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입원해있는 대학병원에 <투사부일체>팀이 와서 촬영을 하고 있더라.
으리으리, 삐까번쩍한 새 건물이다.
지난 여름에 완공, 공식적인 개원식은 9월에 해서 환자가 아주 많은 편은 아니다.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교수님이 홍보부에서 병원 홍보차 영화나 드라마 촬영 좀 물어오라고 했다면서
신삥 대학병원 헌팅할때 필요하면 오라고 하셨다.
헌팅 다니던 영화는 이미 엎어졌으니 나한텐 소용없고, 낼름 필커 로케이션 정보란에 올렸다.
결국 로케이션 헌팅은 안 왔지만 아빠의 수술 차 이 병원에 오게 되었다.
아빠 침상 옆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자게 되는 날에는 노트북과 볼 영화를 챙겨와서
글을 끄적거리거나 볼륨을 꺼놓고 자막 읽어가면서 영화를 본다.
꽤 일찍 잠드는 깜깜한 병실, 노트북 화면에서 뿜어져나오는 빛으로 새벽까지 개긴다.
몇 시간에 한 번씩 혈압과 체온을 재고 링겔을 교체해주러 간호사가 들어와 조명을 켜지 않는 이상 말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mute 상태에서 화면의 흐름만으로 보게 되는 영화의 맛이란...
청각장애인들은 늘 이렇게 영화를 보겠지? 음악도 대사도 폴리도 없는 그림만 있는 영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먹먹한 가운데 영화를 본다. 와, 나는 금새 그림들의 구도에 반했다.
과장되거나 군더더기 없이 일식요리처럼 깔끔하고 정갈하다.
볼륨을 0으로 놓고 영화를 보고 있자니... 초등학교 다닐 때 청각장애인 친구가 있었다는게 기억났다.
듣지를 못하니 말하지도 못했다.
동정심과 이타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내가 벗어날 수 없는 본능이다.
가끔은 그게 나를 옭아맨다. 내가 베푸는 작은 친절은 지속성을 요구하니까.
‘은정’이라는 그 아이는 5학년 때 친구였는데 그 학급이 그대로 6학년으로 올라갔지 아마.
칠판에 써주지 않고 담임이 불러주는 자잘한 알림장 내용은
내가 그 애에게 일일이 써주고 늘 그 애의 집에 같이 가서 걔네 엄마, 아빠에게 인사드리고 같이 놀았다.
걔네 엄마가 같이 놀아줘서 고맙다는 식으로 매일 주는 초콜렛 때문에
매일 그 집에 출근도장을 찍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반학교에 다니는 장애우들은 친구가 많지 않은 편이고 같이 놀기 시작한 친구랑만 논다.
그녀가 나한테 집착하거나 나를 피곤하게 한 기억은 없다.
‘조제’처럼 곁에 있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은근히 ‘츠네오’처럼 지칠 때가 있었나?
어느 날 그 초등학교의 좁은 후문길... 그녀 뒤에서 트럭이 빵!하고 울렸다.
그녀는 듣질 못하고 계속 길 가운데로 걸어갔다.
트럭운전수는 소리 질렀다. “야! 귀먹었어? 죽고 싶어?”
그녀는 귀가 먹었지만 죽고 싶진 않았을텐데... 트럭운전수의 말을 들은 건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네! 귀먹었어요, 어쩔래요? 당돌하게 되묻지 않았다. 어린 마음은 답답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이창동의 <오아시스> 시나리오 지문에 나오는 것처럼
‘거위같이 꺼억꺼억’ 거리는 소리였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반애들하고 신나게 놀고 있는데 뭔가 재밌는 일이 있었나보다,
그녀가 무척이나 신이 나서 깔깔거렸다.
물론 그녀의 웃음소리의 의성어는 ‘깔깔’이 아니라 ‘꺼억꺼억’이었지만.
나는 갑자기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서 그녀에게 얼굴을 찌푸리며 과장된 입모양으로
‘웃지 좀 마.’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 밤 일기장에 썼다. 내가 뭔데 웃음소리가 듣기 싫다고 남보고 웃어라, 마라냐.
정말 나쁜 아이다. 뭐, 그런 나름대로 반성의 일기였지만
아마 그건 매일 일기장 검사를 하는 담임선생님께 반성 잘하는 착한 어린이라는 칭찬이 듣고 싶어서
쓴 것일지도 모른다.
‘츠네오’는 옛날에 사귀던 미녀 여자친구에게 돌아간다.
라면을 먹을까 우동을 먹을까 얘기하다가 갑자기 꺼억꺼억 울기 시작한다.
“헤어지고 나서도 친구로 지내는 여자가 있다. 하지만 조제는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조제가 장애라는 개성이 있다뿐이지 그녀는 헤어질 수 있는 그냥 여자 한 명이다.
너무 특별한 사랑을 했던 여자라서 친구로 지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을 뿐.
(헤어지고 나서도 친구로 지내는 건 지랄스러운 절교의 여왕인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뭐, 쿨하지 못하고 후지다고? 쿨이고 핫이고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그런 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친구는 다른 초등학교 동창들처럼 졸업과 동시에 내 기억에서 점차 사라졌다.
중학교에 다닐 때 딱 한번 그 동네에서 본 적이 있는데
서로 왼손바닥에 오른 쪽 검지로 글씨를 한 자 한 자 써가며 어느 중학교에 다니는 지 확인한 후
간단한 안부만 묻고 헤어졌다.
병실에 쪼그리고 앉아 무음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굉장히 오랜만에 그녀가 떠올랐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지지도 않는 초등학교 동창 중 하나일 뿐.
아마 결혼해서 애 한 둘 낳아서 잘 살고 있겠지... 라고 대충 생각해버린다.
조제는 이제 튼튼한 모터가 달린 휠체어를 얻었고 집에서는 여전히 쿵쿵 다이빙을 하며 혼자 잘 먹고 잘 산다.
영화는 그렇게 쌈빡하게 끝.
우리들의 인생극장도 늘 그렇게 쌈빡하게 알아서 끝내고 후질 때 다시 시작하자,
그럼 늘 시작은 미비하였으나 그 끝은 쌈빡하리라가 되니까...
(홀로된 조제의 엔딩을 ‘쌈빡하게 끝’이라고 썼지만
그녀의 뒷모습이 가슴 아프고 안쓰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실연의 아픔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나싶게 사라지니까
그냥 쌈빡하게 끝인것이다.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고 조제에게는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올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