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요
junsway
2005.05.21 20:46:36
감독과 동료작가와 강남역 부근의 오피스텔 하나를 단기임대해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요샌 다들 아시겠지만 워낙 불경기라 강남의 고급 오피스텔도 남아돈다고 한다.
그래서 부동산업자들이 생각한 것이 일종의 콘도형식처럼(풀옵셥으로) 갖춰놓고 단기로 고급 오피스텔을
임대해준다.
가구며 인테리어며 모두 고급스럽고 무엇보다 세명이 먹고 자기에 너무나 안락하고 넓었다.
한달 계약으로 영화사가 마련해준 그 보금자리에서 세명이 뒹굴며 써대며 때론 서로 싸우며 시나리오를 썼다.
생각해보면 다큰 어른들이 애들처럼 매일 수다를 떨고 벽에 도표를 그려가며 씬정리를 하고
3대의 노트북이 끊임없이 문자의 향연을 벌이며 즐거워하고.....
지금까지 몇몇 모텔급 여관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항상 '아 다시는 모텔에 들어오지 않는다.'라며
모텔의 비인간적이 환경에 한이 되었던 나로서는 이번 작업은 그야말로 호텔 부럽지 않은 좋은 환경이었다.
진행비로 밥사먹고 간식까지 챙겨 위장에 우겨넣고 좋아하는 포스트 잇도 많이 사며 영화만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한때 영화 '쉬리'를 집필해 유명해진 신사동의 '삼화호텔'도 가보았고, 강남의 대박친 영화가
집필된 모텔급 여관에서 작업도 해보았는데 역시나 사람 숨막히게 하는 환경들이다.
일테면 밤이면 옆방에서 쉴새없이 소리를 질러대고, 조명은 어두컴컴하고, 앉은뱅이 책상은 흔들거리는....
그 단점을 극복하려 양수리 촬영장 앞 스텝들이 묵는(다들 한번쯤 자보셨겠지만) 숙식이 가능한 곳에서도
작업하고, 가평도 가보고, 강원도도 가보고....... 그러나 모두 불만족이었다.
영화사 사무실에서도 써보고, 집에서도 써보고, 도서관에서도 써보고, 피씨방에서도 쓰고, 심지어는 만화방에서도 쓰
고 안되면 길거리 벤치에 앉아 노트에도 써보았다.
어떤 곳은 공기가 좋지 않아 하루 종일 자고, 어떤 곳은 식당이 변변치 않아 허기지고, 어떤 곳은 밤마다 옆방에서
방해하고, 어떤 곳은 풍광이 너무 좋아 놀아야겠고, 어떤 곳은 이상하게 불안해서 글이 안나가고.....
작가들이야 잘되면 자신의 능력탓이고, 못되면 환경탓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번 작업은 매우 좋았다는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월세로서는 상당히 큰 금액이지만
세명의 작가를 모텔에 넣는다고 해도 이정도 방값은 충분히 지불해야 한다고 할 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다 동료작가와 감독이 허리가 아파 침대에 못자고 바닥에서 자는 관계로 그 넓은 더불침대를 내가
다 차지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던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박찬욱 감독이 공동경비구역 대박치고 일류 호텔에서 멋지게 작업했다고 하나
그거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들 영화하는 사람들의 방해꾼은 어디든 있다.
그 오피스텔은 상당히 많은 방이 있었는데 역시나 사무실로 쓰는 부류들과 가정으로 쓰는 젊은 부부들,
그리고 문제의 '나가요'걸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나가요 걸들과 시나리오 작가의 공통점이라면 역시 밤에 일하고 낮에 잔다는 게 아닐까?
그러니 라이프 싸이클을 잘만 맞추면 나가요걸들의 등퇴장에 훌륭하게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남자분들은 다 알겠지만 강남역과 역삼역 그리고 선릉역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테헤란로'는 욕정에 불붙는
남자라면 한번쯤 꿈꾸는 그런 거리다. 룸싸롱과 안마시술소가 즐비하고 심지어는 고급요정까지.....
여기에 종사하는 전문 나가요들이 이 오피스텔에 대거 살고 있었는데 아마 수입들이 대단한 것 같았다.
거리가 가까워 산다고 하기엔 고가의 오피스텔은 웬만한 월급쟁이가 살기에 버거운 곳임에 틀림없다.
우리 작업의 최대의 방해꾼들이었던 나가요걸들.
늘씬한 키에 훌륭한 미모, 그리고 에로틱 스타일이 온몸에서 뿜어나오니..... 남자 셋인 우리로서는 고통이 많았다.
저녁때는 잘 차려입고 출근하고 아침에는 퇴근한다. 그러니 희안하게 지하주차장이 오전 오후에는 만차고
저녁 밤에는 빈다. 이해할 수 있으시겠죠?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가임여성 중 4명중 1명이 술집 등의 접대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무서운 이야기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대로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강남 일대의 고급룸싸롱과 유흥업소에 포진한 나가요걸들은
시네마서비스나 싸이더스, MKB 등의 일류영화사들처럼 대한민국 최정상급 나가요들이 아닐지.....
200만명 정도의 접대부중에 한 천명정도의 전국 최정상의 A급 나가요들이 무한경쟁을 벌이는 곳.....
그들은 뛰어난 미모와 재력으로 오피스텔의 한 구역을 장악하며 오늘도 일급 남성들에게 웃음을 팔고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참으로 그림의 떡일 수 있는 이러한 미모의 여성들이 오늘도
돈많은 남자품에서 온갖 기교를 부리며 안겨있을 생각을 하면 더 열받는다.
그 안에 비지니스란 명목으로 협잡을 부릴 수많은 돈많은 인간들과 몰지각한 영화제작자들이 펼칠
웃지 못할 행태도 분노를 치밀게 했다.
교수자리, 요지의 자리를 얻기 위해 높은 분들 앞에서 회오리주나 폭탄주를 제조하는 한심한 인간들도 생각났다.
그래. 그런게 더러우면 너도 성공하면 될 거 아니냐는 자조적인 말로 우리 세명의 영화인은 서로를 위안했지만
생각해보면 그 또한 얼마나 위선적이고 탐욕적인 생각이란 말인가.
결국 영화의 종착역이 돈이나 룸싸롱에 구겨진 인생이란 말인가?
한달후에 우린 부동산업자에게 '나가요'하고 오피스텔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은 나가요걸들이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좀 더 싼곳으로 정착하러 떠나고
새로운 뉴페이스들이 들어오겠지....
영화인생들도 나이를 먹으면 퇴물이 되고 감각도 떨어지고.....
결국은 돈도 못벌고, 이름도 못얻고, 남들이 다 간다는 고급룸싸롱도 못가본... 우리 한많은 영화청춘들은
오늘도 삼천원짜리 소주한병과 안주 두세개 시키고 선술집에서 밤을 보낸다.
그런들 어떠하냐? 동료가 있고, 영화가 있고, 사람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데.......
마틴 트레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