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어떤 그리움
ty6646
2007.05.16 03:11:13
가만 앉아있어도 더워서 본의아니게 도서관을 찾게되었다. 역시 자리는 없다.
우리학교 얘들은 공부를 잘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도서관은 언제나 만원이다.
둘러보니 책과 노트가 달랑 한권씩만 놓여져있는 자리가 있다.
친구를 위해 잡아준 자리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금방 주인이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앉아서 두꺼운 법전을 꺼낸다.
그리고는 잠깐 엎어져서는 눈을 감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땀으로 끈적끈적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기분이 상쾌해지고,
간간히 드나드는 발소리가 졸음을 돋우어준다.
누군가가 흔들기에 일어나보니 법전위로 침이 한바가지나 흘려져있고,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어 닦다가 나를 깨운 사람이 누군가 궁금해서 쳐다보니 친구녀석이 서 있다.
친구 : 한참 찾았쟎냐. 너 답지않게 웬 도서관?
나 : 그러게 말이다(^^) 근데 뭐야?
친구 : 안갈래? 얘들 지금 스타(당구장)로 가고 있는데
나 : 오우, 시원한 냉커피가 생각나는군
친구 : 그 아저씨 커피솜씨는 일품이지
누렇게 변색한 법전을 가방속에 꿍쳐넣고 도서관 뒷문을 나와 사회대 언덕을 빠져내려갔다.
오후 2시, 거의 살인적인 뙤약볕이다.
반사되는 햇살에 눈부시도록 밝은 이시간, 캠퍼스를 누비는 학생들을 바라보니 평화로운 마음이 드나든다.
언덕위로 손을 잡은 연인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친구 : 미친넘들, 안그래도 더운데 쪄 죽을라구 환장했군
나 : 조-옷겠다. 너나 나나 언제한번 손잡고 캠퍼스 걸어보는 날이 오겠냐
친구 : 난 손같은건 안잡아. 쪽팔리게 손이 뭐냐 얘들 다보는데서
나 : 어라. 쟤네들 성호하고 은정이 아니냐
친구 : 그렇네…
나 : 언제 저렇게 되버렸지?
친구 : 방학중에 가까워졌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진짠가부네
마음속으로 좋아했던 은정이였다.
아닌 듯한 얼굴로 그녀옆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콩닥거리는 마음이 날 흔들어놓곤 했는데.
언제,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혼자서만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 망할놈의 방학이, 저 못되먹은 후배녀석이 나의 은정이를 뺏어간 듯 하다.
친구 : 둘이 꽤 가까운 것 같은데
나 : 그래? 그냥 손만 잡은거 아닌가
친구 : 미친놈. 손 잡으면 끝난거지 뭐
나 : 쿵 (마음속으로 무언가 떨어지는 느낌)
당구를 끝내고 다시 오후 강의를 하나 듣고, 친구들과 잡담을 하며 강의실을 빠져나온다.
아까의 친구녀석이 복수를 하자며 팔을 나꿔챘다.
어떻게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선배의 입대 송별식이 있다며 노을(학교앞 술집)로 모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오후 5시, 가방하나 울러매고 교문앞을 나오니 아닌게 아니라 진짜 노을이 빨갛게 온 세상을 덮어가고 있었다.
싸이렌 소리처럼 울려대던 매미소리도, 세상을 구워먹을 듯 달려들던 강한 햇살도
전부 잔잔한 노을 빛이 덮어주며 부드럽고 은은한 감정으로 속삭여주는 그런 시간이다.
행복한 미소가 그냥 삐져나온다. 내 옷에 묻은 붉은 노을을 털어내버리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파란 빛이 깜빡 거리고 사람들 틈에 썩여 도로를 건넜다.
학교앞 가게들은 하나둘 불을 놓고 또다른 얼굴로 화장을 한듯 그렇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고 있다.
아스팔트위를 비추는 붉은 빛깔 세상은 버스창가에도 비치고, 내 뺨위에서도 부서진다.
도로 건너편에서 친구들이 손을 흔들어 댄다. 한쪽으로는 은정이와 성호도 보인다.
그네들 모두의 모습이 그냥 행복스럽고 평화롭게만 보인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던 것이다.
일어나 곰곰 생각해보니 거의 15년 전 대학시절때의 꿈을 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있었음직한 그런 꿈이었길래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늘 개꿈 비슷한 것만 꾸던 내가 실로 오랜만에 실제상황과 비슷한 꿈을 꾼 것이다.
내가 날라다니지도 않았고, 갑자기 지나가던 개가 말을 걸어온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일상의 모습을 꿈에서 본 것이다.
오히려 이런 꿈이 더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요즘은 잘 생각나지도 않던 그 시절을 그대로 꿈에서 겪은 탓에
깨어나 앉아 있으려니 너무나 그립고 생각나서 마음이 아프다.
그때 교문을 나와서 도로를 건넜고, 잠시 저녀노을에 물든 세상을 행복하게 바라본 난 그후 어디로 갔을까.
친구들과 복수전을 펼치기위해 당구장으로 갔을까, 아니면 선배 송별회에 갔을까.
그것도 이것도 아니면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을까.
그 시절의 난 그때 어디로 발을 돌렸을까.
되돌아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어떤 그리움이 내 눈동자위로 가득 내려앉아 있다.
눈을 들어 바라보는 먼 곳에 있는 15년 전의 내 모습이 그대로 손에 잡힐 듯한 몹시도 그리운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