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식물원. 파초의 꿈.
sadsong
2006.09.30 04:01:11
*
남산 식물원은 1968년에 태어난 것이다.
그 짧은 생 마치고
이제 하루 뒤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영영.
확신하기도 힘들 정도의 어린날 희미한 기억들 뿐이지만,
사라진다니까.
특별한 감정 없던 어딘지 슬픈 느낌의 그 곳에
특별한 감정 남겨보려고 괜히 한 번 가본 것이다.
그래도 사라진다니까. 영영.
(+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무거운 감정 앞세우고 가는 오늘만큼은
후암동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거쳐서 가보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
'파초'라는 큼직한 식물에 달려있는 설명에서,
[...꽃이 핀(열매가 맺힌?) 이후에는 말라서 죽게 된다...]
어떻게든 죽는다니까, 어떻게든 파초는 슬픈 것이다.
그런데, 파초.. 파초...
파초가 뭐였더라.
아, '파초의 꿈을 아오. 파초의 꿈을 아오...'
그래, 그 노래였구나.
그래, 수와 진이었구나.
어딘지 슬퍼 보이던 그 노랫말 속 파초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이렇게 죽어버리는 것이었구나.
그리고, 어딘지 슬퍼 보이던 수와 진은 어디에.
*
그 옆에서 만난 바나나 나무에 달려있는 설명에서,
[높이 3~10M로 자라며 맛있는 바나나가 열린다.]
'맛있는 바나나가 열린다. 맛있는 바나나. 맛있는 바나나... 맛있는...'
재미있단 생각에 지어졌던 미소는 곧 사라지고
곱씹을수록, 1968년의 슬픔이 담긴 순수한 그 표현이 내 가슴을 후려친다.
그 땐 그렇게 때묻지 않았으나
그 사이 세상은 썩어버린 것이다.
확 죽어버릴까.
*
그 온실 속을 거닐 수 있는 날을 이제 겨우 하루 남겨 놓았는데도
국민과 약속한 관람시간 18시까지는 20분쯤이나 남았음에도
그 곳 관리자께선 문 닫을 시간이라며 자꾸 등을 떠미는 것이다.
이제 겨우 하루 남았는데도.
*
서른몇 시간쯤의 생명만을 남겨둔 숨죽인 식물원을 그 곳에 버려두고.
*
시끌벅적 도심으로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과 사람을 만나고.
*
집으로 돌아가는 자정 무렵의 버스 안.
스피커를 통해 언제부턴가 들려오고 있는 라디오 노랫소리가 내 정신을 깨워 붙잡는다.
파초.
스튜디오에 나와 직접 파초를 부르고 있는 수와 진.
...
태어나 처음 파초라는 것을 실제로 접하게 되었고,
때문에 같은 이름의 노래를 백만년만에 흥얼거려 보기도 하다가,
역시 백만년간 활동을 멈춘 것 같던 수와 진까지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
바로 몇시간 전이었다.
기적같은 우연이라 스스로 평하고
기념할만한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그저 한 밤의 고요한 시간을 달리는 버스 안일 뿐이었다.
*
이제 날이 밝고 다시 날이 지면
이 땅엔 더 이상 남산 식물원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렇게 약속하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무슨 수를 써도, 어떤 지랄발광을 해도
절대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애원해도, 피눈물로 밤을 지새도
단 한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그 사람
곁에 있는 동안
한 번이라도 더 손을 잡아줘야 하는 것이다.
sadsong / 4444 / ㅈㅎㄷ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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