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이모부
sadsong
2007.01.09 17:10:18
1.
큰 잔칫날인 듯
상들이 줄지어 놓인 커다란 이층집 마루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는 사촌누나(큰이모의 딸)가 보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와 먹고 이야기하며 한동안 머물다 나가면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는 그런 식이었다.
색다른 것은, 앞선 손님들이 나간 다음 새로운 손님들을 받을 때엔
2층 거실 벽에 달린 두꺼비집 속의 퓨즈들도 새로 갈아줘야 한다는 사촌누나의 말이었다.
마치 새 손님엔 새 상을 차려내듯 퓨즈들도 새롭게 바꾸는.
그런 큰 잔치에는 의례히 그런 식으로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들 여기고 있다.
의아했지만,
바쁜 사촌누나 대신 그런 일에 익숙한 내가 퓨즈 교체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이상하다. 쉬운 작업인데 생각처럼 잘 되지를 않는다.
쩔쩔매는 사이 새로운 손님들이 2층으로 올라오고 있다.
진땀 흘리던 난 퓨즈교체를 포기하고 누나에게 말한다.
"누나, 이런 거 원래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있던 퓨즈 그냥 계속 써도 돼요."
그것은 꼭 기존의 전통이나 질서를 뒤집겠다는 반기처럼 여겨질 법도 했지만
의외로 그리고 다행히 사촌누나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눈치다.
"어.. 그래? 그런가...?"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선다.
그 중에는 종교인(아마도 천주교 신부)도 있다.
다른 이들이 그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린다.
그리고 잠시 다른 일들이 이어지고......
어느 길가에 있던 난 중학교 때의 친구 두 명을 만나 함께 어디론가 가다가
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2.
...그리곤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으며 누워 있다가 일어나 마루로 나가려는데
마침 집 전화벨이 울린다.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한 두 마디 통화내용만으로도
큰이모부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직감했고, 그 느낌은 엄마를 통해 곧 사실로 확인됐다.
3.
전쟁으로 이북의 가족 모두와 생이별하고 형제 단 둘만 남으로 피난 온 나의 큰이모부는
물을 것도 없이 벗은 발과 맨주먹으로 맨 땅에서부터 젊은 날들을 일궈내야만 했다.
역시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내려온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똥 푸는 일을 해야겠는데 똥 푸는 바가지 살 돈이 없었다."는 한 맺힌 회상을 듣는 것만으로
그 분의 고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렇게 땀과 눈물로 (어린 나에겐 궁궐처럼 보이던) 커다란 이층집과 적잖은 재산을 모으고
네 명의 자식들 모두 단단하게 키워내신 후에도
소주 한 잔 드시는 날이면
고생했던 이야기, 북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어김없이 보이는 눈물.
'어른의 눈물'
때마다 반복되는데다
'어른의 눈물'이란 것 자체로 우리들은 가끔 미소 짓기도 했지만
얼마나 새까맣게 타들어간 가슴이었으면
그 연세에 매번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을까를 지금에서야 한 번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 때엔 모두 그랬던 것이다.
전쟁이 그렇게까지 커질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곧 끝날 것 같았기에 삶의 터전을 모두 내버리면서까지 온가족이 떠나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혹은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혹은 "너희들 먼저 내려가서 자리 잡으면 우리는 나중에 가마." 했던 것이다.
헤어지더라도 38선이란 것이 그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아래 위 서로 오가며 살게 될 줄 알았던 것이다.
1950년 그 때엔 모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4.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슬픔은 그렇다 쳐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의 경제력과 잘 지은 자식농사로
남은 생 편히 지낼 일만 남았을 것 같던 이모부가,
말년에 닥친 외환위기에 직격탄을 맞아 똥바가지 시절부터 평생 모은 재산 다 날리다 못해 빚까지 떠안고,
큰아들의 이혼까지 지켜보고,
가족들의 수십 년 숨결이 깃든 그 이층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게 되는 것을 바라봐야 했던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젊은 날의 고생 때문이었는지 재산을 꽤 모은 뒤로도 자신을 위한 일에는
푼돈 한번 제대로 쓰지 않으시던 모습이 자꾸 겹치는 이유도 있었을 테고.
5.
그런 일들 연이어 겪으면서 몸이라도 성할 수가 있을까.
이모부가 암으로 몇 달 째 입원 중이신 병원을 내가 처음 찾아간 것은 겨우 삼일 전, 지난 토요일이다.
힘들게 투병중인 분을 뵙는다는 것에 왠지 모를(정말 모를) 두려움 같은 것이 느껴져
여러 달 지나도록 쉽게 찾아뵙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한구석 멍들어 있었는데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신다는 소식에
혹시라도 더 큰 죄를 지을까봐 이제야 형들과 함께 병원을 찾아간 것이다.
몇 달?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어느 정도 알아보기도 하고
때론 화를 내는 것인지 울부짖는 것인지(죽음을 앞 둔 상태에선 두 감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시기도 했었지만,
며칠 전부터는 거의 의식 없는 상태로 더 이상의 치료도 끊고 하루하루 위험한 고비를 넘기시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 우리가 찾은 바로 전날부턴 신기하게도 호흡이 아주 편해지셔서 의사도 의아해 했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갑자기 상태가 좋아지는 것은
뭔가 불길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는 것 역시 우리는 알고 있었다.)
부드러운 호흡으로 잠들어 계신 이모부 옆에 앉아 한동안 이모와 이야기를 나누다 인사드리고 그만 나오려는데
이모가 굳이 이모부를 흔들어 깨우며 소리치신다.
"애들 왔어요! 여보! **네 애들 왔어요."
"그냥 두세요 이모." 라고 말리려는 순간 감겨있던 이모부의 눈이 살짝 열린다.
어느 쪽을 향하는지 초점은 정확히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들을 느끼셨는지 온힘을 다해 손을 조금 들어 올리신다.
뭔가 의미 있는 말을 해드리고 싶었지만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그 퉁퉁 부은 손을 꼭 잡아드린다.
마주친 그 눈으로, 맞잡은 그 손으로, 무슨 말씀 하셨을까. 하고 싶으셨을까.
난 "이모부, 다음에 또 올게요." 라는 색 없는 말을 기계적으로 내뱉을 뿐이다.
6.
아마도,
꿈 속 잔치는 상을 치르는 모습이었고
꿈 속 큰 이층집은 내가 어려서 뛰어 놀던 (지금은 사라진)마당 넓은 큰이모네 이층집이었으리라.
꿈 속 종교인도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겠지.
결국 갈아 끼우지 못했던 퓨즈는...
그런 꿈에서 깨자마자 부음을 듣게 된 사실에 신기해하면서도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그 삶이 어떤 것이었을지.
그 삶에 어떤 사연들이 함께 했을지.
그 삶에 어떤 슬픔들이 함께 했을지.
그 것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간 뒤에라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겠지.
그 것이 내 이모부만의 삶 뿐 아니라
이 세상 힘겹게 살아내고 눈을 감는 그 누구의 것이라 해도.
sadsong / 4444 / ㅈㅎㄷ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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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반백년 전 그 모습으로 가족들 만나 내내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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