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장미꽃 백송이 시리즈 제 9 탄
73lang
2006.01.03 10:35:19
1-
백반 한끼 값 보다 더 비싼 커피를 파는 스타벅스에서
아싸 가오리도 아닌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책을 펴놓고
폰사진의 얼짱각도를 유지한 채 독서를 하고 있는 뇨자가 눈에 띄었다.
설마 저 뇨자는 아니겄지...
그 동안 이러저러한 커뮤니티에서 챗팅을 하다 만난 뇨자들은
대부분 유오성을 닮았거나 제니퍼 맘대루 휘리릭 뿅 퓨전으로 오크와 슈렉을 합쳐 놓은 것 같은 외모였었다.
근데 한가한 스타벅스 안엔 연인 두쌍과 그뇨만이 있을뿐이었다.
정각에 맞춰서 나왔지만 아마도 늦나보다 생각했다.
흡연실로 들어가 담배를 태우며 그뇨를 기다렸다.
연거푸 줄담배를 태우며 메마른 눈매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30분이 지나도 그뇨(로 짐작되는 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핸펀에 저장된 최근 수신 메세지 번호를 확인한 후 버튼을 길게 눌렀다.
곡명을 알 수 없는 음악이 잠시 흐르고
새끈한 패션리더같은 옷차림에 계속해서 얼짱각도를 유지한 채 책을 읽고 있던 그뇨가 전화를 받았다.
난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순간 나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머리가 심하게 저려왔다.
그뇨는 책을 덮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얼마가 지났는지 알수 없었다.
여전히 웃고 있는 저 뇨자땀시 난 어떠한 생각도 해낼수가 없었다.
그뇨가 내 곁으로 바짝 밀착하자 나는 두려운 감정이 생겼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뇨와의 첫만남은 이렇게 시작됐었다.
2-
항상 쓸어넘겨야 하는 그런 헤어 스타일을 고수했던 그뇨.
"참 우연인가봐요"
묘한 웃음과 함께 그뇨는 핸드백이 걸리지 않는 긴 팔을 흐느적거리며 앞서 걸었다.
모델의 걸음걸이처럼 당차고 힘이 있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뒤돌아 보자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이상하다...그냥 조금 똘끼가 있는 그런 뇨자일까?'
온라인상의 이러저러한 커뮤니티를 통해서 만났었던 사람들 중
약간은 예외적인 뇨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걸 떠올려보면 이 뇨자는 그래도 극히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두번째 만남땐 정동 스타식스에서 영화를 관람한 후
우린 덕수궁 돌담길까지 줄곧 걷기만 했었다.
문득, 그뇨의 뒷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면스롱
잠시 잠깐 행복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다.
나와 그뇨의 관계는
마음 속으로 '이게 꿈이여 생시여'를 연발하며
그뇨의 따뜻한 손을 마주잡고 팔짱을 낀 채 거리를 걷거나
간단한 포옹이나 애무를 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었다.
찌찌를 한번 만져보고 싶었지만 거기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3-
"이름이 남자 이름인데?"
"엄마는 아들을 낳고 싶어하셔서 미리 지었는데 내가 딸이라서 실망하셨대요.
난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구요"
그뇨는 약간 웃어보였다.
4-
유치하다고만 생각했던
100일째 만남 기념하기 같은 걸 하고 있는 내 모습은
그뇨를 만나기 전까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론 그렇고 그런 유치찬란하고 그렇고 그런 뻔한 연애담이 이어졌었다.
가족들은 모두 이민을 가고 서울에 혼자 남겨진 채 독신으로 살고 있다던 그뇨.
난 마지막 단계인 응응응을 할 기회만을 엿보면서 그뇨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우린 이미 오랜 연인이 된 듯 했었다.
"인자 그만 가봐야 쓰겄넌디..."라고 말끝을 흐렸지만 도저히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나는 가기를 포기하고 분위기를 잡으며 그뇨가 주는 와인을 마셨다.
방안엔 내가 선물한 장미꽃 백송이도 놓여져 있었다.
오뜨 뚜와렛인지 외우기도 버거운 향수이름이나
이쁜 파스타 음식이나
방안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영화같은 감성을 자극하는 이탈리아 음악이나
여기저기서 퍼다 나른 귀여니스러운 시로 점철된 그뇨의 싸이월드 같은
까리한 핑크빛 취향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나는 그뇨의 머리칼을 귀뒤로 넘겨주고는 얘기를 했다.
아...이런게 사랑을 하는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던가.
그뇨의 왼손이 나의 가슴위에 얹혀져 있었다. 외롭고 씰씰할 때마다 내가 주물럭대던 가슴에 말이다.
나의 입술은 그뇨의 눈 언저리에 닿았다.
오후의 매우 한가로운 여유처럼 서늘한 봄바람처럼 미지근한 물처럼 좋았다.
시간의 영원이라는 것이 이런것에만 있다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하면스롱
그뇨를 품에 안았었다.
그 상태로라면 평생동안 그뇨의 지지대 역할만을 할 수도 있을것 같았다.
그렇게 처음 맛보는 상콤한 행복은 거기까지 였었다.
그뇨가 가성의 목소리로 아름다운 허밍을 흥얼거리며 샤워실로 들어갔었다.
난 그뇨의 침대 위에서 덤블링을 해대며 좋아라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폴짝폴짝 방방 뛰어댕김스롱 앗싸~를 연발하며 갖은 오도방정을 떨다가
그뇨의 화장대에 있던 핸드백을 바닥에 떨어뜨렸었다.
핸드백을 집어들다가 그 안에 있던 펼쳐져 있던 지갑을 보게 되었다.
오디오에서 흘러 나오던 음악이 슬픈 음율로 전개되면스롱 더욱 더 구슬픈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주민번호 뒷자리에 1로 시작되는 그뇨의 민증이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비싼 돈 주고 산 장미꽃 백송이를 다 씹어묵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앗따 그람 그라치! 내 팔자에...처음부터 애인이나 뇨자같은건 없었던 거여"를 속으로 되뇌이며 조용히 그곳을 나섰다.
5-
정동 스타식스 영화관에서 정초부터 혼자 영화를 관람한 후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시청 앞에 다다르자 즐겁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연인들>이나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현란한 네온 트리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저마다 디카나 폰카로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코를 훌쩍였고 잠시 동안 멍하니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다정해 보이는 연인 한쌍이 내게 다가와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오...오랜만에 보는 수동식 필름 카메라...
폴라로이드나 디카와 달리 수동식 필름 카메라의 장점은 찍은 내용을 즉석에서 확인을 해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마치 내가 사진작가라도 된양 그들에게 좀 더 다정한 포즈를 요구하면스롱 사진을 찍었다.
서울 시청앞 루미나리에 스케이트장을 배경으로
화려한 초대형 네온 앞에 서 있는 조 닭살 커플을 최대한 이쁘게
대가리만 짤리게 찍어줬다.
킬킬거리며 행복해 보이는 <연인들>과 <가족들> 사이를 지나치면서
주민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되는 그뇨(?)를 떠올렸다.
잠시나마 내게 상콤한 감상에 젖게 해줬던 그뇨(?)...
나는 그뇨(?)를 기분 좋은 꿈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겔겔..(′•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