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사

pearljam75 2004.08.03 02: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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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엄마, 아빠는 왜 상의도 안하고 갑자기 이사를 했을까?

새 아파트는 인테리어가 끝장나게 고급스럽고 좋았다.
건물은 최첨단 시스템에 복도와 계단, 엘리베이터의 내부 장식은
모조리 앤티크한 것이 정말 부티가 나는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가 살 집으로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엔 부잣집 청년들이 타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나에게 자신은 영어를 잘하니 프리토킹 레슨을 공짜로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할까 말까 망설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서 대답도 않고 내려버렸다.

엘리베이터 밖에 펼쳐진 아파트 복도는 진짜 예술이었다.
온통 하얀 대리석에 금장식이 되어있었고
가로×세로가 2×3m 짜리로 드가의 <무대위의 무희>그림 액자가 걸려져 있었다.

우리가 살 집의 현관문도 워낙 묵직하고 삐까뻔쩍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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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 보이는 건 넓은 거실과 탁트인 전경이 보이는 베란다 대신 침대가 있는 좁은 방이었다.
그 방에는 창문도 없다.
실망스런 마음에 들어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칙칙한 부엌이다.
싱크대도 없고 연두색 싸구려 찬장이 달랑 놓여져있다.
부엌과 화장실까지해서 여덟평도 안되보이는 이 단칸방에서 우리 식구가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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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꿈과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의 방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연두색 싸구려 찬장....
냄새와 검은 연기를 품어내던 석유곤로도 보였던가?


어렸을 적엔, 셋방살이 시절엔, 지금의 내 방보다도 작은 단칸 방에서
어떻게 다섯식구-시골에서 엄마의 친정식구들이 무작정 상경할 경우는 +알파α-가
함께 먹고 자고 살아왔을까?

그 방엔 책상이 하나, 쌀통이 하나, 그 쌀통위엔 흑백텔레비전이 한대 놓여져있었고
다락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 그 문을 열어놓고 다락올라가는 계단에서 인형놀이를 하던 기억이 난다.
좁은 마루엔 냉장고와 옷장, 그리고 밤이면 요강이 놓여졌고...

그땐 우리 옆에 셋방, 또 그옆의 셋방의 식구(食口: 내 쉴 곳은 여기, ~비둘기집이나
가족이라는 개념보다는 밥숟갈 들어가는 입들로만 취급되는!)들도
모두 네명씩, 다섯명씩 단칸방에서 이리저리 낑꿔서 살아왔으니
서너평짜리 방 서너개가 달린 한지붕에 거의 스무명 정도의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는 말씀,

서울의 산동네.
여름이면 허연 구더기가 기어다니는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과
비오는 날이면 으레 창피하게 펴제껴야했던 살이 다 부러진 우산,
구멍난 양말, 구멍난 운동화,
지체납부되는 육성회비,
사가지 못한 준비물들,
삥땅쳐져서 마론인형(드라이하다하여 또는, 빼빼 말랐다하여 마른인형,
마루에서 가지고 논다하여 마루인형이라 불렸던)을 살 수 있게 했던, 한달치 급식비, 우유값.

피아노학원 다니는 아이들과
유치원을 졸업한 아이들을 부러워하고
침대와 수세식 좌변기 화장실이 있는 집에 사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던
가난한 나의 유년, 아동, 청소년시절을 되돌아보니,
(고3이 되서야 좌변기를 가지게 되었으니!)

강남의 금붙이 장식 붙은 삐까뻔쩍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버린 꿈은,
그러나 적어도 7, 8억 한다는 강남의 아파트 문을 열자 다시 어린시절의 단칸방이 나와버린
이 꿈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가난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인생이 뭔지를 조금 빨리 알게 되고,
쭉 경험하게 된다면 고달픈 운명에 지배되고 벗어날 수 없다... 이건가?

유복한 집안에서 나서 구김살없이, 별 큰 걱정없이 살아온 착하고 잘생기고 예절바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잘 지내다가 한번씩 튕겨져나오는 열등감들.

열등감은
먹고사는게 전쟁이라 악다구니를 치는게 생활패턴과
리듬이 된 사람들(예를 들면 우리 엄마?)과 있으면 오히려 나를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가난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기억들로부터 오는것같다.

이만하면 이제 우리집도 중산층!-나 자신은 여전히 빈민이지만.-이라 생각했건만,
단칸방의 유년시절은 재밌기도했고, 암울하고, 불편하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어째꺼나 포즈된 채로 무의식중에 남아있나보다.

그래서 쿨하지 못하고 늘 질척거리나부다.

어째꺼나 가난의 청산은 집에 대학생이 없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한 집에 대학생이 2명 이상 있으면 정말 쪼들린다.
학생시절이 학교라는 적도 있고, 어리광부려도 -그게 무슨 벼슬이라고- 사회가 인용해주는
지위이니까 좋긴 하지만,

월급쟁이 생활을 하며 기본소비문화를 즐기며 그럭저럭
고급문화생활도 하고 맛있는것도 찾아서 먹으러다니며 여유를 부려본 사람들은
가난했던 학생때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도 한다.

졸업을 하고, 동생도 졸업을 하고
이제 대학생이 집에 없게 된 지금.

난 고시생 생활을 접고, 시나리오 쓴답시고, 또 연출부로 잠깐 뛰어다닐때도 그렇고,
많은 돈을 만져본 적이 없지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더욱 떠올리게 하는 것은 카드의 제왕인 동생이다.

학교다닐땐 마몽드나 드봉만 쓰면 장땡이었으나, 돈 좀 번다고,
이젠 퇴근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크리스챤 디올이나, 랑콤, 시슬리 쇼핑만 한다.

레즈던트인가 인턴인가 하는 마마보이 남친에게 세트로 40만원이나 한다는
프랑스제 라쁘레리 화장품을 사달라고 조르다가 안 사주자, 헤어졌다고 하는 세속적인 그녀. 또는 그년.

(걔네는 헤어졌다 만났다를 한달에 10번은 한다. 벌써 3년째 그러고있다.
공부밖에 해본게 없는 땅부자집 마마보이 닥터와
환자들과 병원사람들한테 받은 스트레스를 모두 명품소비로 푸는 간호사의 결혼은
상식적으로 재앙에 가깝다.)

어린시절, 엄마, 아빠는 출근하고 오빠와 나는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교회학교에 함께 다녔다.
간식으로 50원짜리 빅파이만 나와도 헤벌레하던 그 어린 것이.......

여전히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또다른 -크리스챤!~ 디올.을 섬기니...


그녀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것인지는 모르겠다.


다시,
이 가난은 또 다시 재현되는 현실인가?
톡까놓고 말하자면, 영화를 해서 돈을 벌 수는 있는 걸까?
돈땜에 영화하는거 아니라고? 그건 나도 안다.

영화도 무용과 사람들이나 음대 하프전공하는 사람들처럼 돈 좀 있는 여유로운
사람들이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현재 이 시스템에서는?

왜 <태극기 휘날리며>는 1억달러 이상 수익이 났다면서,
그렇게 고생한 스탶들에게 뽀나쓰를 안주는가?
그들의 고차원적인 비지니스를 나는 이해할 길 없다.
대박나면 따쁠, 따따블로 뽀나쓰를 준다며 달랬다면서! 구라쟁이들!


영화, 열정을 태우고 가난해지지는 말아야할텐데....
가난의 추억은 20년 이상 충분히 즐겼으니까.

이제는 모두들 가난으로 이사하지 말아야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