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페미니즘을 논하지 말라!

pearljam75 2004.07.18 03:04:14
그는 상처입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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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전개를 위해 높임어미를 생략하겠다.

아빠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손하나 까딱안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아빠다.
권위의식은 없지만 귀차니즘의 신봉자다.
텔레토비처럼 TV를 달고 살며, 나처럼 소주를 달고 산다.
나는 담배를 끊었지만 그는 그러지 못하고 역시나 달고 산다.

식탁에서 식사를 하시면 좀 좋으련만, 꼭 TV앞까지 상을 차려 갖다드려야한다.
김정은 나오는 <파리의 연인>을 즐겨보며, <대장금>에 열광했고,
모든 인간극장류의 다큐멘터리와 아침 드라마를 보며
질질 짜는 감정이 여린, 열등감의 결정체인 일종의 착한 소시민인데

식성도 어찌나 까탈시려우신지 대충대충 살림을 하는 엄마와 달리 나는 예민한 신경의 소유자라
아빠 밥상 한번 차릴때마다 최선을 다하다보니 난 이제 완전히 질려버렸다.
난 가끔 엄마의 팔자를 동정하기에 이르르기도 한다.

(오빠네는 신혼초 분가전 2년간 우리와 같이 살았는데
아빠의 삼시세끼-점심도 집에 들어오셔서 드시는 아빠!, 환장한다.- 밥상을 차렸던 새언니가
당시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은 사실에 대해 값을 쳐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인간은 자고로 밥을 맛있게 먹을 줄 알아야한다. 제발.....)

엄마도 돈을 벌고, 아빠도 돈을 벌지만 집안일은 모두 엄마가 하고,
손하나 까닥하지 않는 아빠를 보면
대한민국 남자들은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사..... 다 끝나고 나면 허리 아픈 제사.
아, 일년에 네번있는 제사를 지내는 날마다 나와 새언니, 엄마는 몇시간씩 주방에서 일을 해야하는데....
-여동생은 열외다. 나와 달리 연봉이 높다.- 아빠와 오빠는 고작 밤을 까는 정도의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가.


사건명: 삼선짬뽕 사건
사건번호: F20040619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어느 휴일, 집에는 나와 아빠뿐이었는데 아빠는 낮잠을 주무시고 일어나
짬뽕이나 한 그릇 잡수시겠다고 해서 나는 늘 먹는 중국집에 삼선짬뽕 하나를 주문했다.
아빠는 중국집 전화번호도 모른다.

왜 중국집에 음식 주문하는 간단한 것도 항상 내가 해야하는걸까?
아빠가 좀 하면 안되나? ....... 어째꺼나 주문정도야 할 수 있다.

띵똥~ 짬뽕이 왔다.
나는 주방에서 상을 차린다. 수저를 놓고 앞접시를 챙기고, 물과 김치를 놓는다.
나는 상을 차리고 있으니 아빠가 현관문을 좀 열어주셨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빠가 누군가. 손하나 까닥안하는 아빠 아닌가.
난 밥상을 느릿느릿 차리며 버텼다.

아빠가 드디어 일어났다. 나도 그제서야 현관쪽으로 움직인다.
주방에서 현관쪽으로 움직이는 나를 보더니, 아빠는 다시 소파에 앉아 TV를 보신다.
나는 경악한다.
철가방님께 짬뽕 한그릇을 받고 돈을 지불한다.
짬뽕을 받아 다 차린 상을 들고 아빠 코앞에 갖다 드리며 나는 급기야 소리질렀다.

"왜 여자만 부려먹어~~~~!!!!!!!!!!!!!!!!!!!!!!!!!!!!!!!!!!!!!!!!!!!!!!!!!!!!!!!!!!!!!!!!!!!!!"

난 내방으로 들어와서 씩씩거리며 컴퓨터앞에 붙어있었고 잠시 후,
식사를 다 끝낸 아빠가 어쩐 일인지, 상을 주방으로 치우는 것이었다.
손 하나 까닥 안하는 아빠가 말이다.

아빠는 곧 소주를 왕창 드시더니,
나름대로 열받아서 낮잠을 자고 있는 나를 깨우더니,
얘기 좀 하자셨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나만 부려먹을 수 있냐는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아빠가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 키워놨더니 자식 부려먹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섭섭하고 열받은 심정을 토로하셨다.
딸래미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아빠는 가슴이 찢어지게 괴로우셨나부다.

나는 "왜 나만 부려먹느냐" 한적이 없었다고 확실히 말하며,
왜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가사일을 여자가 해야하는지 알 수 없다, 정말 너무한다, 말했지만,

이미 아빠는 소주때문에 정신을 반쯤 놓은 상태,
내가 돈을 얼마나 힘들게 벌어서 널 키웠느냐, 내가 널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사실, 어렸을적부터 아빠의 나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오빠와 동생과는 다른 뭔가가 있긴 했다. 인정!)
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 똑같은 말을 한 7번쯤 하다가,

더 이상 반복 청취를 하기 싫은 나는, 내가 잘못했다, 여자들의 가사노동에 대한 의견이었다,
내가 감히 어떻게 아빠에게 날 부려먹느냐고 말할 수 있겠느냐,
자식 좀 부려먹으면 어떠냐, 등등, 내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나서야

논쟁은 끝났다.

내가 가사노동의 불평등의 예로 제사 얘기를 하자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남자들은 밤을 까잖아. 어? 정성을 다해서 밤을 까는데 뭐가 잘못된거라는거야?"

헐......

아빠는 소주에 취해 상처를 받은 상태였고, 나는 아빠에게 상처를 준게 너무 너무 죄송하고
내가 아빠를 오해하게 만들어서 슬프게 한게 너무 가슴이 아픈데다가,
어줍잖은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는데 씨알이도 안먹히는게 답답해서 졸라게 울고 난 후라서
머리가 띵했다.

어르신들에게 여자의 가사노동의 너무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그것에 대해 토를 달면 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태만히하려하느냐,
질책과 원망만 들을뿐이라는 사실이 너무 끔찍했다.

노란색 책표지 <선택>.......생각이 났다.
이문열 어르신, 매일 매일 밥상 좀 정성스레 차려서 남에게 대접해보시지요.
여자들이 살림을 하는 이유는 할 줄 아는게 그것밖에 없어서도 아니고, 그게 하기 쉬워서도 아니고,
이타적인 족속이라 그런겁니다. 나보다는 남을 더 많이 배려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현대여성들이 왜 당연히 해야 하는 남편과 시부모 봉양,
조신하게 집안일 할 생각은 안하고 꾀부리고 여권운동입네, 떠벌이고 다니냐고
질타하지는 마십시오, 어르신.... 졸라 힘들고 때론 무지 귀찮은 일입니다.
해봤어야 알지.....이런.

과거의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과 인습타파는 다른 것이다.
어르신들의 생각이 모두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쌩까는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당신들은 고추가 떨어질까봐 해보지도 못했고, 하지도 않았던 부엌에서의 일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소모적이며 비주얼하게 인정받기 어려운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나의 복창은 터진다.

가사노동의 분할이 페미니즘과 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도리로
남자들이 탱자탱자, 놀고 먹는동안 육체적 약자인 여자들이 허리가 휘도록
부엌데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난 요리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기며,
술안주 만들어서 친구들 불러 밤새 먹고 마실것을 베푸는 것을 낙으로 알며,
(서비스업에 종사할 걸그랬다. 아웃백이나 베니건스 같은데서 매니저 했으면 잘했을텐데...)
다른 아가씨들이 TV홈쇼핑에서 김영애 황토팩을 사서 피부를 가꿀때,
매직블럭 200개를 사서 욕조청소를 하며 세척력에 탄복하고,
테팔 후라이팬 3종세트를 사서 후라이팬 코팅력에 감탄할 만큼 살림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명절은 두렵다.
(새언니와 엄마를 돕는것에 불과한 나도 이런데, 시댁에서 일하는 주부들은 어떠하랴...)


*위의 사건은 벌써 한달 전 사건이다.

나는 아빠가 느낀 인생무상과 무자식=상팔자 등식과 가족관계와해등등, 서운함을 만회하고자,
예전보다 더 밥상차리기에 최선을 다했고,
아빠는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안하는 아빠로 살고 계신다.
하여간 뼈빠지게 키워놓은 딸래미의 지랄은 아빠에겐 일종의 트라우마로 죽을 때까지 가슴에 남으리라....


지난 주, TV에서 해주는 <대부>의 말론 브란도를 보며
나는, 소주에 취해 소파에 누워 주무시고 계시는 소심한 소시민 아빠와 비교를 했다.

가족을 끔찍히 사랑하는 마피아 보스 돈 꼴레오네와
택시 드라이버인 나의 아빠는 별 다를게 없는 듯 했다.

/결국엔 늘 같은것을 깨달으면서 왜 비슷한 문제로 논쟁이 마구벌어지는지, 이 어리석음이 지긋지긋하다.