 재수생활에 들어갔다.
간간히 단역으로 여기저기에 얼굴을 내밀다가 고등학교 동창인 이형기의 주선으로당
시 유명한 이두용감독님을 만나게 된다.
빌어먹을 연출부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였다.
이런.... 죄송 개인적으로 빌어먹은거지 연출부가 빌어
먹는다는건 아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그래도 빌어먹던 시절이 그립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